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불교윤리 ]
인공지능(AI)과 자비윤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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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 2024 년 9 월 [통권 제137호] / / 작성일24-09-05 10:53 / 조회967회 / 댓글0건본문
소랏 헝라다롬은 우선 인공지능(AI)의 기능이 인간의 자율성이나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까지는 서구의 공존주의자들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적 AI는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평등한 자비 사상에서 출발할 때”(주1) 비로소 불교 고유의 종교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자비’는 다름 아닌 ‘지혜’의 산물이다.
불교의 지혜와 자비의 윤리: 기술적 탁월성과 윤리적 탁월성
그의 설명에 따르면(주2) 불교는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윤리적 모델을 제공할 뿐 아니라 ‘기술적 탁월성(technological excellence)’과 ‘윤리적 탁월성(ethical excellence)’을 하나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바람직한 방향성을 제안”(주3)할 수 있다. ‘좋은’ 자동차는 빠르고 안락하며 연비가 뛰어난 ‘기술적 탁월성’ 못지않게 탑승자의 안전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에어백을 장착하려는 ‘윤리적 탁월성’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인식의 공유와 논리의 적용은 인공지능 로봇의 설계와 개발에도 그대로 반영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고통이 없는 지속적인 행복의 상태는 한 인간존재의 윤리적 목표임과 동시에 인공일반지능과 같은 미래사회의 어떤 기술이 지향해야 할 도덕적 이상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세상의 주인은 인간의 산물인 기계가 아니라 바로 인간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공일반지능’은 특정한 분야의 과업에만 특화된 ‘인공특수지능’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는다. 소랏 헝라다롬은 어떤 대상이든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 즉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조건을 충족한다면, 도덕적 판단능력을 갖춘 인격체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본다.
이는 오온설五蘊說의 확장을 통해 인공지능이나 초지능 로봇도 인간과 다름없는 인격체가 될 수 있다는 불교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인공지능이 동시에 갖추어야 할 ‘기술적 탁월성’과 ‘윤리적 탁월성’의 개념은 붓다의 가르침인 지혜와 자비의 윤리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불교적 인공지능의 적용 분야: 자율주행차, 돌봄 로봇
흔히 말하는 특이점을 통과한 인공일반지능 또는 초지능 인공지능은 아직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문제 삼아야 할 인공지능은 자율주행차나 AI 기술에 기반을 둔 무기 시스템, 고령자 돌봄 로봇 등에 적용되는 인공특수지능들이다. 자율주행차의 경우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도록 설계할 것인가, 라는 ‘트롤리의 딜레마’ 문제가 발생한다. 운행 중인 자율주행차가 충돌사고를 피할 수 없다면 다섯 사람보다는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희생자의 숫자와 관계없이 다른 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하려는 의도적인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옳을지’를 선택하도록 코딩해야 한다는 말이다.
윤리학적으로 보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지향하는 공리주의와 어떤 경우에도 이성의 소유자인 인격체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의무론의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랏 헝라다롬은 ‘의도(cetanā)’를 가지고 한 행위는 그렇지 않은 행위보다 더 심각한 ‘업業’의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는 전통적인 업보 사상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주4) 이런 입장은 서양윤리학에서 말하는 덕론(virtue theory)적 사고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한편, 과학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평균수명이 획기적으로 높아진 만큼 고령자들을 위한 맞춤형 돌봄이 시급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발맞춰 간호사나 건강관리 도우미들을 보조하거나 혼자서 스스로 고령자들을 돌보는 인공지능 기반 로봇의 적극적인 개발이 요청된다. 크게 두 종류의 고령자 돌봄 로봇, 즉 기능적 로봇과 감정적 로봇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전자는 고령자를 다른 가족들과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드는 디지털 인터페이스 역할을 수행하면서 때로는 고령자를 침대에 들어 올리거나 내리는 일을 물리적으로 돕게 된다. 후자는 사회적 인간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역할이 주된 임무이다.
일본의 소프트뱅크사가 개발한 귀여운 바다표범 모양의 파로(Paro) 로봇은 외로움에 지친 고령자들에게 자식이나 손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파로는 돌봄의 대상인 고령자들에게 매일 약 먹을 시간을 알려주는가 하면, 환자의 각종 생명 징후를 가족이나 의료진에게 수시로 보고하는 건강관리 조력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냈다. 자식이나 손주들이 현실적으로 부모나 조부모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 노년층을 혼자 남겨두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기능과 감정을 겸비한 인공지능 로봇을 곁에 두는 일 외에 사실상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철학자인 소랏 헝라다롬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공지능의 성격을 ‘자비로운 알고리즘(merciful algorithm)’으로 성격 규정한다. 이는 곧 앞에서 말한 기술적 탁월성과 윤리적 탁월성을 두루 갖춘 기계의 깨달음에 도달한 인공지능이기도 하다. 이는 윤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불교적 인공지능은 다른 유정물들의 권리와 복지를 무엇보다도 먼저 배려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함을 뜻한다. 자비로운 인공지능은 그것을 둘러싼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인 ‘테크노쇼비니즘(technochauvinism)’과 ‘테크노포비즘(technophobism)’ 사이의 중도를 모색하는 길이기도 하다.(주5)
불교적 인공지능의 개발: 자비로운 알고리즘의 출현 가능성
알다시피 2022년 연말부터 챗 GPT 시리즈가 단연 세상의 화제다. 챗 GPT의 놀라운 답변은 인공지능이 드디어 인간의 뇌를 초월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다가는 인간과 기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도 광범위하게 퍼졌다. 어느 날 인공지능 기계가 인간존재를 느려터지고 질척거리기나 하는 성가신 동물로 여긴다면, 그리고 마침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가 인공지능에 복종하거나 거꾸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일만 남았다면, 그것은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편적인 윤리의식을 갖춘 인공지능의 개발은 과학과 영성 사이를 지혜롭게 연결하는 인문학적 사유능력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불교가 그 매개체이자 방편의 역할을 능숙하게 잘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처음부터 붓다의 가르침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에 이어 인간세계를 서로 융·복합할 수 있는 우주론적 이론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를 가능하게 만든 원리가 바로 붓다의 연기설이다. 연기의 가르침은 한편으로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원인과 결과의 패러다임에 바탕을 두고 세상의 실재를 설명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실상을 ‘자비로운 휴머니즘(compassionate humanism)’의 적용대상으로 해석해 왔다. 인공지능기술이 아무리 갑작스러운 현상으로 보여도 그 이면에는 지금까지 쌓인 무수한 인연의 실타래가 상하좌우와 종횡무진으로 촘촘하게 얽혀져 있다.
