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벽화 이야기]
마음의 소를 찾는 심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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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 2022 년 10 월 [통권 제114호] / / 작성일22-10-05 11:10 / 조회4,195회 / 댓글0건본문
한국 사찰 벽화에 있어서 주 법당의 벽화로 가장 많이 그려지는 경우가 부처님의 일생을 시각화한 팔상성도 벽화와 선禪의 수행 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심우도尋牛圖 벽화라고 하겠다. 특히 심우도 벽화에 있어서는 긴 설명이나 어려운 논의가 아니어도 짤막한 송시頌詩나 그림을 보기만 해도 수행자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쉽게 선리禪理(선의 도리)에 익숙하게 되는 대중 교화의 수단으로 심우도 벽화의 의의는 크다 하겠다.
수행에서 소의 상징
고려 시대의 지눌智訥 스님은 스스로 목우자라 하였고, 근세의 만해 한용운 스님은 성북동에 있는 자신의 거처를 심우장尋牛莊이라고 한 것은 모두 이런 의미에서이다. 심우도는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을 소에 비유하여 일찍부터 선가禪家에서는 마음 닦는 일을 소 찾는[尋牛] 일로 불러 왔으며 이를 표현한 그림을 심우도尋牛圖라고 하였다.
심우도에서 소의 상징은 참생명, 참나, 그 자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소를 찾는다고 함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도록 신행자를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열 단계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십우도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심우도는 소 대신 말을 묘사하여 십마도十馬圖라고 하는 예도 있다 하나 우리나라에는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티베트에는 코끼리로 표현한 십상도十象圖가 전해 온다. 심우도는 중국 송대에서 그 기원을 살필 수 있는데, 보명普明과 곽암廓庵에 의한 두 가지 이본異本이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심우도가 중생 본래의 청정한 성품을 소에 비유하여 마음을 닦고 찾아가는 과정임을 서두에 언급하였다. 실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쏟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주로 관심을 가진다. 사람들이 자신을 행복하리라 생각하는 것과 실질적인 자신의 행복과는 다른 측면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잘 산다고 생각한들 또는 못 산다고 생각한들 이런 것은 별문제가 아니다. 즉 목마름에는 진짜 물이 필요한데 물에 대한 그림이나 화학방정식은 목마름을 풀어줄 수 없다. 그래서 조사 스님들은 “그대가 일단 이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소[淸淨自性]를 찾아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심우도의 그 첫 번째로 심우를 보자.
심우尋牛, 소를 찾아 나서다
심우는 발심 수행자가 소를 찾으러 가는 모습을 그렸다. 즉 수행자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원성圓成인데, 마음의 소[心牛]를 잃어버린 뒤 그것을 찾으러 나선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를 곽암 선사의 게송과 함께 일반적인 해설을 곁들여 읽어 보자.
망망발초거추심 茫茫撥草去追尋
수활산요로갱심 水闊山遙路更深
역진신피무처멱 力盡神疲無處覓
단문풍수만선음 但聞楓樹晩蟬吟
아득히 펼쳐진 숲을 헤치며 찾아 나서니
물 넓고 산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지치고 힘없어 갈 곳 찾기 어려운데
단지 들리는 건 늦가을 단풍나무 매미 소리뿐.
다시 말해서 “수풀 우거진 광활한 들판을 헤쳐나가는 것처럼, 길도 없는 산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본심本心을 찾는 건 아득하기만 하다. 엄습해 오는 절망과 초조감, 들리는 건 처량하게 우는 늦가을 해질녘의 매미 소리뿐!” 이 말은, 우리의 청정한 자성을 찾는 길은 차라리 시작조차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좌절감에 사로잡히는 순간의 심리상태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스승들은 바로 그 순간이 오히려 진정한 탐구의 시작이었음을 체험을 통한 지혜로 일러준다.
