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조계사 재무 소임 두 달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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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2 년 12 월 [통권 제116호] / / 작성일22-12-05 14:23 / 조회3,531회 / 댓글0건본문
봉암사에서 서옹스님께 『서장』 「이참정공」 편을 묻다
고우스님은 서옹(1912~2003)스님과도 가깝게 지냈다. 수좌 도반들과 봉암사를 정화한 뒤 서옹스님을 조실로 모셨다. 이때 대효스님도 봉암사에서 모시고 살았고, 미산스님도 행자로 있었다. 서옹스님이 봉암사 조실로 계실 때 결제 중임에도 수좌들에게 『임제록』 강설을 하였다. 봉암사가 다시 수좌 도량으로 회복되고 선풍을 진작하는 데 서옹스님도 각별한 원력을 행하셨다. 봉암사가 구산선문 전통과 결사 정신을 이어서 선풍을 회복하고 조실 서옹스님이 『임제록』 강설을 하자 제방에 화제가 되었다.
이렇듯 서옹스님이 봉암사 조실로 계실 때 고우스님과 일화가 하나 있다. 서옹스님은 성철, 향곡스님과 1912년 임자생 동갑으로 아주 가까운 도반으로 지냈다. 이 세 분은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선문禪門의 정통이라는 입장도 같았다. 그때 고우스님은 돈오점수 공부를 하고 있던 때라 성철스님께도 대들었지만, 서옹스님께도 물어보고 싶었다.
어느 날 봉암사 조실채로 서옹스님을 찾아뵙고 물었다.
“『서장』 「이참정공」편에 나오는 ‘이치는 문득 깨닫는 것이라 깨달음을 따라 아울러 녹여 가지만, 일은 홀연히 제거할 수 없으니 차제에 따라 없애야 한다.’는 대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아직 『서장』을 안 봤어. 『서장』을 한 번 가져와 보지.”
의외의 말씀이었다. 백양사 만암스님 문하로 출가하여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시다 일본 교토로 유학 가서 임제대학에서 공부하시고 돌아와서 선방에서 정진하시고 조실까지 되신 분이 간화선의 교과서라 하는 『서장』을 아직 보지 않았다니 뜻밖이었다. 그래서 봉암사 경내에서 『서장』을 구해서 가져다 드리니 「이참정공」 편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편지는 대혜스님이 거사들에게 하는 것이라 방편으로 하신 말씀 같다. 대혜스님은 임제종 명안종사이시니 확철대오가 돈오의 기준인 분인데 깨달은 뒤 점차 닦는 말씀을 하실 리가 없는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방편이거나 아니면 후대에 누가 첨삭한 것 같다.”
서옹스님의 이 말씀이 당시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일 이 『서장』 「이참정공」 편 문제를 성철스님께도 물었다. 성철스님 역시 “『서장』이 여러 본이 있는데, 그 대목은 누가 첨삭한 것 같다. 법으로 보면 대혜스님 사상과는 어긋나는 말씀이다.”라고 하셨다
서옹 종정, 서암 총무원장을 모시고 조계사 재무 소임을 살다
1970년대 초에 고우스님을 비롯한 수좌들이 모셔와 봉암사 조실로 계시던 서옹스님께서 1974년 7월에 조계종 제5대 종정에 추대되어 취임하였다.
그 일년 뒤인 1975년 10월에 평소 은사처럼 존경하고 따랐던 서암스님이 종단 총무원장으로 가시어 고우스님을 조계사로 불렀다. 가서 뵈니 조계사 소임을 좀 살아 달라 부탁하셨다. 이렇게 하여 고우스님은 조계사 재무로 서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서암스님 이전 총무원장은 경산스님이었는데, 집행부의 여러 문제가 드러나 사퇴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이에 종정 서옹스님은 원적사에 계시던 서암스님을 총무원장으로 모셔 오고 싶어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서암스님이 고사하였다.
