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경계를 넘나든 불교계의 올라운드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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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2 년 11 월 [통권 제115호] / / 작성일22-11-07 09:39 / 조회3,079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23 | 최범술(1904~1979)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1904~1979)은 승려 지식인으로서 활발한 사회 참여와 정치적 활동을 벌였고, 중·고교와 대학을 세우는 등 교육자로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이뿐 아니라 원효의 주석서를 복원하고자 하는 등 한국 불교학의 토대 정립에 필요한 기초 작업을 한 학자였다.
또 한국의 다도를 선양하여 그 가치에 주목하고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다.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제헌의원까지 지낸 그의 인생 편력과 위상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근·현대 역사의 부침 속에서 경계를 넘나든 불교계의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최범술의 유년시절과 독립투쟁
최범술은 1904년 5월 26일 경상남도 곤양군(현재 사천시) 양포면 금진동 율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영환英煥이며 1910년 양포 개진학교에 입학했는데 그해 8월 19일 일본의 불법적인 한국 강제병합이 이루어졌다. 당시 이 학교의 일본인 교사가 일장기를 달고 메이지 천황의 사진에 경례를 시키면서 교육칙어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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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사는 학생들에게 욕을 하고 뺨을 때리는 등 폭력적 언행을 일삼았는데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결정했다. 이 사태는 공권력의 개입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어린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남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그는 곤양 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15년에 졸업했고, 다음해에는 사천 다솔사多率寺로 출가했다. 1917년에는 해인사 지방학림에 입학하여 사교과와 대교과의 이력과정을 수료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사천과 하동 등지에서 나눠주었다고 한다. 192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다음해 도쿄 릿쇼立正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고 박열 등과 잡지 ≪불령선인지≫를 펴냈다. 이 무렵 박열의 천황 암살 시도를 돕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서 폭탄을 가져왔다고 하며 이 일로 8개월간 투옥되었다.
1932년 김법린이 이끌던 만당卍黨 도쿄 지부에 가입했는데, 만당은 1930년에 일제 사찰령 체제의 타파, 정치와 종교의 분립과 자율적 교정을 추구하며 만들어진 불교계 비밀결사로서 만해 한용운이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최범술은 이후 자신이 주지로 있을 때 다솔사가 만당의 근거지가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는 1933년 3월 도쿄의 다이쇼大正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명성여자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또 조선불교 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일본에서 인도 승려로부터 전해 받은 부다가야 대탑의 진신사리 3과를 범어사에 기증해 탑을 건립하고 봉안했다.
1934년에는 사천에 광명학원을 세우고 1936년에는 다솔사 불교 전수강원을 설립했는데, 이 무렵 일본에서 같이 활동하던 김법린이 다솔사에 머물며 가르치기도 했다. 1945년 5월에는 한용운의 1주기를 맞이해 김법린, 허영호 등 만당의 옛 동지들이 모여 한용운 전집을 간행하는 데 뜻을 모았다고 한다.
부산대 설립 기금 희사와 해동중학교, 국민대학 설립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감격을 맞이한 후 그는 조선불교 중앙 교무원의 총무부장으로 일하면서 1946년 경상남도 불교 교무원을 통해 고성 옥천사 전답 13만 5천 평을 부산대학 설립기금으로 희사하게 했다. 대신 경상남도로부터 일제 강점기 입정상업학교의 적산 부지와 건물을 불하받아 불교계 학교인 해동중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1947년에는 해인사 주지가 되었고, 또 국민대학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했지만 뒤에 학내 문제로 물러나야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을 위한 5·10선거 때 경상남도 사천·삼천포의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전쟁 중인 1951년에는 해인중학교와 해인고등학교를 세웠고 1952년에는 해인사 해인대학의 이사장 겸 학장이 되었다.
1960년 이후에는 사천 다솔사의 조실로 있으면서 원효의 저작 및 사상, 초의선사를 필두로 한 한국의 다도 연구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차밭을 일구어 ‘반야로’라는 차를 만들었고 다도의 입문서를 집필해 펴냈다. 그는 초의의 『동다송東茶頌』을 번역해 대중에게 알렸고, 그를 한국 다도의 중흥조로 자리매김했다. 1973년에는 전해 받은 한용운의 유고를 모아 『한용운 전집』을 신구문화사에서 출간했다.
