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왜곡된 조선불교사를 바로 잡는 사지寺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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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2 년 12 월 [통권 제116호] / / 작성일22-12-05 11:05 / 조회2,814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사서史書 24 | 만덕사지萬德寺誌 ⑥
2년 동안의 연재를 마친다. 한국불교사에서도 미개척분야이자 그 관심 역시 저조한 조선과 근대불교의 시작을 소개하였다. 18세기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사지寺誌와 고승전, 그리고 실학자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정약용의 『대동선교고大東禪敎攷』 등에 소개된 우리나라 불교역사와 문화를 살폈다. 이들 자료는 조선후기 불교의 사정뿐만 아니라 이후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불교계의 정체성을 살피는 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밝히는 중요 사료
우선 조선후기 찬술된 『대둔사지』나 『만덕사지』 등은 불교계 내부의 선교학 사상이나 신앙, 그리고 교육, 승가의 동향, 사원경제, 왕조의 불교정책, 지배층의 불교 인식 등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불교역사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지는 우선 불교계 내부의 역동적인 동향을 소개하였다.
사찰은 그동안 전란과 탄압으로 뱀과 쥐의 소굴이 될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승가의 자구책 마련을 위한 다양한 노력으로 사원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사찰의 중건뿐만 아니라 300여 년 이상이나 정체停滯되었던 승가교육이 부흥하였다. 『대흥사지』의 12종사와 12강사, 『만덕사지』의 8국사와 8대사에 대한 서술과 현창은 불교계의 수행전통이 부활하고 있었음을 상징하고 있다. 조선 건국 이후 불교가 쇠퇴하여 사상이 지닌 가치까지도 소멸될 위기에 직면했던 상황과 비교한다면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사지류는 이와 같이 조선후기 불교계의 선교학 중흥의 면모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사지류는 우리나라 불교사를 찬술하고 있어 주목된다. 『대흥사지』는 대흥사의 창건을 중심으로 한 고대불교를 바로잡았고, 정약용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불교관련 기록을 별도로 발췌하여 불교수용 이후부터 삼국의 불교를 사지에 수록하기도 하였다. 『만덕사지』 또한 고려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주도했던 원묘요세圓妙了世 등 8국사의 생애와 사상을 수록했으며, 고려 중후기 불교역사를 찬술하여 동시대 불교계의 동향을 소개하였다. 사지는 이밖에 8명의 청허휴정 제자를 수록하여 백련사가 고려에 이어 수행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고 있음을 기술하였다.
이와 같은 사지류의 찬술은 이전의 기록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그 옳고 그름을 바로 잡고, 기록이 없는 것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역사적 흔적을 찾아 복원하기도 했다.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의 지나간 역사를 단순히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이단으로 전락시켰다면, 혹은 일개 사찰의 차원에서만 기록했다면 조선시대의 불교사 찬술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맹孔孟의 사상을 학습하고 그에 기초한 태평성대를 실현하고자 했던 유학자들조차도 우리나라 불교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우리 역사와 이 땅의 흙과 바람 속에 존재하면서 수많은 사람의 고통을 위로해주었던 불교를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물결 속에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불교사의 면모를 밝히는 사지류
조선시대 불교사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유학자들의 저술을 기초로 이해되어 탄압과 부정적 측면이 강했다. 때문에 불교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나 불교에 대한 오해의 우려를 지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조선불교는 그동안 청허휴정 1인에 대한 불교였고, 호국불교護國佛敎가 조선불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의 대명사로 이해되기까지 하였다.
한편으로 이해되는 부분이지만, 조선시대와 근대불교가 역동적이지 못하고 풍부하지 못하다는 인식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더욱이 학자들조차도 이 시기 불교의 사정에 대해 호기심조차도 갖지 못한 실정이었다. 때문에 한국불교사는 원효나 의상의 불교였고, 신라의 삼국통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영광의 불교였고, 불국사와 석굴암의 불교였다.
