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의 장인을 찾아서]
범종, 천년의 시공에 울려퍼지는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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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리 / 2022 년 12 월 [통권 제116호] / / 작성일22-12-05 14:11 / 조회3,295회 / 댓글0건본문
주철장 원광식
검은 새벽.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는 시간. 고요한 사찰에서 첫 예불 시간은 사물四物의 타종으로 시작을 알린다. 불교의식에 쓰는 네 가지 도구, 법구사물은 수중 생물을 깨우는 목어木魚, 땅의 생물을 깨우는 법고法鼓, 하늘의 새를 깨우는 운판雲板, 그리고 산 아래 모든 중생들을 깨우는 범종梵鍾이다. 이 사물의 울림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사물과 예불소리에 어느새 어둠은 밀려나고 밝은 새날은 시작된다.
범종을 치는 이유
범종을 치는 본뜻은 지옥의 중생들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도록 하는 동시에, 불법의 장엄한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데 있다. 아침에 33번을 치는 것은 삼십삼천三十三天에 울리라는 뜻이고, 저녁에 28번을 치는 것은 이십팔수二十八宿에 들리라는 뜻이다.
범종은 불가에서 사용하는 범물이지만 불교의 영역을 넘어 역사와 예술을 담고,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는 새해가 밝아 올 때 보신각의 타종소리를 들으며 희망차고 또 벅찬 마음으로 여느 날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특별한 첫날을 맞이한다. 범종이 한 번씩 굉~~ 굉~~ 하고 큰 소리로 울릴 때마다 우리의 심장은 어느새 뜨겁게 고동치며 새 희망으로 가득 차는 설레임을 만끽하게 된다.
범종이 빚어내는 깊은 울림의 소리는 사람들에게 묘한 전율을 느끼게 하고, 생기 있는 삶을 시작하게 만드는 용기를 선물해 준다. 나아가 사회를 단합시키고 문화적 자긍심을 드높이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중한 문화적 산물이 되기도 한다. 이 마법 같은 일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그 비밀을 풀어 보자.
한국 범종의 매력, 맥놀이
종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악기로 쓰이는 악종樂鍾, 시와 때를 알리는 시종時鐘, 위급함을 알리는 경종警鐘, 그리고 불가에서 종교적 의미로 쓰이는 범종梵鍾으로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종류를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컫는 종은 주로 범종이다. 주로 불교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며, 때를 알리고 대중을 모을 때에도 사용된다.
무엇보다 범종은 소리로써 중생을 구제하기에 좋은 울림을 주는 범종은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종의 소리가 좋다는 것은 맥놀이[진동수가 약간 다른 두 개의 소리가 간섭을 일으켜 소리가 주기적으로 세어졌다 약해졌다 하는 현상]가 뛰어나다 뜻이기도 하다.
한국의 범종은 중국이나 일본의 범종과는 달리 조형미와 기술적 우수성이 뛰어나다. 특히 웅장하면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긴 여운의 맥놀이 현상은 과학기술에 대한 놀라움을 넘어 진한 감동을 자아낸다. 한국 범종의 특색은 맑고 청아한 음색을 가지며, 또한 긴 여운과 뚜렷한 맥놀이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범종으로 통일신라의 성덕대왕신종, 상원사 동종, 고려의 흥천사종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좋은 소리로 평가되는 상원사종(725년)은 엄숙하고 장중한 성품으로, 저음의 느린 울림이 일품이라 평가받고 있다. 또 국내 최대 종인 성덕대왕신종은 약 3초에 한 번씩 여운에 울림이 생기면서 종소리가 퍼져나가 태산이 무너질 듯 장중하면서도 자비로운 여운이 그칠 줄 모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이 성덕대왕신종을 처음 본 학자들과 외국인들은 그 예술성과 과학기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경주박물관에서 이 종을 봤던 미국의 소설가 펄 벅은 “이 종 하나로 박물관을 세우고 남음이 있다. 에밀레종은 세계적인 보물이다.”라는 찬사를 남겼다.
범종의 울림을 찾아다닌 60년
국가주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원광식 주철장은 범종 제작에 특히 좋은 소리를 찾기 위해 일평생을 집중해 왔다. 그중 통일신라의 종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60여 년을 꼬박 종을 만들고 연구하는 데 시간을 보내 왔건만 아직도 부족하다며 지금도 꿈속에서 종을 만들거나 종소리 듣는 꿈을 꾸곤 한다고 한다.