최범술은 1979년 7월 10일에 입적했고 출가 사찰이자 주요 근거지였던 다솔사에 탑이 건립되었다. 1969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고 1986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저술로는 『한국의 다도』(1973),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1974)가 있고, 「원효성사 반야심경 복원소」, 「십문화쟁론 복원을 위한 수집 자료」, 「해인사 사간장경 누판 목록」 등의 연구 결과물을 냈다.
최범술의 불교관과 원효 연구
최범술의 불교관은 20대 중반 일본 유학 시절에 불교 유학생 잡지 『금강저』에 발표한 「불타의 면영」(1928)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고행을 버리고 제행무상을 통해 깨달은 부처의 무아의 경지는 개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성을 훤히 드러낸다고 보았다. 무아를 통해 실상의 참된 면목을 보게 되므로 스스로 실재하는 개성을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그렇기에 그는 불교가 현실을 떠난 공상이 아니며 무상은 모든 현상적 존재의 절대적 법임을 강조했다.
유학 시기에 잡지에 기고한 또 다른 글에서는 불교 계율을 ‘가름의 결’로 정의했다. 승과 속의 구분은 본질이 아니며 계행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흐름이고 그 흐름은 스스로의 결에 따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결은 계정혜 삼학의 계에서 정으로, 정에서 혜로, 그리고 혜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상의 흐름을 가리킨다. 최범술에게는 이러한 흐름을 계승하여 스스로 깨달은 상징적 존재가 원효였던 셈이다. 그는 원효가 무계행無戒行으로 반야의 지혜에 거리낌이 없어서 보현행원을 펼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서도 지계持戒가 사회화되어 회향되는 경지를 말했는데, 이것이 바로 원효의 일심이며 유와 무의 극단을 버린 중도라고 설명한다.
최범술의 호인 효당의 효曉는 원효元曉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만큼 원효에 대한 그의 존경심과 추숭의 염은 남다른 것이었다. 한편 그는 원효 외에 한용운에게서도 깊은 영감을 받았다. 한용운의 ‘님’의 의미를 『대승기신론』의 대승의 뜻으로 본 것도 그만의 독특한 해석이었다. 여기서 대승은 진여로서 ‘대사회성’이며 먼 궁극의 진리가 아닌 ‘그 사람으로서의 자각’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은 사회적이기에 대승이며 사회성은 부처와 중생으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원효 교학 연구의 기초 작업으로 그는 주석서를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본격적인 첫 성과는 「원효성사 반야심경 복원소」로서 연세대 국학연구원에서 펴낸 『동방학지』 12(1971)에 실렸다. 이 시기에 최범술은 사학과를 비롯한 연세대 교수들과 교류를 이어갔는데, 한국 과학사 연구의 태두인 역사학자 홍이섭도 그중의 하나이다. 또 도서관장을 역임한 신학과 한태동과도 친분을 맺었는데, 그의 부친 한진교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최범술은 1937년 해인사에서 인출한 고려 재조대장경 1부를 1976년에 연세대에 기탁하게 되었다.
1973년에는 『건국대학교 학술지』 15에 「판비량론 복원 부분」이 실렸다. 『판비량론』은 원효의 유식학 관련 주석서로 불교 논리학의 정수가 담겨 있는데 단간으로 일부만 전하고 있다. 한편 앞서 1937년에 대장경 인출을 감독하면서 대장경 판목뿐 아니라 사간장 경판까지 포함시켰는데, 서적의 목록과 서지 사항 등을 검토하다가 의천의 『대각국사문집』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판본이 현행본과 다르다는 조사 결과를 『동방학지』 11(1970)의 「해인사 사간 누판 목록」에서 소개했다. 그는 의천이 『원종문류』의 「제화쟁론」에서 동이同異·진속眞俗·색공色空 등으로 원효의 화쟁 구조를 파악했음을 강조했다. 한편 원효의 『십문화쟁론』의 복원을 위한 연구를 수행했는데, 그 성과가 「『십문화쟁론』 복원을 위한 수집 자료」로서 『원효 연구논총-그 철학과 인간의 모든 것』(1987)에 추후 수록되었다.
최범술은 불교가 갖는 보편성과 신라의 특수성을 접목하려는 시도로써 원효 사상의 주체성에 주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그가 국학을 추구했다고도 하는데, 일본에 유학하면서 에도시대의 국학 및 국수주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한국 사상이 갖는 고유성의 원형을 원효에게서 찾고 그것을 통해 한국 불교의 사상적 특징을 체계화하려 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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