그래서 심우도에 그려지는 주인공은 동자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송광사 승보전의 심우(사진 1) 벽화는 이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선재동자[善財童子·南巡童子]와도 의미가 상통된다. 즉 본질적인 것과는 무관한 많은 알음알음으로 가득 채워진 어른의 모습이 아닌 사춘기의 소년과 같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면서 과거로부터의 구속감이나 선입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오롯하게 탐구해 나가는 데 필요한 자세와 마음가짐을 강조하기 위하여 동자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또한 동자가 쥐고 있는 고삐는 정진력을 상징하며 수풀이나 깊은 자연경관의 표현은 우리가 욕망으로 인해서 소[本性]를 잃어버린 곳임을 게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견적見跡, 소의 발자국을 보다
견적은 심우에 이어서, 수행자가 이제 소의 발자국을 발견한 것을 그리고 있다. 고운사 대웅보전의 견적(사진 2) 벽화를 보면, 우측 근경의 야트막한 언덕에 소를 찾는 동자가 왼손에 정진력을 상징하는 고삐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좌측 숲길 사이로 보이는 소의 발자국을 가리키고 있다. 그 뒤로는 수풀이 있고 계곡 뒤로 멀리 원산遠山이 펼쳐져 있다. 점차 심우心牛의 자취를 보기 시작한 것을 소의 발자국에 비유하여 표현한 견적에 대한 게송을 감상해보자.
수변임하적편다 水邊林下跡偏多
방초이피견야마 芳草離披見也麽
종시심산갱심처 縱是深山更深處
요천비공즘장타 遼天鼻孔怎藏他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러우니
방초 헤치고서 그대는 보았는가?
설사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하늘 향한 그 코를 어찌 숨기리.
이 말은 “천지가 하나의 손가락, 만물이 한마디 말이며, 보이는 것마다 소의 발자국 아닌 것이 없고, 들리는 것마다 소의 울음 아닌 것이 없으며, 소를 가린 무성한 수풀조차도 실은 소의 자취이고, 소가 아무리 심산유곡에 있다 해도 하늘까지 닿는 그 기세를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하는 뜻으로 풀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의 심우에서는 마음의 욕망을 가리켜 곧 우거진 숲이라 했다. 그런데 견적에서는 풀밭[마음의 욕망]에서도 소의 발자국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조금도 볼 수 없었던 발자국들이 어떻게 하여 보이는 것일까? 그것들은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얼굴에 붙어 있는 코와 같이 항상 내 앞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 『능가경楞伽經』 권3에는 “황금을 변화시켜 가지가지 모양의 것이 나타나지만 그것들이 황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한결같다. 일체의 성품이 변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고 비유한 구절이 좋은 참고가 되겠다. 또 화엄종의 현수법장賢首法藏 스님은 심우도 서문에서 발자국 모양은 한 가지만이 아니라 가지가지 있을 수 있으나 그 마음 즉 ‘소는 하나’라고 하였다. 풀밭에서도 소 발자국을 찾아볼 수 있다는 이 말의 의미는 사실 소는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소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소는 이미 거기에 있다. 그래서 선사들은 “찾는 자가 찾는 그것이다.”고 말했던 것이다.
견우見牛, 마침내 소를 발견하다
견적에 이어 세 번째인 견우 벽화를 역시 곽암 선사의 게송과 그에 대한 해석을 통해 살펴보자.
황앵지상일성성 黃鸎枝上一聲聲
일난풍화안류청 日暖風和岸柳靑
지차갱무회피처 只此更無回避處
삼삼두각화난성 森森頭角畵難成
노란 꾀꼬리 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햇볕은 따사롭고 바람은 부드러운데 강가 언덕엔 푸른 버들
이곳을 마다하고 어디로 갈거나
늠름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지저귀는 꾀꼬리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푸른 버들, 물을 벗 삼는 아리따운 물새, 모두 법문을 설하고 있지 않은가? 산은 흰 구름을 두르고 물은 달을 담았으니 하나하나가 소의 오묘한 자태라서 붓으로 표현할 수가 없구나.
견우! 찾아 나섰던 소를 보았다. 즉 진심眞心을 보았다. 그러나 실상은 내가 소를 보았다기보다는 소가 그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소가 곧 자신이라 한다면 찾는 자가 바로 찾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상주 자비사 대웅전 벽화로 표현된 견우(사진 3)는 화사한 채색으로 그려진 한 폭의 산수화 같다. 화면 좌측 근경에 고삐를 잡은 홍의紅衣의 동자가 우측의 바위 뒤로 반쯤 모습을 드러낸 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대부분의 심우도는 이와 같이 아름다운 산수를 배경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벽화를 보면 간혹 어떤 것은 소의 머리 부분이 그려진 경우가 있고, 어떤 것은 도판에서 보는 것같이 소의 뒷부분이 그려진 경우가 있다. 전자는 게송의 ‘두각頭角’이라는 표현에 의거하여 그려진 것이고, 후자는 ‘그리기가 어려워라’는 게송의 내용에 따라 소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그린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후자의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려진 부분이 이렇게 다르긴 해도 ‘견우’라는 그 의미에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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