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아름다운 불교의례 ]
일곱 개의 밥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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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래 / 2024 년 9 월 [통권 제137호] / / 작성일24-09-05 10:58 / 조회1,526회 / 댓글0건본문
스님들의 발우 보자기 속에는 자그마한 나무 숟가락이 들어 있다. 발우공양을 할 때 굶주린 뭇 중생을 위해 밥알을 덜어놓기 위한 용도이다. ‘나는 이 밥을 먹는데 배고픈 생명은 어찌할까’라는 마음으로, 먹고 남은 것이 아니라 밥을 먹기 전에 미리 밥알을 떠서 덜어놓는 것이다. 이처럼 공양 의식에서 각자의 밥알을 몇 개씩 거두는 것을 ‘중생의 생명을 위한 밥’이라는 뜻으로 생반生飯이라 부른다.
굶주린 생명을 위하여
이때의 밥알은 ‘칠립七粒’이라 하여 각자 일곱 알을 덜게 된다. 아주 적은 양이지만 한 알 한 알 세기가 쉽지 않아, 숫자를 맞추기보다 그 정도가 적당하다는 뜻이다. 국수 공양을 할 때는 손가락 한 마디에 해당하는 국수 가락을 떼어놓는다. 생반 절차에서 외우는 생반게生飯偈의 내용을 살펴보자.
차식변시방此食遍十方 일체귀신공一切鬼神供
여등귀신중汝等鬼神衆 아금시여공我今施汝供
귀신의 무리여, 내 이제 그대들에게 공양을 베푸나니
이 음식이 시방에 두루 미쳐 모든 귀신이 공양받을지어다.
수십 명이 발우공양을 한다 해도 일곱 알씩 모은 밥이 몇 숟가락에 불과한데, 어떻게 시방의 일체 귀신들에게 먹일 수 있을까. 게송을 염송할 때 스님들은 두 손으로 감로인甘露印을 취하고, 이어 ‘옴 시리시리 사바하’라는 진언을 세 차례 외운다. 눈에 보이는 음식은 비록 적어도, 수행자의 원력과 변공變供 다라니로써 초월적 세계에 적합한 양과 질로 바꾸면 한량없는 중생이 다 먹을 수 있는 가피가 일어나는 것이다.
노스님들은 직접 대나무를 깎아서 생반 더는 숟가락을 만들어 ‘여등대·생반대’라 불렀다. 지금은 생반대生飯臺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지만, 예전엔 여등대가 더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여등대汝等臺란 생반게의 첫머리에 나오는 ‘여등’에서 따온 말로, ‘너희들·그대들’이라는 뜻을 지녔다. 생반의 대상인 굶주린 생명을 위한 용기라는 뜻이니, 새로운 용어가 생성되는 방식도 의미도 모두 적절하다.
이렇게 각자 덜어놓은 밥알을 모아서 담는 용기를 ‘헌식기’라 하고, 이를 부어 놓는 평평한 돌을 ‘헌식대’라 부른다. 사찰에서 재齋를 치르고 나면 단에 오른 음식을 조금씩 떼어 헌식獻食을 하는데, 생반과 헌식은 음식의 출처가 다를 뿐 의미는 같다. 따라서 재가 든 날에는 발우공양 때 생반을 하지 않는다.
신촌 봉원사의 구해스님은, 은사 송암스님이 물려준 여등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나무 자루에 깡통을 달아 만든 것으로, 벽에 걸어두었다가 발우공양 때 밥알을 거두었다고 하여 헌식기를 여등대라 부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여등’이 ‘여동’으로 변하여 헌식기·헌식대를 여동통·여동대라 부르고 ‘여동밥 떠 놓는다’고 표현하여, 언어 변화의 다채로운 양상이 드러난다.
송나라의 『선원청규禪苑淸規』에는 숟가락 모양이 아니라, 납작하고 작은 나무판 끝에 천을 붙여 만든 발쇄鉢刷에다 밥알을 놓도록 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지금도 스님들이 공양할 때 발쇄를 연상케 하는 작은 막대를 생반용으로 쓰기도 한다.
부처님과 제자들의 가피
지금은 발우공양을 하는 사찰이 급속히 줄어든 데다, 발우공양을 하더라도 늘 생반이 따르는 건 아니다. 발우공양에는 크게 ‘묵언의 공양’과 ‘게송을 외우며 행하는 공양’이 있는데, 후자를 특히 법공양法供養이라 하여 구분하고 있다. 법공양의 특징은 주요 절차마다 게송을 외우는 것을 포함해, 점심인 오시에 행하고, 의식절차에 생반이 따르며, 장삼과 가사를 갖추어 입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생반이 법공양의 중요한 특징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점심을 법공양이라 하여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승가의 본사本師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공양’이라는 의미로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후불식을 한 부처님의 공양시간에 맞추어 사시巳時(9∼11시)에 마지를 올린 다음, 이어 오시午時(11∼13시)에 제자들이 공양하는 뜻을 지닌다. 여법하게 가사를 갖추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오시에 공양하니 불교에서는 점심을 오공午供이라 하지만, 부처님께 마지 올리는 사시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겨 스님들은 ‘사시공양’이라고도 부른다.
이로써 생반 의식이 법공양과 짝을 이루는 이유도 가늠이 된다.
매일 사시기도 하고 나서, 부처님 마지를 조금 떼서 헌식대에 놔요. 대웅전 같은 경우는 영단에 제사가 없으니까, 기도 끝나면 대웅전 스님이 바로 헌식을 하시죠. 명부전에 제사가 있으면, 지장보살께 상단 불공을 드리고 나서 영단에 제사를 올리거든요. 그때 상단에 올린 마지를 영단에 퇴공해서 제사 지내고, 헌식할 때 마지도 같이 떼어서 담아요. … 그리고 사찰마다 마지 밥은 내려서 스님들이 드셔요.