반면 조선불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무속신앙과 불교를 같이 취급하여 교조와 교리, 교단이 없는 종교였다. 승가는 수행과 자비심, 그리고 승가가 잊지 않고 있었던 사은四恩에 대한 사명감마저도 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불교는 신비스러운 종교였고, 진리와는 거리가 먼 이단의 종교로 전락하였다. 더욱이 스님은 혹세무민하고, 천한 노비와 같은 부류였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인식은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 근대불교에 대한 이해에서도 계속되었다. 한국불교는 개성이 없었으며, 선진적인 일본불교를 맹목적으로 배워야 하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대접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최근에도 계속되어 근대불교의 이해 기준을 친일과 항일의 프레임으로 항일불교의 모습을 마치 근대성에 미치지 못하거나 한국불교의 정체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편견이 가득하여 근대불교의 가치를 온전히 평가하지 못한다는 부정적 인식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근대성만을 강조하여 우리 불교의 독자성까지도 부정하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찬술된 고승전의 가치
한편 조선후기 찬술된 고승전은 단편적인 인물 규명에 머물지 않고 당시 불교계의 생동적이고 신축자재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이 역시 조선시대 불교계의 법맥法脈 계승을 중심으로 한 승가의 동향이나 계파 간의 상황 등을 살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승을 통해 불교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범해각안의 『동사열전』은 불교수용 이후부터 근대불교의 사정까지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더욱이 찬자가 4차례의 팔도유람을 통해 수집과 조사의 과정을 거쳐 정리하였다. 대체로 조선불교의 중흥조 청허휴정과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찬술되어 지역성과 인물면에서 불균형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해동고승전』이나 『삼국유사』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고, 앞의 두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물 위주의 우리나라 불교사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동사열전』이 찬술된 이후 고려의 보조지눌과 그의 사상과 유풍遺風을 계승한 조선의 부휴선수와 그 제자들의 전기를 정리한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이 금명보정에 의해서 찬술되기도 했다. 조선후기 선교학禪敎學의 종원宗院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던 대흥사와 송광사의 이와 같은 면모는 사원경제에 기초한 불교계의 중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지 찬술에 참여한 정약용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불교사의 찬술은 오랫동안 탄압과 수탈, 소외의 과정을 거친 이후여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더욱이 동시대 역사 찬술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어 그 수준이 탁월하다. 정조의 승하 직후부터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을 해야 했던 정약용이 찬술 작업에 참여한 것이다. 특히 “제가諸家의 견해 차이가 있으되 큰 문제가 아닌 경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只云 一云如此]’라고만 말한다.”는 정약용의 찬술 원칙은 “저서著書의 방법은 반드시 그 시대의 선후를 안 뒤 고증考證·증험證驗할 수 있다.”고 하여 객관적이고 엄정한 불교사 찬술을 기대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불교계는 전란으로 불타버린 전각을 중창하고 사찰의 기록을 복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새롭게 찬술된 사찰의 역사는 그 연대를 일부러 끌어올렸고, 인물에 대한 맹목적인 미화美化는 동시대 불교계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정약용이 찬술에 참여한 『대흥사지』와 『만덕사지』는 엄정한 고증의 과정을 거쳤고, 유실된 자료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스님들의 우리 불교사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향상시켰다. 때문에 두 사지는 조선시대 불교사뿐만 아니라 각각 고대불교사와 고려불교사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찬술하고 있는 것이다.
2년의 연재를 통해 아직까지 소외되고 관심 밖에 머물고 있는 조선과 근대불교사를 소개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필자의 전공이고 대부분이 이미 집필했던 원고를 소개했지만, 우리 불교사의 공백을 메우고 대중적으로 알리고자 한 처음의 의도를 생각하면 적지 않은 위안이 된다.
성철사상연구원은 그동안 부족하고 허술한 필자의 원고에 대해 한마디 지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정과 조언을 통해 원고의 완성도를 향상시켜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연구원의 발행인 벽해원택碧海圓澤 스님과 서재영 연구원장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고경』은 ‘학술적인 대중잡지 대중적인 학술잡지’를 표방하고 있다. 대중성과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교계의 언론과 차별화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참여가 제한적인 학자들의 전문분야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백련불교문화재단과 『고경』의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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