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동서문화 논쟁과 양수명의 동서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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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2 년 12 월 [통권 제116호] / / 작성일22-12-05 10:36 / 조회2,930회 / 댓글0건본문
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24 | 양수명梁漱溟 1893-1988 ③
5・4신문화운동은 서양문화가 동양에 침입한 이래 중국 전통사상과 문화가 나아갔던 근대화의 길에 대한 반성이었다. 1915년 『청년잡지』로 창간되었다가 1916년 이름을 바꾼 『신청년』은 의식 변혁의 큰 돌파구가 되었고, 중국 근・현대의 한 분기점이 되는 5・4신문화운동과 거기에서 시작되는 동서문화 논쟁이 촉발되었다.
동서문화 논쟁의 전개
『신청년』은 개인의 독립, 개성의 해방을 바탕으로 유학 중심의 전통문화에 대한 투쟁과 신문화의 창조를 호소하였다. 이들은 서양에 비해 동양이 발전하지 못한 원인을 주로 유학에 두었으므로, 그들의 구호와 목표는 “공자의 가게를 타도하라!(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는 것이었고, 지식인층과 청년층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동방잡지』는 전통문화를 되살리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신문화와 조화시켜야 한다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두 진영은 동서문화의 본질과 차이라는 문제를 두고 10여 년간 강렬한 논쟁을 계속하였다.
동서문화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수백 명이 넘었고, 발표된 글은 1,000편이나 되었을 뿐 아니라, 동서문화에 대한 논의의 심도는 갈수록 깊어졌다. 주제는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관계에 주로 집중되었지만, 그 외에도 문화의 계승과 혁신, 문화에 대한 계급분석, 문화와 경제・정치의 관계,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관계 등 여러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동서문화 논쟁의 두 진영은 신문화운동의 주창자들인 진보파와 구문화를 옹호하는 보수파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진보파는 전반서화파, 과학파, 초기 마르크스주의 외에도 자유주의, 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사상 경향이 섞여 있었고, 그들 사상에는 차이가 있지만 ‘전통 유학과의 결별’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성격을 띠었다.
진보파에는 진독수, 이대조, 구추백 등과 전반서화파인 호적, 과학파를 대표하는 정문강, 그 외에 장동손, 장몽린, 오치휘, 상내치 등이 있었다. 이들은 논쟁이 진행되면서 점차 서양문화의 도입을 주장하는 서방문화파와 봉건주의・자본주의가 아닌 제3의 길인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로 나뉘게 되었다.
보수파는 복고파와 동방문화파로 대별될 수 있는데, 복고주의파에 강유위, 엄복, 강유위의 제자인 진환장, 표맹화 등이 있고, 동방문화파에는 『동방잡지』를 중심으로 한 두아천, 전지수, 진가이 등과 『학형』을 주요 진지로 삼았던 장사조, 오밀, 매광적, 그리고 양계초, 양수명, 장군매 같은 인물이 속하였다.
양수명은 보수파, 그 중에서도 동방문화파에 속함을 알 수 있다. 복고주의파는 주로 원세개의 복벽을 지지하거나 참여하고 서양문화의 장점을 철저히 부정하였던 반면에, 동방문화파는 전통 존중이라는 면에서는 복고주의와 비슷하나 전통 위에서 서양문화의 도입으로 새로운 문화 건설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방향을 달리하였다. 근대화의 모색에서 복고주의는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하고 점차 힘을 잃어갔고, 마르크스주의자, 동방문화파, 서방문화파가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논쟁하게 되었다.
동서문화 논쟁은 대략 세 시기로 전개되었다. 첫 단계는 1915년 『신청년』의 창간에서 1919년 5・4운동 시기까지로, 동서문화에 관한 논쟁은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우열을 비교하는 데 집중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5・4운동 이후로, 이때에는 동양문화와 서양문화가 조화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중심이 되었다. 동양문화와 서양문화가 ‘옛 것[舊]’과 ‘새 것[新]’의 문제로 발전하였고, 신문화와 구문화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두 문화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로 발전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양계초가 『구유심영록』을 발표하고 양수명이 『동서문화와 그 철학』을 출판하는 시기로서, 동서문화 논쟁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때는 봉건주의 문화와 자본주의・사회주의 문화의 관계를 중심으로 논쟁이 진행되었다.