북한산 진관사 원주스님의 말이다. 사찰에서는 일상적으로 헌식을 하고, 헌식은 사시마지 후에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가장 어른인 부처님이 공양한 뒤에 헌식을 하는 것이 도리이자, 부처님께 올린 마지의 가피가 그들에게 미치도록 하기 위함이다. 명부전에서 제사가 있을 때면 영단에도 밥이 오르지만, 상단의 마지를 영단으로 퇴공退供하여 영가에 가피를 내린다. 또 제사를 마치면 조금씩 떼어낸 영단 음식과 함께 마지 밥도 떼어 헌식기에 담아, 가능하면 불보살의 위신력이 모든 존재에게 널리 미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공양이 있을 때는 헌식을 마지 밥으로 하지 않고 스님들의 생반으로 하게 된다. 이는 자신에게 분배된 음식을 나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뭇 중생과 함께하는 밥으로 보는 공양 정신을 일깨우기 위함일 것이다. 발우공양의 절차마다 외는 게송에는 이러한 의미가 깊이 담겨 있다. 성현에서 미물까지 함께 공양을 나누고,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또 다른 생명을 먹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기적 삶을 새기며, 모든 중생이 공덕 받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시에 행하는 법공양의 생반은 부처님으로부터 차례로 내려오는 공양의 가피 구도를 잘 보여준다. 부처님의 사시마지가 제자의 오시공양으로 이어지고, 제자의 공양이 다시 뭇 중생을 향한 자비의 헌식으로 확산하는 의미를 새겨볼 수 있다.
공생의 밥
3년 전, 서대문 백련사 스님들의 발우공양에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두 분의 노스님이 오합 발우로 공양했는데, 찬 발우보다 작은 발우를 하나씩 더 지닌 채 양념을 덜어 먹는 용도로 썼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예로부터 크기가 다른 4개를 포개어 한 벌로 삼는 사합四合 발우를 쓰고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오합五合을 쓴 기록이 더러 있고, 근래까지도 이러한 사례들이 많았다. 청수발우보다 더 큰 발우가 추가된 오합의 경우, 대개 대중공양으로 떡이나 과일 등이 들어오면 그곳에 받아두었다가 차담용으로 썼다. 발우공양 의식과 무관하게 별도로 둔 발우이지만 오합의 전승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에 비해 시식발우施食鉢盂를 추가하는 오합 구성도 있었다. 차담용이 오합 가운데 가장 큰 크기라면, 고혼을 위해 밥을 더는 시식용은 가장 작은 크기이다. 백련사 스님들이 오합으로 지녔던 작은 발우가 이러한 흔적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 있어 흥미롭다. 옛 스님들은 대중 수가 적어서 상공양을 할 때도 발우를 폈다고 한다. 따라서 발우공양이 아닌 일상에서도 공양 나눔이 생활화되어, 밥과 반찬을 작은 발우에 조금씩 덜어두었다가 헌식대에 놓았을 법하다.
재가자들이 수행공동체를 이루어 정진하는 정토회淨土會에서도 매일 발우공양을 하면서 생반을 소중한 의식으로 이어가고 있다. 건물이 도심에 자리하여 사찰처럼 헌식대를 둘 수 없기에, 덜어둔 밥알은 밥통에 다시 부어서 다음 끼니에 보탠다. 관상觀想과 진언으로 굶주린 생명에게 음식을 나누는 뜻을 실천하고 그 밥알은 다시 섭취함으로써, 상황에 맞는 바람직한 순환으로 자비 정신을 이어가는 사례이다.
그런가 하면 사찰에서는 ‘쌀 한 톨에 백일기도 무산’이라는 말이 전한다. 한 톨의 쌀이라도 소홀히 다룬다면, 열심히 기도하고 수행한 공덕이 모두 허사가 된다는 뜻이다. 옛 스님들은 바늘을 가지고 다니며, 공양간 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찍어서 씻어 먹음으로써 몸소 수행자의 자세를 가르쳤다. 시주에 의지하는 출가자로서 쌀 한 톨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스님들의 철두철미함이다.
수덕사 견성암에 만공스님이 ‘칠근루七斤樓’라 쓴 현판을 걸어둔 것도 같은 뜻이다. 쌀 한 톨에 농부의 피땀 일곱 근이 담겨 있다는 ‘일미칠근一米七斤’에서 따온 말로, 한 톨의 쌀이 상징하는 시주의 무거움을 시시때때로 새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쌀 한 톨이 지닌 상징성이 이처럼 크니, ‘아주 조금만 떠서 담으라’ 하지 않고 ‘일곱 알’이라 한 생반의 의미가 한 알 한 알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예전에는 헌식 공덕을 더없이 큰 것이라 여겨, 법랍 있는 스님이라야 헌식 소임을 맡을 수 있었다. 헌식대에는 부처님의 마지 밥에서, 어느 영가의 극락왕생을 빈 잿밥에서, 그리고 수행자들의 발우공양 생반에서 나온 밥이 오른다. 그 밥은 관념적으로는 일체 귀신이, 실제는 산과 들에 사는 동물들이 먹는다. 부처님과 제자들, 영가와 일체 귀신, 땅과 허공에 사는 동물이 연결된 그야말로 공생共生의 밥이다. 일곱 개의 밥알은 지극히 적지만, 그 뒤에는 거대한 세계가 펼쳐져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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