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 미술 연구의 서막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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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2 년 10 월 [통권 제114호] / / 작성일22-10-05 09:47 / 조회3,095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22 | 고유섭(1905~1944)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5~1944)은 경성제국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개성박물관장을 지낸 한국 미술사학의 태두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최고 교육 기관에서 배우고 활발한 연구 활동과 함께 후학 양성에 힘썼지만 마흔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미학과 미술을 택한 최초의 경성제대생
그럼에도 그의 주저인 『조선 탑파의 연구』는 탑에 대한 본격적 연구서로 학계의 지남서가 되었다 . ‘불교 미술 없이 한국미술은 없다’고 선언한 그는 근대적인 학문 방법론으로 미술사학의 초석을 다진 제1세대로 한국 불교미술사 연구의 서막을 연 학자였다.
고유섭은 1905년 2월 2일 인천의 용동에서 태어나 10세 때 인천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고 1919년 3·1운동 때는 직접 그린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어 3일간 구류를 당했다고 한다. 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국내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이때 문학 동아리인 문우회에 가입해 이효석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는 동아일보에 시조 ‘경인팔경’, 문학잡지 문우에 수필 ‘고난’, 시 ‘해변에 살기’, 조광에 ‘애상의 청춘일기’를 발표하는 등 문학에도 심취했다.
1927년부터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우에노 나오아키, 다나카 도요조 등에게 배우며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미술사를 연구하겠다는 그에게 “이쪽 분야는 어려운 길이라 집안이 넉넉하지 않으면 공부를 계속하기 어렵다.”는 지도교수 우에노의 조언이 있었지만 그는 “관심 있는 분야를 마음대로 공부해 보고 싶다.”고 했고, 뒤에 유명한 국어학자가 된 이희승이 전공 선택의 이유를 묻자 “우리의 미를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경성제대에서 미학과 미술을 전공으로 택한 최초의 학생이었고 이후에도 일본인 학생 한 명만 있었을 정도로 인기 없는 불모지의 학문 분야로 뛰어든 것이다.
도쿄제대를 졸업하고 베를린대학에서 유학한 우에노는 경성제대 미학연구실의 주임교수로서 미학개론, 서양미술사 및 강독연습을 강의했고, 도쿄제대를 나와 인도와 유럽에서 동양미술사를 공부한 다나카는 미학과 미술사 특수 강의에서 중국과 일본 미술사를 가르쳤다. 고유섭은 우에노로부터 미학, 특히 예술학을 수학하여 큰 영향을 받았는데 우에노는 비교예술학의 방법론을 미술사에 도입하려 했다. 그런데 당시 미학연구실의 직원으로 있던 나카기리 이사오는 고유섭이 다나카의 동양미술사 강의에서도 많은 계발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실증적 조사와 과학적 연구를 특징으로 하는 예술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콘라트 피들러의 예술이론을 주제로 「예술적 활동의 본질과 의의」로 학사 학위논문을 쓴 고유섭은 1930년 3월 졸업 후 바로 경성제대 미학연구실의 조수가 되었다. 그는 “1년 안에 서양미술사 논문을 하나 쓰고, 2년 안에 경주 불국사와 불교 미술사 연구를 하겠다.”고 결의를 굳게 다졌다.
그는 다짐처럼 「미학의 사적 개관」(1930)이라는 서양미술 관련 글을 발표했고, 이어서 중국, 일본과 다른 한국의 고유한 미의 특질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고찰」(1931)을 시작으로 불교 미술과 조각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먼저 규장각 소장 도서에서 회화에 관한 고문헌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는데, 고려 회화에 이어 조선시대의 화론을 집성하고 안견, 정선, 김홍도 등 개별 화가 연구를 수행했다.
전국의 석탑과 불상 조사
이와 함께 그가 특별히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 전국에 산재해 있는 석탑에 관한 연구였다. 그는 각지에 있는 탑을 조사 정리하겠다고 마음먹고 경성제대 소속 사진사와 함께 평안도부터 경상도, 전라도까지 탑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그 결과물을 모아 1934년 ‘조선의 탑파 사진전’이라는 전시회를 대학에서 열었고, 석탑에 대한 학술논문인 「조선탑파 개설」을 발표했다.
1933년 4월 오랜 기간 공석이었던 개성부립박물관의 관장이 되었고 이후 10여 년간 재직했다. 당시 개성은 지역 유지와 상인들의 요구로 전기회사나 은행 등의 기관장을 조선인이 맡는 일이 적지 않았다. 비록 29세의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고유섭은 경성제대 출신의 유일한 조선인 미술전공자로서 최적임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매주 토요일에 답사를 다니며 문화재와 유적을 사진으로 남겼고, 「고려의 불사佛寺 건축」(1935), 「불교가 고려 예술의욕에 끼친 영향의 일고찰」(1937) 등의 논문을 썼다.
