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 이야기]
앙산의 원상과 향엄의 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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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2 년 11 월 [통권 제115호] / / 작성일22-11-07 11:11 / 조회6,818회 / 댓글0건본문
중국선 이야기 23 | 위앙종 선사상2
영우靈祐가 대위산大潙山에서 선을 펼치자 학인들이 운집하였는데, 그의 법을 적전嫡傳한 이는 바로 앙산혜적仰山慧寂(815~891 혹은 840~916)이다. 혜적의 전기는 『경덕전등록』 권11과 『송고승전』 권12, 『오등회원五燈會元』 권9 등에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혜적은 소주韶州 회화懷化(현 湖南省 懷化市) 출신으로, 속성俗姓은 엽葉이다.
『오등회원』에 따르면, 혜적의 9세에 광주廣州 화안사和安寺에서 선통禪通에게 출가하였다고 하며, 14세에 부모가 그를 데려와 강제로 결혼시키려 하였지만, 혜적은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주1) 『경덕전등록』에는 15세에 다시 출가하고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17세에 두 손가락을 끊고 부모 앞에 꿇어앉아서 바른 법을 구하여 보답하겠다고 하자 비로소 허락을 얻어 남화사南華寺의 통通 선사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주2 )
탐원으로부터 ‘원상’을 얻다
혜적은 출가 이후 사미沙彌의 신분으로 제방을 유행하다가 혜충慧忠 국사의 제자인 탐원耽源을 알현하여 현지玄旨를 깨달았다고 한다. 『오등회원』의 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재되어 있다.
탐원이 혜적에게 말하기를, “(남양혜충) 국사國師가 당시 육대조사六代祖師로부터 전해 받은 원상圓相이 모두 97개인데, 그것을 노승(탐원)에게 전해 주었다. (혜충국사가) 말하기를, ‘내가 입적한 30년 후에 남방에는 어떤 사미가 와서 크게 이 가르침을 흥성케 하고, 차례로 전수하여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지금 너에게 주겠으니, 너는 마땅히 받들어 지니거라.”고 하며 그 책을 혜적에게 주었다. 혜적은 받아서 한 번 보고 바로 그것을 불태워버렸다.
어느 날 탐원이 “전에 (너에게 준) 제상諸相들을 마땅히 비밀리에 귀중히 하고 있는가?”라고 묻자, 혜적은 “당시에 보고서 바로 태워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탐원이 “나의 이 법문은 능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오직 나의 스승과 여러 조사, 여러 큰 성인만이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인데, 너는 어째서 그것을 태워버렸는가?”라고 묻자, 혜적은 “제가 한 번 보고 이미 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책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탐원이 “비록 그렇지만, 너는 얻었다 하더라도 후인은 믿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자 혜적은 “화상이 만약 요구하신다면, 다시 기록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바로 다시 한 책으로 모아 드렸는데, 유실된 것이 없었다. 탐원은 “그렇구나!”라고 하였다.(주3)
이러한 고사로부터 위앙종의 독특한 종풍宗風인 ‘작상시의作相示意’의 연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혜충국사가 육대 조사로부터 97개의 ‘원상’을 전해 받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혜충 이전의 중국선 계통에서 ‘원상’과 관련된 기록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혜충이나 마조馬祖 등이 학인을 제접提接할 때 ‘원상’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보인다. 또한 『인천안목人天眼目』 권4에서는 혜적의 ‘원상’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데, 예컨대 “O상相은 돈오頓悟이다. 후대에 말하기를, ‘제불의 밀인密印을 어찌 말에 담겠는가!’라고 하였다. …… 혹은 이 O 가운데 ‘우牛’ 자를 써넣은 상相은 바로 종의縱意이고, 혹은 O 가운데 ‘불佛’ 자를 써넣은 상은 탈의奪意이며, 혹은 O 가운데 ‘인人’ 자를 써넣은 상은 바로 긍의肯意이다.”(주4)라고 해석하는 바와 같다.
위산에서 언하에 돈오
탐원의 문하에서 몇 년을 보낸 후에 혜적은 대위산으로 가서 영우靈祐 문하에 들어갔다. 혜적은 영우에게 “어떤 것이 진불眞佛이 머무는 곳입니까?”라고 물었는데, 영우는 “생각하면서도 생각이 없는 묘妙로써 신령한 불꽃[靈焰]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하되,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품[性]과 모습[相]이 항상 머무르고 일[事]과 이치[理]가 둘이 아니라서 참 부처가 여여如如하리라.”라고 교계敎誡하자 그로부터 돈오頓悟하였다고 한다.(주5) 여기에 언급되는 ‘신령한 불꽃’은 영우가 백장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은 ‘조그마한 불씨’와 관련된 것이고, ‘사리불이事理不二’, ‘진불여여眞佛如如’는 바로 위앙종의 종풍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은 이후, 영우를 시봉하며 15년을 위산에 머물렀으며, 그 후 대중들과 함께 왕망산王莽山에 주석하였다. 건부乾符 6년(879)에 원주袁州 앙산仰山(현 江西省 宜春市)에 머물자 학인들이 모여들어 ‘앙산혜적仰山慧寂’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후에 홍주洪州관음원觀音院에 머물며 학인들을 제접하였고, 다시 동평東平으로 옮겼다. 혜적이 입적하기 전에 남긴 게송은 다음과 같다.
