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책 이야기]
근대 불교출판 후원과 무주상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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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정 / 2022 년 10 월 [통권 제114호] / / 작성일22-10-05 13:39 / 조회3,515회 / 댓글0건본문
성철스님의 책 이야기 10 / 호은거사 김병룡
유레카! 인연은 늘 가까운 곳에서 찾아지기 마련이다. 혜월거사 유성종과 이재거사 유경종이 참여했던 책 속에서 ‘김병룡金秉龍’이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 마치 백련암 성철스님 책에 마지막 퍼즐을 맞춘 듯했다. 유성종이 스승으로 모셨던 월창月窓거사 김대현金大鉉(?~1870)이 편찬한 『선학입문禪學入門』을 1918년 신문관新文館에서 인쇄해서 배포하고자 했던 사람이 바로 김병룡 거사였다. 정호鼎鎬(석전한영石顚漢永, 1870~1948)스님과 오철호吳徹浩,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쓴 발문에 발행 배경이 자세하다.
“청신사 김병룡은 선학禪學을 매우 좋아했지만, 그 들어가는 문[입문할 책]이 없음을 심히 개탄하였다. 그러던 중 월창거사가 요점을 편찬한 『선학입문』을 얻고는 보시용으로 간행하여 세
상에 널리 유포하고자 하였다. 하루는 나에게 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기에 내 비록 글재주는
없지만 천태선학이 오늘날 되살아난 것이 너무도 기뻐 굳이 사양치 않았다.…무오년 오월 상순에 우산㝢山 사문 정호 삼가 쓰다.”(사진 1)
『선학입문』 서두에 1855년 8월에 김대현이 직접 쓴 서문도 있다. 서문에 의하면, 김대현은 여러 책에서 본 천태지의天台智顗(538~597)의 ‘지관止觀’ 관련 서적을 오랫동안 찾았으나 구하지 못하다가 1855년 여름에 ‘혜월거사慧月居士 유군劉君’이 가지고 왔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유군’은 바로 유성종을 말한다. 그의 장서목록인 『덕신당서목』에도 ‘선학입문 2권, 수隋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 설說, 제자弟子 법신法愼 기記, 해동海東 월창거사月窓居士 산정刪定’과 ‘선바라밀禪波羅蜜 십十 지자智者’가 기록되어 있다.
유성종은 중국 수나라 때 천태지의의 『석선바라밀차제법문釋禪波羅蜜次第法門』 10권의 책을 초학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스승 김대현에게 요약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로부터 몇 달 만에 『선학입문』은 제1 입식문入式門, 제2 식문息門, 제3 색문色門, 제4 방편문方便門으로 구분하여 전체 42장의 내용을 담은 상하 2권으로 편찬되었다. 이 책은 유성종 생존 당시에는 간행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60여 년이 지나 1918년에 유경종이 원고를 다시 교정하고 김병룡이 재정적인 후원을 해서 인쇄되었다.
최남선과 신문관, 근대 출판을 열다
『선학입문』은 당시 근대 민간상업 출판사의 선두였던 신문관에서 신연활자新鉛活字로 인쇄되었다. 신문관은 육당 최남선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맏형 최창선崔昌善과 함께 많은 재산을 투자하여 신식 인쇄 기계와 활자를 완비해 1908년에 설립한 인쇄소이자 출판사였다. 신문관에서는 최초의 근대 잡지인 『소년』, 『청춘』 등의 월간지와 ‘십전총서十錢叢書’(1909), ‘육전소설六錢小說’(1913~1914)과 같은 최초의 기획총서와 문고본 등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910년에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조직하여 각종 고서를 간행했다.
특히 신문관에서는 권상로權相老(1879~1965)의 『조선불교약사朝鮮佛敎略史』(1917), 이능화李能和(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1918)를 비롯하여 『선학입문』(1918),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1919), 『소요당집逍遙堂集』(1920), 『아암유집兒菴遺集』(1920), 『선가의범禪家儀範』(1922), 『금강삼매경론』(1923),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1926) 등의 불서를 근대 활자로 새롭게 발행하였다.