한편 1936년부터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맡으면서 문화유산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높이고 미술사학계를 이끌어 갈 후학을 양성했다. 특히 개성 출신의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는 이후 한국 미술사학계를 이끈 이들로서 답사를 함께 다니며 고유섭의 훈도를 받고 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유섭은 1930년대 내내 전국의 유적과 금강산, 경주 등의 사찰을 다니며 유물의 조사 수집과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우리 문화 가운데 세계적으로 연구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석탑이고, 둘째는 불상”이라고 했는데, 석탑뿐 아니라 석굴암의 불상 같은 불교 조각에 큰 관심을 가졌다. 「한국의 조각」(1940)에서는 조각을 매개로 하여 한국 미술사의 시기 구분을 시도했다.
그는 회화와 조각, 공예와 건축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는 150여 편의 글을 발표하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1940년 부친이 만주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해방을 1년여 앞둔 1944년 6월 26일에 40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별세했다. 소원인 ‘조선미술사’ 저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불혹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후 30년이 되는 1974년에 그가 발견한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인 감포 대왕암에 한국미술사학회에서 우현기념비를 세웠고, 1980년에는 미술사학자에 주어지는 우현학술상이 제정되었다.
고유섭의 미술사와 『조선탑파의 연구』
고유섭은 19세기 유럽 미술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실증주의에 입각한 문헌학적 연구를 중심으로 했지만 새로운 학설을 수용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고대미술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1937)에서는 정신사와 양식(형식)사를 통일시키고, 그 시대의 문화정신을 이해하여 이를 다시 통합하는 연구방법론을 적용했다. 이는 유럽의 최신 미술사학 방법론을 받아들이면서 이를 당시의 학문풍토에 맞게 변용시킨 것이다. 또 각 시대 미술의 전반적 양상을 다루어 한국의 미술사를 개설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사회경제사학의 유물론적 방법론을 참고로 한 「우리의 미술과 공예」(1934)를 내기도 했다.
고유섭은 “영국인은 인도를 잃어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우리도 잊어서는 안 될 작품으로 경주의 불상을 갖고 있다. 그중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은 석굴암 본존불이다.”라고 할 정도로 한국의 불교문화를 아끼고 또 그에 대한 높은 자긍심을 표명했다. 전통미술의 미의식을 추출하고 ‘미의 시대성’에 큰 관심을 가졌던 그는 한국미술의 특징을 ‘민예적’이라고 하며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단아함' 등의 용어로 표현했다.
탑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집념이 녹아든 연구 성과는 사후 황수영에 의해 『조선탑파의 연구』(1948, 을유문화사)로 모아져 나왔다. 또 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조선의 청자』(1939)를 일본 도쿄에서 펴냈고, 이는 뒤에 진홍섭에 의해 『고려청자』(1954, 을유문화사)로 간행되었다. 논문 등 그의 주요 연구 결과물은 황수영과 진홍섭에 의해 『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1963), 『조선화론집성』(1965년), 『한국미술문화사논총』(1966), 『송도의 고적』(1977) 등으로 출간되었다. 뒤에 황수영이 편집한 『조선미술사료』는 미완성 초고이지만 한국미술사의 개설이라고 할 수 있다. 고유섭의 저작을 망라한 전집은 1993년(통문관, 4권)과 2013년(열화당, 10권)에 나왔다.
고유섭의 대표작 『조선탑파의 연구』는 한국의 석탑을 양식사 중심으로 서술한 것으로 한국 불교미술사 연구에서 석탑의 양식적 기준과 시기 구분 이해의 기본 틀을 제시한 역저이다. 이 책은 한국 불탑 연구의 선구적 업적으로서 “당시로는 새로운 방법인 양식론으로 한국 탑파의 역사를 정리했다.”라거나 “19세기 독일 미술사학 양식을 활용해 탑파의 시대 및 순서를 재조정하고 체계화해 한국 미술사의 수준을 크게 진작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유섭은 한국의 석탑이 삼국시대 ‘시원양식’ 목탑과 전탑을 원형으로 하여 변화해 나갔고 통일신라 중대 전기(무열왕-성덕왕)에 전형적 양식이 확립되었으며, 중대 후기(효성왕-혜공왕)에 점차 규모가 작아지고 장식적 요소가 더해졌다고 보았다. 또 통일신라 말에는 전형적 양식에서 벗어난 특수한 탑(이형석탑)이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특히 금당과 탑의 관계와 가치에 따라 가람의 배치가 바뀐다는 주장은 쌍탑식 가람의 성립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80여 년 전에 제기된 고유섭의 시기 구분 및 양식론은 지금까지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으며 한국의 석탑 연구는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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