이러한 관념을 실제로 구현한 불교적 AI를 개발한다면 그것은 과학과 영성을 결합한 고통치유형 인공지능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지혜를 갖춘 자비로운 인공지능이라는 뜻이다. 합리적인 사고와 자비로운 행동은 불교적 인공지능의 가장 큰 특징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과학’과 ‘영성’은 ‘지혜’와 ‘자비’의 서구적 버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연기설을 전제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 환영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지혜와 자비의 불교윤리는 시공간을 넘어 언제 어디서나 동시대의 보편윤리로 거듭날 수 있는 종교적 유연성과 포괄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시대적 과제: 인공지능의 미래와 인간존재의 미래
위에서 우리는 불교의 지혜와 자비의 윤리가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적 고통을 치유할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소랏 헝라다롬의 관점을 살펴봤다. 그런데 이런 불교적 공존의 지혜는 2019년 출범한 ‘스탠포드 인간중심 인공지능 연구소(the Stanford Institute for Human-Centered Artificial Intelligence, HAI)’나 하버드 대학의 ‘임베디드 에틱스 프로그램(Imbeded Ethics Program)’의 설립 취지와 연구 철학과도 일맥상통하고 있어 불자들인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주6)
과학기술의 집합체인 인공지능이 자연진화의 결정체인 인간존재와 아름다운 공존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들은 인공지능의 기술개발 초기 단계부터 종교와 법학, 윤리학자들을 공학자와 엔지니어들의 작업에 동참시켜 왔다. 컴퓨터 공학자와 엔지니어들이 종교와 윤리적 시각을 접목한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한다는 발상 자체가 인간과 기계의 공존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지구상 뭇 생명의 공동·번성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주7)
여기서 불교적 지혜와 자비의 관념이 인공지능 관련 연구자들에게 실제로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근본적인 취지에서 볼 때 지혜와 자비의 윤리는 과학과 도덕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매우 유용한 가르침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불교는 인간과 기계 및 그 외 다른 모든 존재와의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보편 종교윤리 이념으로 계속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를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이론적 배경이 곧 연기와 공, 무상과 무아 등의 독창적인 교학 체계들이다. 이처럼 붓다의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은 어제의 화려한 법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바로 이곳의 서사이자 다가올 내일에도 쉬지 않고 들려져야 할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시대적 과제는 인간의 미래와 기술의 미래를 동시에 품고 아우르는 지혜와 자비의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각주>
(주1) 소랏 헝라다롬, 허남결 외 옮김(2022), 『불교의 시각에서 본 AI와 로봇 윤리-불교, 인공지능과 로봇을 말하다』, 서울: 씨아이알.(2022), 23, 71, 131, 140, 144, 146, 150〜151, 186〜187, 341〜343, 346, 355〜367, 392〜395 등에 같은 취지의 언급이 반복되고 있다.
(주2) 이하의 내용은 소랏 헝라다롬, 허남결 외 옮김(2022)을 전체적으로 요약, 정리하고 논자의 관점을 보태서 나름대로 각색, 윤문한 것임을 밝혀둔다.
(주3) 같은 책, 125〜199 참조. 저자의 ‘기술적 탁월성’과 ‘윤리적 탁월성’이라는 개념은 인공지능의 인간중심 또는 인간친화적 접근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주4) 인공지능이 갖춰야 할 윤리적 관점에 대해서는 Peter D. Hershock(2021), Buddhism and Intelligent Technology: Toward a More human Future(London: Bloomsbury Academic.,), 127〜144; 유발 하라리, 전병근 옮김(2018),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파주: 김영사), 44〜58; 스튜어트 러셀, 이한음 옮김(2022), 『어떻게 인간과 공존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것인가-AI와 통제 문제』(파주: 김영사), 310〜357 등을 참조할 것.
(주5) 소랏 헝라다롬, 허남결 외 옮김(2022), 같은 책, 356〜395 참조.
(주6) 윤송이 외(2022), 131〜133 참조.
(주7) 유발 하라리, 전병근 옮김(2018)에도 인공지능의 등장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들이 소개되고 있다. 책의 끝부분에서 하라리가 불교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도 눈길을 끈다. 내 마음을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따가운 비판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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