[불교벽화 이야기]
마음의 소를 찾는 심우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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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 2022 년 12 월 [통권 제116호] / / 작성일22-12-05 14:03 / 조회3,437회 / 댓글0건본문
인우구망
여덟 번째 인우구망人牛俱忘에서는 ‘망우존인忘牛存人’에서 남아 있던 사람의 모습도 없이 모두 다 텅 비어 있다. 이를 벽화로 나타낼 때는 고운사 벽화와 같이 일원상一圓相(사진 1)으로만 그리거나 혹은 송광사 벽화(사진 2)와 같이 배경에 구름이나 산수풍경을 그려 넣어서 단조로움을 피하고 운치를 살리기도 한다. 게송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편색인우진속공 鞭索人牛盡屬空
벽천요활신난통 碧天遼闊信難通
홍로염상쟁용설 紅爐焰上爭容雪
도차방능합조종 到此方能合祖宗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 모두 비어 있으니
푸른 허공만 아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구나.
붉은 화로의 불이
어찌 눈雪을 용납하리오
이 경지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
즉, 본심本心의 바다 위에 한 점 티끌도 없고, 한 조각의 물결도 없네. 수행도 깨달음도 자기도 세계도 없으니, 어찌 붓을 들겠는가? 천만 가지 분별이 붉은 화로 위의 한 점 눈이라 한 티끌의 그림자도 남기지 않네. 라고 풀어 볼 수 있겠다.
여덟 번째인 인우구망에서는 위의 언급처럼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소도 없고 소를 찾는 이도 없다. 채찍, 소, 사람 모두가 사라져 버리고 텅 비었을 뿐이다. 그래서 서序에는 “범부의 정도 성인의 뜻도 다 비웠다. 부처님 계신 곳이라 좋아라 노닐 필요도 없고 부처님 안 계신 곳에선 급히 지나가 버려라. 어느 쪽에도 끄달리지 않으니 천안天眼으로도 눈치 채기 힘들어라. 백조가 꽃을 물고 와 공양을 바친들 한바탕 부끄러운 짓거리일세.”라고 이르고 있다. 즉 정情을 잊고 세상의 물物을 버려 공空에 이르렀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내 밖에 찾아야 할 무엇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바로 내가 여태껏 찾아 헤매 왔던 그것이었다. 찾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일원성이 나의 본성이며 모든 것과 하나였다. 이것의 이름이 공이었으며 한계가 없는 우리의 근원이었다.
이러한 경계를 화송和頌에서는, “즐거워라, 즐거워라. 중생계가 이미 텅 비었구나.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할 수가 있을까. 뒤따라오는 사람 없고 앞에 먼저 간 사람도 없으니 도대체 누구에게 이 종지 이을 것을 부탁할거나.”라고 노래하였다.
심우도가 말해 주는 모든 것 중 불성 또는 참나를 찾는다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닌 실존적인 것이라는 가르침을 보여 주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주워 모은 정보나 이미 주어진, 공식화되고 화석화된 해답이 아니라 심지어 경전에서 빌려 온 것조차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오른 해답만이 깨달음의 상태로 이끌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석두石頭(700~790) 스님에게 제자인 도오道悟 스님이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네가 그것을 스스로 경험해 보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 곧 이를 말한다. 어떤 주어진 해답이 아닌 하나의 깨달음, 하나의 실존적인 경험이 자기 존재의 중심에 이르는 길임을 심우도는 시각화된 언어인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석존께서는 사문유관四門游觀을 통해 늙음·병듦·죽음을 보셨다. 자신은 물론 누구나 다 그러하다면 삶 전체가 속절없음을,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참된 삶이라고 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유성출가踰城出家를 하신 것이다. 즉 소를 찾는 것은 곧 참된 삶을 찾는 것이다. 삶은 그것이 영원할 때 참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꿈과 삶 사이에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심우도는 이렇게 불생불멸하는 생명의 실상을 깨치고 체득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반본환원
이제는 십우도의 아홉 번째인 반본환원返本還源이다.