국내 주요 사찰이나 지역의 종 대부분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보신각종, 대전 엑스포대종, 충북 천년대종, 임진각 평화의 종을 비롯해 조계사, 해인사, 통도사, 불국사, 선운사, 선암사, 화엄사, 송광사의 동종 등 우리가 스치고 지나면서 한 번쯤 만나보았을 범종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의 명성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다. 대만 최대의 범종인 명선사종(33t)도 원광식 선생의 작품이며, 다른 불교권 국가에서도 그의 손에서 빚어진 범종을 탐낸다. 원광식 선생은 일본, 중국, 대만, 태국, 싱가폴, 홍콩,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 20여 개국으로 범종을 수출하고 있다. 그만큼 시각, 청각적으로 예술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보고 듣기에 아름답기 위해서는 상당한 과학적 분석과 설계,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물론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의 반복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과학적인 분석, 음색, 음향의 평가는 매우 중요해요. 아래위의 중량의 분포를 어디에 놓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집니다. 그 최고의 핵심 포인트가 구조 설계입니다.”
이 미묘하고도 섬세한 음향분석을 위해 음향 측정장치도 보유하고 있다. 음향 분석은 물론 완성된 범종의 음향 교정까지 직접 실행할 수 있는 공법이다. 수없는 노력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력을 완성하는 중인 것이다. 특히 소멸되었던 우리의 전통 주조기법인 밀랍주조공법을 독자적인 연구 끝에 재현해 내는 데 성공했다.
이 공로로 2000년 대한민국 명장으로 지정됐다. 이듬해인 2001년에는 장인 최고의 영예인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에 지정되었고, 2005년 전통 밀랍주조공법을 개량해 대형 범종 제작에 적합한 새로운 밀랍주조공법의 특허도 획득했다. 이로써 5m 이상의 초대형 범종까지도 밀랍주조공법으로 제작할 수 있게 됐다. 천 년 전 기술을 뛰어넘어 더 세밀하고 더 완벽한 기술에 도전하는 것이다.
범종은 규모가 크고 1200℃에 달하는 고온의 용해 작업이 필요한 만큼 긴 작업 시간과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쇳물을 주입하는 주조 과정은 각별히 신중을 기해야 하며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이다. 늘 도전하고 공부하지만 위험도 일상이었다.
새로운 도전, ‘칠보 범종’
현재 원광식 대표의 아들인 원천수 성종사 기업부설연구소장이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덕분에 기술력은 나날이 진화하고 결국 새로운 쾌거를 냈다. 자체적으로 ‘칠보七寶 범종’ 제작기법을 개발해 주목된다. 문양에 다양한 색을 입히고 그 위에 금박을 붙이는 불교미술의 칠보개금을 범종 제작에 도입했다. 범종에 칠보개금을 입히는 특허기술로 최근 세계 최초의 칼라 대종을 조성했다.
본래 칠보개금은 제품 표면에 삼베로 배접을 하고 그 위에 문양을 그려 넣은 후 채색과 개금을 하는 기법이다. 주로 불상에 사용되어 왔던 방식이다. 성종사는 10여 년 전부터 범종에 칠보로 개금하는 방법을 금강불교의 청원스님과 공동연구를 진행해 왔다. 결코 쉽지 않았다. 칠보개금을 하려면 반드시 제품 표면에 배접을 해야 하는데, 범종에 배접을 할 경우 종의 생명인 종소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성종사에서는 전매특허기술인 정밀주조기법을 이용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원천수 소장은 “배접했을 때의 질감을 주물에서 뽑아냄으로써 실제 배접한 것과 동일한 효과를 얻어냈다.”며 “문양의 아름다움은 극대화시키면서 개금으로 인한 종소리의 저하는 최소화했다.”고 평가했다. 도전은 대를 이어 새로운 양식의 아름다움을 창출하였다.
한국의 범종은 불교사상, 불교교리, 금속공예, 예술 등 여러 장르를 총괄할 수 있는 종교예술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천년의 과학기술이 응집되어 있는 살아 있는 발명품이며, 사람들의 가슴에 법法을 새기는 진리의 소리이며, 세상을 맑게 깨우는 귀한 울림을 지녔기 때문이다. 천 년의 전통을 지닌 한국 범종의 주조기술이 지금도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것은 원광식, 원천수 부자와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연구하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천에는 다양한 우리 종과 종소리를 경험할 수 있는 종박물관이 있다. 주철장 원광식 선생은 단절된 전통 주조기술을 복원하고 다음 세대에 계승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하고자 재현, 복원해 온 종 150여 점을 진천군에 기증하여 그 토대로 진천종박물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좋은 것, 좋은 소리는 우리 안에 있다. 멀리서 찾지 말고 국내 진천에서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도 ‘최고의 소리’를 찾기 위해 학생의 마음으로 공부하고 또 공부한다는 원광식 주철장의 목소리가 또 하나의 범종의 울림처럼 가슴 깊이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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