동방문화파의 동서문화관: “동서문화는 성격의 차이”
동서문화 논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중국의 문제는 반드시 사상・문화의 측면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문화결정론적 인식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중국을 포함한 동양의 위기는 사회 한 부분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전체의 문제이므로, 중요한 것은 사상의 개혁, 문화운동이지 정치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사상・문화의 힘으로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공통적인 전제였다. 그것이 당시 동서문화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자연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지역이나 민족, 사회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보편성은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거쳐야 비로소 드러날 수 있다. 문화의 보편성을 부정하면 협애한 민족주의에 빠지고, 문화의 민족성을 부정하게 되면 민족허무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생각이었다. 동방문화파가 주로 문화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전자의 입장에 서 있었다면, 서양문화파는 문화의 민족성을 부정하는 후자의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동방문화파는 동양문화를 우월한 정신문화로 보고 서양문화를 저급한 물질문화로 파악함으로써 동양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문화의 우월성 강조가 양수명을 포함한 동방문화파의 공통된 관점이었다. 동방문화파의 대표적 인물로 『동방잡지』 주편이었던 두아천杜亞泉은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은 성질이 다른 것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두아천의 의도는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차이가 고금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성격의 문화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문화가 옛것이고 서양문화가 지금의 새것이 아니므로, 동양이 반드시 서양을 따라갈 필요가 없게 된다. 나아가 서양문화의 폐해는 동양문화로 구제할 수 있고 서양문화를 본받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들은 서양문명 중 중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지만 또한 가장 큰 해를 끼친 철학이 공리주의(utilitarianism)라고 보았다. 공리주의의 폐해는 인간의 도덕 심성의 고양, 즉 정신문화의 추구를 저해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서방문화파는 서양 과학기술과 동양의 심성윤리가 조화되어야 한다는 동방문화파의 주장은 주관적인 환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서양문화는 고대에서 근대로 발전해 왔고, 중국문화는 아직 고대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근대의 서양문화로 고대의 동양문화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위 도표는 서방문화파의 이대조의 동서 민족성의 차이에 대한 논의이다.
이들은 서양이 이미 자본주의 공화정치를 실행하고 있는데 중국은 봉건전제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공화정치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동양 봉건전제주의와 서양 근대 자본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이들은 자본주의가 갖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현상들로 볼 때 서양 근대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중국 전통사상 중에서는 유학을 비판하는 한편 불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대하였다. 결론은 동양문화가 “물질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옛 것”에 불과하므로 새로운 도덕과 사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양수명의 동서문화관
양수명은 『동서문화와 그 철학』에서 ‘의욕’이 모든 문화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다. “문화란 무엇인가? 한 민족의 생활의 모습니다. 생활이란 무엇인가? 생활은 끝없는 의욕이다.” 양수명에 의하면 서양인들은 앞을 향해 나아가고 이지를 숭상하며 외부 물질을 연구하고 현세의 물질을 누릴 것을 추구한다.
반면에 중국인들은 조화를 이루고자 하고 직관을 숭상하며 내재적인 생명을 연구하고 심신의 정신적 안정을 구한다. 인도인들은 뒤를 향하여 가고 감각을 숭상하며 해탈을 구한다고 하였다. 서방문화파들은 이같은 동서문화의 특수성을 강조한 양수명 사상을 형이상학적인 허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양수명의 동서문화관은 ‘중국의 길(=공자의 길)’을 가고자 한 것으로, 장지동의 중체서용론, 동방문화파의 정신문명론, 이후 현대 신유학이라는 길로 이어진다.
양수명과 현대 신유학 등 동양 현대철학이 동방문화파의 동서문화 인식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화의 민족성이 근대화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여 근대화가 바로 서구화와 같을 수는 없다는 것, 즉 동서의 문제가 그대로 고금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동방문화파의 맥을 잇는 양수명과 그 이후 현대 신유가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현대 인류학의 문화다원론과 문화가치 상대론에 의하면, 민족은 각각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며 그 문화들은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따라서 현실에는 개별적・구체적 문화만 있고 보편적・추상적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에 서면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고, 근대화가 바로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게 된다. 그러나 사상・문화의 힘으로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동방문화파에게도, 서방문화파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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