근대 불교출판을 후원하다
『선학입문』이 발행된 이듬해인 1919년에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선사의 『만선동귀집』도 발행되었다. 이 책에는 「묘원정수지각영명수선사유심결妙圓正修智覺永明壽禪師唯心訣」과 「만선동귀집신인서후萬善同歸集新印書後」의 발문이 함께 인쇄되어 있다. 이 발문은 이재거사 유경종이 쓴 것으로 김병룡 거사가 이 책을 읽고 환희심이 일어 인쇄하게 되었다고 발행 이유를
밝히고 있다(사진 2).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신문관에서 발행한 『만선동귀집』의 저본은 유성종이 소장했던 가흥대장경본 『만선동귀집』일 것으로 생각된다.
1920년 2월에 조직된 조선불교회에서 조선불교총서간행 사업으로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발행 당시에도 유경종이 교열에 참여했는데, 이때도 김병룡이 시주에 동참했다. 책말 조연助緣에 오문호吳文浩·김병룡·오천호吳天浩가 각각 시주한 금액을 1921년 11월에 조선불교회가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박태석朴怠錫이 언해한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를 1926년에 발행할 당시에도 이재거사 유경종이 교열하고(사진 3) 청신사 김병룡이 대시주에 참여했다(사진 4). 이후로 근대 불교출판에서 이 두 사람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1920년대 이후로 일제 간섭으로 국내에서 출판이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재거사 유경종도 일흔에 가까웠기에 이것이 두 사람이 함께 한 마지막 작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주상 보시로 한국 선불교의 정신을 잇다
성철스님에게 불서를 증여한 김병룡 거사에 대해서는 성철스님을 시봉한 원택스님의 회고록에서 먼저 만날 수 있었다. “김병룡 거사는 원래 충주에 살던 천석꾼으로 불교에 심취했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불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은 불서까지 대장경과 중국에서 발간한 선어록 등 3천여 권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불서를 소장하고 경전과 어록에까지 밝은 김병룡 거사를 그와 친척이었던 문경 대승사의 주지인 낙순스님이 청담스님에게 한번 만나보기를 청했고, 이 말을 성철스님에게 전했다. 성철스님은 김병룡 거사를 만나러 서울로 가셨고, 불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만나 법담을 나누게 되면서 김병룡 거사는 마침내 성철스님에게 불서를 기증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1948년 9월에 공식적으로 증여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성철스님이 김병룡 거사에게 증여받아 책의 목록을 먼저 정리해 둔 『수다라총목록』이라는 노트에 김병룡 거사에 대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그의 법명이 호은湖隱이며, 성철스님이 봉암사에 주석하셨던 1947년 음력 8월 이전에 1,773책을 기증했었다(사진 5). 이후 9년이 지난 1956년에 44종 136책을 추가로 스님에게 기증했다.
몇 해 전에 원택스님의 도움으로 김병룡 거사님의 아드님을 통해 김거사님의 생몰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그 아드님도 작고하셨기에 스님의 연락이 아니었으면 후대에 김병룡 거사의 생몰을 알기가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김병룡 거사는 1895년에 태어나 1956년에 작고하셨다. 작고하신 해에 본인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책까지도 스님에게 상없이 보시하고 떠나셨다. 서른 중반에 성성한 눈빛을 가진 성철스님이 한국 현대 선불교의 거봉巨峯이 되실 것을 김병룡 거사님은 알아보셨을까. 김병룡 거사님의 안목과 마지막 회향이 너무나 귀하게 느껴진다.
참고문헌
김대현 저·성재헌 옮김, 『선학입문』, 동국대학교출판부, 2013.
불교신문 기획·원택스님 엮음, 『이 길의 끝에서 자유에 이르기를』, 서울: 조계종출판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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