“나이는 가득 찬 칠십칠로, 늙어지니 오늘이네. 성품에 맡겨 절로 오르내리니, 두 손으로 굽은 무릎을 부여잡네.[年滿七十七, 老去是今日. 任性自浮沈, 兩手攀屈膝.]”(주6)
“나이는 가득 찬 칠십칠로, 무상無常이 오늘에 있네. 일륜日輪이 정오正午에 이르니, 두 손으로 굽은 무릎을 부여잡네.[年滿七十七, 無常在今日. 日輪正當午, 兩手攀屈膝.]”(주7)
앞의 게송은 『경덕전등록』에 실린 것이고, 뒤의 게송은 『앙산어록仰山語錄』과 『오등회원』에 실린 것으로 약간 차이가 있다. 그러나 게송에서 몇 글자의 출입은 사상적 뉘앙스를 완전히 바꿀 수 있어 모두 실었다. 이러한 게송을 남기고 소주韶州 동평산에서 두 손으로 무릎을 껴안고 입적하였다. 다음해에 제자들은 영골靈骨을 앙산으로 모셨으며, 후에 시호를 ‘지통선사智通禪師’, 탑호를 ‘묘광지탑妙光之塔’이라고 하였다. 혜적의 입적 시기는 유일하게 『불조통기』 권42에서 “대순大順 2년(891)”(주8)이라고 밝히고 있다.
동문사제에서 법제자가 된 향엄지한
위산영우의 또 다른 제자인 향엄지한香嚴智閑(?~?)도 위앙종을 논함에 있어서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지한의 전기는 『경덕전등록』 권11과 『송고승전』 권13, 『오등회원』 권9 등에 실려 있지만, 그의 구체적인 출생과 입적 시기에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오등회원』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청주淸州 출신이고, 세속을 싫어하고 책을 가까이하였으며, 제방諸方을 지켜보며 도道를 흠모하였다고 한다.
지한은 먼저 백장百丈을 참알하여 총명함을 인정받았지만, 깨달음은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백장이 입적한 이후에 위산영우에게 참알하였다.(주9) 따라서 영우와는 동문 사형제이지만, 법으로는 제자라 하겠다. 그러나 영우의 문하에 와서도 한동안 깨닫지 못하여 영우로부터 호되게 꾸중을 듣고, 그동안 모았던 기연어구機緣語句들을 점검하였지만, “그림의 떡으로는 굶주림을 채울 수 없다.”라고 탄식하고 모두 불살라 버리면서 “이생에 불법을 배우지 못할 바에야 죽이나 밥을 먹어치우는 중이 되어 오랫동안 심신心神의 괴로움이나 면하리라.”라고 한탄하면서 위산을 떠나버렸다.(주10)
향엄격죽香嚴擊竹, 조사선과 여래선
그 이후 지한은 남양南陽에 이르러서 혜충국사의 고찰을 참배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그 당시에 깨달음의 기연이 발생하는데 『경덕전등록』의 전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산에서 잡초를 베다가 기와를 던진 것이 대나무에 부딪쳐 소리가 나는 찰나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확연히 깨달았다. 급히 돌아와서 목욕하고 향을 피우면서 멀리 위산을 향해 절을 하며 찬탄했다. “화상의 대비하신 은혜는 부모의 은혜보다 높습니다. 그 당시에 만일 저에게 설명하셨다면, 어찌 오늘의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게송 하나를 지었다.
“한 번 부딪침에 알음알이를 잊어버리고, 다시 수지修持함을 빌리지 않네. 움직임에 옛사람의 길을 내세우며, 근심스러운 근기根機에 떨어지지 않도다. 곳곳에 종적은 없으나, 성색聲色은 밖으로 위의威儀를 갖추고 있네. 제방의 도道에 통달한 사람들은 모두 상상기上上機를 말하는구나.”(주11)
『경덕전등록』의 전기에서는 이를 지한의 깨달음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영우의 전기와 혹은 『오등회원』, 『영우선사어록』 등에서는 이러한 지한의 깨달음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앙산이 찾아가 그를 점검하는 대목이 보인다. 앙산이 지한에게 찾아가 깨달음을 말하라고 하자 위의 게송을 다시 말하였더니, 앙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앙산은 “이는 예로부터 훈습薰習 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만약 바른 깨달음이 있다면, 바로 다르게 말해 보라.”라고 하였다. 향엄은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다. 작년 가난은 송곳 세울 땅이 없었으나, 금년 가난은 송곳조차 없구나.”라고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앙산은 “사제가 여래선如來禪은 알았으나 조사선祖師禪은 꿈에서도 보지 못했구나.”라고 말하였다. 향엄은 다시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어 눈을 깜빡여 그대를 보네. 만약 이 뜻을 모른다면 사미沙彌를 부르지 말라.”라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앙산은 바로 위산에게 “지한 사제가 조사선을 깨달아서 또한 기쁩니다.”라고 보고하여 말하였다.(주12)
이 구절로부터 ‘조사선’과 ‘여래선’의 구별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이는 중국선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 이후 보다 상세히 분별하기로 하겠지만, 이로부터 위앙종에서 조사선의 개념이 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지한의 깨달음을 인가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전기에서 지한의 입적과 관련된 기사는 보이지 않고 다만 게송이 2백여 편이 있는데, 인연을 따르고 근기에 대응하며 성율聲律에 구애받지 않아 제방에 널리 성행했음과 ‘습등대사襲燈大師’의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만이 보인다.(주13)
위앙종은 바로 위산영우와 앙산혜적, 그리고 향엄지한 등 세 선사의 활동으로 널리 성행했다. 따라서 이를 이어서 미처 분별하지 못한 조사선과 여래선의 구별, 그리고 위앙종의 종풍 등의 선사상을 보다 명확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각주>
(주1) [宋]普濟集, 『五燈會元』 卷9(卍續藏80, 187b), “於廣州和安寺投通禪師出家. 十四歲, 父母取歸, 欲與婚媾, 師不從.”
