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빛의 말씀]
몸은 비록 다르나 자성은 항상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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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2 년 7 월 [통권 제111호] / / 작성일22-07-05 11:30 / 조회4,349회 / 댓글0건본문
선로宣老 스님의 격생불망隔生不忘
송宋나라 때, 시인이며 대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곽공보郭功甫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 사람을 잉태할 때 그의 어머니가 이태백의 꿈을 꾸었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이태백의 후신後身이라고 했는데, 뛰어난 천재였다고 합니다.
곽공보의 불교 스승은 귀종선歸宗宣 선사禪師인데 임제종의 스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귀종선 선사가 곽공보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앞으로 6년 동안 곽공보의 집에 와서 지냈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곽공보는 스님께서 연세가 많긴 하지만 어째서 자기의 집에서 6년을 지내려 하시는지 알 수 없어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날 밤이었습니다. 안방에서 잠을 자다가, 문득 부인이 큰 소리로 “아이쿠, 여기는 스님께서 들어오실 곳이 아닙니다.”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깨어났습니다. 부인이 꿈에 큰스님께서 자기들이 자고 있는 방에 들어왔다고 하는 말을 듣고 곽공보는 낮에 온 편지 생각이 나서 불을 켜고 부인에게 그 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사람을 절로 보내 알아보니 어젯밤에 스님께서 가만히 앉아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편지 내용과 꼭 맞았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곽공보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편지를 보낸 것이나 꿈 등으로 미루어볼 때 귀종선 선사가 곽공보의 집에 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달리 지을 수가 없어, 귀종선 선사의 ‘선宣’ 자를 따고, 늙을 ‘노老’ 를 넣어 ‘선로宣老’라고 했습니다.
생후 일 년쯤 되어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누구를 보든 ‘너’라고 하며 제자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법문을 하는데 스님의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어린애 취급을 할 수가 없어 모두 다 큰스님으로 대접하고 큰절을 올렸습니다. 아이의 엄마, 아버지도 큰절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났습니다.
당시 임제종의 정맥正脈을 이은 유명한 백운단白雲端 선사가 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세 살 되는 어린애를 안고 마중을 나갔더니 이 아이가 선사를 보고 “아하, 조카 오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생의 항렬로 치면 백운단 선사가 귀종선 선사의 조카 상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니 “사숙님!” 하고 어린아이에게 절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백운단 선사 같은 큰스님이 넙죽 절을 하였던 것입니다. 백운단 선사가 “우리가 이별한 지 몇 해나 됐는가?” 하고 물으니, 아이는 “4년 되지. 이 집에서 3년이요, 이 집에 오기 1년 전에 백련장에서 서로 만나 이야기하지 않았던가.”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을 말하자 백운단 선사는 아주 깊은 법담法談을 걸어 보았습니다. 법담을 거니 병에 담긴 물이 쏟아지듯 막힘이 없이 척척 받아넘기는데,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법담은 장황하여 다 이야기 못 하지만 『전등록傳燈錄』 같은 불교 선종 역사책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것이 유명한 귀종선 선사의 전생담입니다.
그 후 6년이 지나자 식구들을 모두 불러 놓고는 “본래 네 집에 6년만 있으려 하였으니 이제 난 간다.”고 하고는 가만히 앉아 입적했습니다. 이처럼 자유자재하게 몸을 바꾸는 것을 격생불망隔生不忘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전생, 후생으로 생을 바꾸어도 절대로 전생의 일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악혜사 스님의 삼생담三生談
중국의 역사책인 『당서唐書』에 나오는 것으로, ‘이원방원관李源訪圓觀’이라 하여 이원이라는 사람이 원관이라는 스님을 찾아간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나라 안록산의 난리(755~763) 때 당 명황唐明皇의 신하 중에 이증李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원은 그의 아들입니다. 이증은 당 명황이 안록산의 난리로 촉나라 성도로 도망갈 때 서울인 장안長安을 지키라는 왕명을 받고 안록산과 싸우다 순국했습니다. 뒤에 국란이 평정되고 환도한 후 나라에서 그 아들인 이원에게 벼슬을 주려 했으나 그는 도를 닦겠다고 하며 거절하고는 자기의 큰 집을 절로 만들고 혜림사蕙林寺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원관이라는 스님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고승전高僧傳』이나 『신승전神僧傳』
에는 ‘원관’으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더러 ‘원택圓澤’이라고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스님으로 마음 씀씀이가 퍽 좋았습니다.