반본환원에는 소도 없고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텅 빈 상태도 아닌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져 있다(사진 3). 벽화를 보고 게송과 함께 해설을 통해 그 의미를 새겨 보자.
반본환원이비공 返本還源已費功
쟁여직하약맹롱 爭如直下若盲聾
암중불견암전물 庵中不見庵前物
수자망망화자홍 水自茫茫花自紅
근본으로 돌아오고자 무척이나 공을 들였구나.
그러나 어찌 그냥 귀머거리 장님 됨만 같으랴.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의 사물 보지 않나니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진정 근원으로 돌아와 보니,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네. 소를 찾아 나선 이래 한 생각 한 생각이 오히려 소의 모습 아니었던가? 보지 않으면 안팎을 함께 보지 않고, 보면 전체를 보나니 기이할 것 아무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네. 라는 의미로 풀어 볼 수 있다.
반본환원은 있는 그대로의 수록산청水綠山靑 산수 정경을 그렸다. 이는 『오등회원五燈會元』에 나오는 청원유신靑原惟信의 장章에, “아직 참선하지 않을 때,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었다. 나중에 참선을 하고 깨달음을 얻은 뒤에 산을 보니 산이 아니요, 물을 보니 물이 아니게끔 되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궁극적인 자리를 알고 나서 다시 산과 물을 보니 여전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구절이 좋은 참고가 되겠다.
다시 말해서 본심은 본래 청정하여 아무 번뇌가 없어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얻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반본환원 벽화는 이렇게 순수한 공空일 때 있는 것은 무엇이나 진실이 된다는 가르침을 시각화해 놓은 것이다. 즉 “나무는 산을 흉내 내지 않고, 흐르는 물은 붉은 꽃을 질투하지 않는다.”라는 구절과 같이 나무와 꽃들, 흐르는 물과 산들은 이미 자신의 참된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삼조 승찬僧璨 스님은 “좋고 싫음과 같은 갈등이 마음의 병이다. 나 자신이 그것을 어렵게 했지 위대한 도는 쉬운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인간이 참된 본성을 놓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되고자 하는 뿌리 깊은 욕망이 장애물이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오직 자신으로만 존재할 수 있음을 반본환원 벽화는 있는 그대로의 산수를 그려서 그 내용과 형식을 전달해 주고 있다.
입전수수
이젠 심우도의 마지막인 입전수수入廛垂手이다. 대부분의 입전수수 벽화는 해인사 원당암 선불당의 벽화에서처럼 지팡이에 포대를 메고 중생 속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묘사한다(사진 4). 이는 불교의 궁극적 뜻이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노흉선족입전래 露胸跣足入廛來
말토도회소만시 抹土塗灰笑滿顋
불용신선진비결 不用神仙眞秘訣
직교고목방화개 直敎枯木放花開
가슴을 풀어헤치고 맨발로 저자에 들어가니
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 가득 함박웃음
신선의 비법 따윈 쓰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우는구나.
입전수수는 중생제도를 위해 자루를 들고 자비의 손을 내밀며 중생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렸다. 즉 이타행利他行의 경지에 들어 중생제도에 나선 것을 비유한 것이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면 원은 최초로 돌아옴으로써 완결된다. 입전수수에서는 다시 마을로, 중생들 속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그려서 이를 나타내고 있다.
심우도의 각 단계가 비단 궁극적 경계에만 국한하지 않더라도 일상 속의 모든 일을 완성해 가는 단계와도 상통하고 있다. 따라서 위로는 깨달음이라는 것에서부터 아래로는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을 완성해 가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즉 주변에서 그 중심에 이르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고경 독자님들과 함께 불화에 이어 벽화의 의미와 상징들을 살펴보는 행복한 여정을 이어왔습니다. 이제 심우도의 입전수수로 회향하게 되면서 그간 벽화를 찍으러 사찰을 찾아다니고 사진을 선별했던 시간이 새삼 정겹게 떠오릅니다. 원고 게재과정에서 배려와 고견을 아끼지 않으신 편집진에 감사드리고 독자님들의 심중소구를 남김없이 이루시길 기원하면서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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