(주2)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9(大正藏51, 282b), “年十五欲出家父母不許. 後二載師斷手二指跪致父母前, 誓求正法以答劬勞, 遂依南華寺通禪師落髮.”
(주3) [宋]普濟集, 『五燈會元』 卷9(卍續藏80, 187c), “耽源謂師曰: 國師當時傳得六代祖師圓相, 共九十七箇, 授與老僧. 乃曰: 吾滅後三十年, 南方有一沙彌到來, 大興此敎, 次第傳受, 無令斷絶. 我今付汝, 汝當奉持. 遂將其本過與師. 師接得一覽, 便將火燒却. 耽源一日問: 前來諸相, 甚宜秘惜? 師曰: 當時看了便燒却也. 源曰: 吾此法門無人能會, 唯先師及諸祖師, 諸大聖人方可委悉. 子何得焚之? 師曰: 慧寂一覽, 已知其意. 但用得不可執本也. 源曰: 然雖如此, 於子卽得, 後人信之不及. 師曰: 和尙若要, 重錄不難. 卽重集一本呈上, 更無遺失. 源曰: 然.”
(주4) [宋]智昭集, 『人天眼目』 卷4(大正藏48, 322a), “O相頓悟. 後有語云: 諸佛密印豈容言乎! …… 或畫此[牛]相乃縱意, 或畫[佛]相乃奪意, 或畫[人]相乃肯意.”
(주5)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9(大正藏51, 282b), “師問: 如何是眞佛住處? 祐曰: 以思無思之妙, 返思靈焰之無窮, 思盡還源性. 相常住, 事理不二, 眞佛如如. 師於言下頓悟.”
(주6) 앞의 책(大正藏51, 283c).
(주7) [明]語風圓信, 郭凝之編, 『袁州仰山慧寂禪師語錄』(大正藏47, 588a); [宋]普濟集, 『五燈會元』 卷9(卍續藏80, 190c).
(주8) [宋]志磐撰, 『佛祖統紀』 卷42(大正藏49, 389c), “大順二年, 袁州仰山慧寂禪師入寂.”
(주9) [宋]普濟集, 『五燈會元』 卷9(卍續藏80, 191a), “靑州人也. 厭俗辭親, 觀方慕道. 在百丈時性識聰敏, 參禪不得. 洎丈遷化, 遂參潙山.”
(주10)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9(大正藏51, 284a), “遍檢所集諸方語句無一言可將酬對. 乃自歎曰: 畫餅不可充飢. 於是盡焚之曰: 此生不學佛法也, 且作箇長行粥飯僧免役心神. 遂泣辭潙山而去.”
(주11) 앞의 책, “一日因山中芟除草木, 以瓦礫擊竹作聲. 俄失笑間廓然惺悟. 遽歸沐浴焚香遙禮潙山. 贊云: 和尙大悲恩逾父母, 當時若爲我說却, 何有今日事也. 仍述一偈云: 一擊忘所知, 更不假修治, 動容揚古路, 不墮悄然機. 處處無踪迹, 聲色外威, 儀諸方達道者, 咸言上上機.”
(주12) [明]語風圓信, 郭凝之編, 『袁州仰山慧寂禪師語錄』(大正藏47, 580b-c), “仰曰: 此是夙習記特而成, 若有正悟, 則更說看. 香嚴又成頌曰: 去年貧末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貧, 猶有卓錐之地; 今年貧, 誰也無. 仰山云: 如來禪許師弟會, 祖師禪未夢見在. 香嚴復有頌曰: 我有一機, 瞬目視伊. 若人不會, 別喚沙彌. 仰山乃報師云: 且喜閑師弟會祖師禪也.”
(주13) [宋]道原纂, 『景德傳燈錄』卷9(大正藏51, 284c), “有偈頌二百餘篇, 隨緣對機不拘聲律, 諸方盛行. 後諡襲燈大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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