한번은 원관스님과 이원 두 사람이 아미산峨眉山의 천축사 구경을 갔습니다. 구경하는 도중에 어느 지방의 길가에서 한 여인을 보고 원관스님이 “내가 저 여자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태어난 지 사흘 후에 찾아오면 당신을 보고 웃을 테니 그러면 내가 확실한 줄 아시오. 그리고 열두 해가 지난 뒤 천축사天竺寺로 찾아오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미산으로 가다가 이렇게 말하고 그는 길가에 앉아 죽어 버렸습니다. 원관스님의 이야기가 너무 이상해서 이원이 스님의 말대로 수소문해서 여인의 집을 찾아가 보니 사흘 전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원이 아이를 보자 그 아이는 이원을 보고 웃는 것이었습니다. 이원이 이로써 그 아이가 원관스님의 환생인 줄 확실히 알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사람들이 스님께서 가시면서 이번에 가면 안 온다고 말씀하시고, 어느 곳의 누구 집에 태어날 것이라고 모두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뒤 팔월 추석날 이원은 전당錢塘 천축사로 찾아갔습니다. 갈홍천葛洪川이라는 개울이 있는 곳에 이르자 달이 환히 밝은데 저쪽을 보니 웬 조그만 아이가 소를 타고 노래를 하며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 선생님은 참으로 신용 있는 사람이오. 그러나 가까이는 오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약속을 어기지 않고 찾아왔으니 신용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세속 욕심이 꽉 차 마음이 탁하니 가까이 오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원이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멈칫멈칫하며 서 있는데 아이는 저만큼 떨어져 소를 타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생돌 위 옛 주인이여
달구경 풍월함은 말하지 마라.
부끄럽다 정든 사람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몸은 비록 다르나 자성은 항상 같다.
전생 내생 일이 아득하여 알 수 없는데
인연을 말하고자 하니 창자가 끊어질 것 같다.
오나라 월나라 산천은 이미 다 보고
도리어 배를 돌려 구당으로 간다.
三生石上舊情魂
賞月吟風莫要論
慙愧情人遠相訪
此身雖異性長存
身前身後事茫茫
欲話因緣恐斷腸
吳越山川尋已遍
却廻煙掉上瞿塘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가는 것을 보고 이원은 그제서야 그 스님이 도를 통한 큰스님인 줄 알고, 더 가까이하여 법문을 듣고 공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돌아가서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뒤에 나라에서 이원에게 간이대부라는 높은 벼슬을 주었으나 이원은 이를 거절하고 팔십여 세까지 살았습니다.
이것이 ‘이원방원관’ 이야기의 내용으로, 이 이야기도 영겁불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전생의 일을 조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고 있으며 자유자재한 것입니다.
노래 가운데 ‘삼생돌 위 옛 주인’이란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면 천태지의天台智顗 선사의 스승인 남악혜사南嶽慧思 스님을 말합니다. 혜사스님(515~577)은 만년에 대소산大蘇山에서 남악형산南嶽衡山으로 처소를 옮기고 형산衡山의 천주봉天柱峰 봉우리 밑에 있는 복암사福岩寺라는 절에 주석住錫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전생에도 이 복암사에서 대중을 교육시켰는데 그 전생 일이 그리워서 이곳으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대중을 거느리고 나가더니 아주 경치가 뛰어난 한 곳에 이르러 “이곳이 옛날 절터야. 지금은 오래되어 아무 자취도 없지만, 내가 전생에 토굴을 짓고 공부하던 곳이야. 근처를 파 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그 주변을 파 보니 과연 기왓장과 각종 기물이 나왔습니다. 또 큰 바위가 있는 곳에 이르러 “이곳은 내가 앉아서 공부하던 곳이야. 죽어 이 바위 밑으로 떨어져 시체가 그대로 땅에 묻혔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땅을 파 보니 해골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혜사스님의 삼생담三生談입니다. 금생에는 복암사, 전생에는 토굴터, 그 전생은 바위 위이므로 삼생석인 것입니다.
혜사스님은 그 도력이나 신통이 자재한 것으로 유명한 스님으로, 그런 분이 분명히 증거를 들어 확인한 것이니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삼생의 해골이 나온 그 자리에 삼생탑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남악혜사 스님의 삼생탑三生塔으로, 유명한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원관스님이 말한 삼생석 위의 옛 주인이란 바로 혜사스님을 가리킨 것입니다. 곧 혜사스님이 돌아가셨다가 나중에 당나라에 태어나서 원관이라는 스님으로 숨어 살았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모든 생활이 범승凡僧과 같았지만 실제 생활은 자유자재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대자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 성철스님의 책 『자기를 바로 봅시다』에서 발췌 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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