서암스님은 1969년 봉암사 제2결사 당시 초기에는 봉암사에 왕래는 하셨지만, 주로 원적사에 계셨다. 서암스님의 회고록 『그대 보지 못했는가』를 보면, 당시에 서암스님에게 서울 조계사로 올라와서 종단 소임을 맡아 달라는 권유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스님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종단 정화의 큰 공로자이며 노장이신 대희스님과 비룡스님이 종정 서옹스님의 편지를 가지고 직접 원적사로 찾아와서 종단이 어려운 상황이니 서울로 가서 총무원장을 맡아 달라 간곡히 말씀하시어 하는 수 없이 조계사로 와서 총무원장을 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당시 총무원 상황은 참으로 어려웠다. 전임 총무원장이 비리로 구속되어 있었고, 종정 서옹스님 측근에는 모사꾼들이 득실거렸다. 그런 현실에서 서암스님은 서옹스님을 모시고 종단을 바로 세워 보려고 봉암사 수좌들을 서울로 오라 해서 소임을 맡긴 것이다. 조계사 주지에 휴암스님, 고우스님에게 재무를 맡겼다.
어려운 조계사 운영과 살림을 일신하다
당시 조계사는 별 수입도 없었고, 신도도 많지 않았다. 대처승을 종단 밖으로 내보낸 정화 뒤 비구승 중심으로 종단이 운영되었으나 출가하여 참선 수행만 하던 비구승들이 종단과 사찰 소임을 맡아 운영하려니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 더하여 문중과 본사 사이의 이해관계가 부딪히니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 종단 소임자들도 수시로 바뀌었고, 조계사 주지도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조계사 주변의 불자들도 조계사에 정을 붙이고 시주하거나 봉사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심지어 조계사 소임 스님들도 밤이 되면 양복을 입고 외출하거나 술집 출입을 하여 승풍이 타락하니 뜻있는 불자들의 불신과 지탄을 받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잘 아는 서암스님과 고우스님 등 수좌들은 조계사 운영을 쇄신하였다. 먼저 조석 예불을 반드시 하고 절 공양을 하고 외부 식당 출입을 금했다. 또 조계사 방사의 텔레비전을 다 없애는 등 수행 도량다운 청규를 시행했다. 서암 총무원장을 비롯하여 소임 스님들이 직접 솔선수범하고 아침 일찍 도량 청소까지 직접 하니 불자들의 인식이 하루아침에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하여 조계사에 선방을 만들었다. 출가하여 산중에서 참선하던 수좌들이 절 소임을 맡았으니 자연 선방이 필요했다. 또 조계종의 대표 사찰에 선방이 없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계사에 지금은 없어진 정화기념관 2층 큰방을 선방으로 만들어 중앙선원이라 이름 붙이고 정진을 시작했다.
조계사 신도들뿐 아니라 주변 불자들의 반응이 한 달 만에 확 달라졌다. 수행을 본분으로 하는 수좌들이 조계사를 일신하고 있다는 입소문이 나더니 드디어 일간 신문에도 기사가 크게 나기 시작했다. 비구- 대처 정화의 후유증으로 조계사는 싸우는 곳으로 알았는데, 수좌들이 여법하게 수행하고 전법 교화하며 모범적인 생활을 하니 스님다운 스님들이 왔다고 시주 공양 보시가 늘어나 조계사 재정도 튼튼해졌다. 한 달도 되지 않아 일어난 큰 변화의 바람이었다. 서암스님은 당시 상황을 회고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깨끗한 학승 출신인 휴암스님을 주지로 하고 고우스님을 재무로 하여 조계사의 살림을 일신토록 하였다. 그 스님네들은 지성을 다하여 열심히 일해 줬다.”
조계사에서 다시 산으로 돌아오다
이렇게 수좌들이 맡은 조계사가 운영이 여법해지고 재정이 튼튼해지자 이것이 또 문제가 되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다. 수좌들이 조계사 운영을 맡아 재정이 좋아졌다는 소문이 나자 조계사 주변의 사판승들과 협잡배들이 시기 질투하기 시작했다. 고기 덩어리를 쫓아 개미떼가 몰려들듯이 돈과 이권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이런 조계사와 총무원을 그냥 두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총무원장 서암스님이 일간 신문에 좋은 내용으로 인터뷰도 크게 나자 종정스님 측근들이 이러다 종단이 서암스님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서암 총무원장을 견제해야 한다며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리하여 서암스님은 총무원에서 추진하려던 계획이 종정스님에 의해 번번히 막히고 뒤집히자 더 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에 스님은 임기를 시작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았지만 수좌들과 상의하여 사표를 쓰고 다시 봉암사로 돌아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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