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만덕사지』의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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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2 년 9 월 [통권 제113호] / / 작성일22-09-05 09:43 / 조회3,264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사서史書 21 | 만덕사지萬德寺誌 ③
『만덕사지』가 지닌 특징은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면밀한 고증을 통한 찬술이라는 점이다. 이전 자료에 대한 비판과 검증은 조선후기 불교계에서 찬술한 사지류寺誌類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객관적 면모이다.
치밀한 자료수집과 면밀한 검토
이는 한 시기의 학술과 사상의 경향을 반영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만덕사지』는 만덕사만을 소개하는 단편적인 사지의 역할을 초월하고 있다. 예컨대 조선후기 유행했던 박학고거주의博學考據主義에 입각하여 자료수집과 면밀한 검토를 통해 고려시대 불교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불교사를 찬술하고 주체적으로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케 한 것이다.
『만덕사지』는 앞에서 소개했던 『대둔사지』 보다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인용하지는 못했지만, 부족한 고려시대 불교사 자료를 수집하고 그 내용을 복원하고자 진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때문에 고려시대 불교사에 대한 사정을 알기 어려웠던 조선후기에 우리나라 불교사가 지닌 정체성과 가치를 규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이기도 하다.
『만덕사지』는 우선 승려들의 비문을 중심으로 한 각종 기문記文과 소疏·시詩,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강진현지康津縣志』와 같은 지리지와 읍지, 그리고 먼저 찬술된 『대둔사지』도 인용하였다.
표는 『만덕사지』 각 권별 인용 자료 목록이다. 인용 자료의 대체적인 경향은 우선 승려들의 비문碑文이 찬술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사지는 권2의 고려시대 8국사와 권4의 조선시대 8대사를 중심으로 만덕사의 역사와 고려·조선의 불교사, 관련 인물들의 시문 등의 기록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선 비문을 통해 승려의 생애와 활동을 기술하였고, 비문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는 승려의 시문을 비롯한 찬자들의 보충설명을 수록하였다. 예컨대 권2의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에 관한 인용 자료는 천책의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자서自序·소疏·기記, 그리고 유자儒者와 오고간 서간, 천책의 시권詩卷에 대한 다산의 언급 등을 기초로 천책의 생애와 업적을 기술하였다.
"천인은 시집이 현재 전하지는 않으나 『동문선東文選』 가운데 천인天因이 지은 글이 많이 보인다. 그 내용들을 채록하니 잊어버리지 않으면 천인도 잊혀지지 않으리라. 나는 산가山家에서 우연히 『동문선』 1권을 얻었다. <천인제원묘국사문天因祭圓妙國師文>·<천인립부도안골제문天因立浮屠安骨祭文>·<천인립비후휘조제문天因立碑後諱朝祭文>·<천인초입원축성수재소문天因初入院祝聖壽齋疏文>·<천인초입원축령수재소문天因初入院祝令壽齋疏文> 모두 다 실었다. 그래서 이 책을 본사에 돌려보내고 현재는 또 하권에 기록한다." - 『만덕사지』 권1
『동문선』은 『만덕사지』 찬술과정에서 인용한 자료 가운데 질적 양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문선』은 1478년(성종 9) 성종의 명으로 서거정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이다. 『만덕사지』는 약 36편의 『동문선』 소재 시문이 사지 전권에 걸쳐 인용되고 있으며, 특히 권3과 권6은 천인·천책·무외無畏 등 고려 백련결사의 8국사와 관련된 글이 수록되어 있다.
찬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자굉慈宏은 “천인의 시집이 전하지 않아 『동문선』 가운데 천인의 글을 채록했다.”고 하였다. 찬자들이 만덕사 관련 인물의 생애와 활동을 기술하는 데 비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지만, 비문을 비롯한 관련 자료가 소략할 경우 『동문선』은 훌륭한 보조자료 역할을 한 것이다. 아울러 “천인의 글을 채록하여 잊어버리지 않으면 천인도 잊혀지지 않으리라.”는 자홍의 말은 『만덕사지』 찬자들의 자료수집과 취급의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단편적인 시문의 기록을 기초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고, 복원을 시도하였다. 불교가 사회적으로 긍정적 대접을 받지 못했고 소외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역사 자료는 한낱 간장병 마개로 쓰일 정도로 하찮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 그 시절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불조원류』를 토대로 고려불교의 복원 시도
한편 『불조원류』는 소략한 내용을 보충하고, 기록에 대한 진위 여부를 분석하는 데 활용되었다. 『불조원류』는 채영采永의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로 “불문佛門에서의 전등傳燈한 계통이 분명하지 못함을 개탄하고, 1762년(영조 38) 봄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각 파의 고증이 될 만한 문헌을 모아 1764년(영조 40) 여름에 간행한 우리나라 불교의 전등기록이다.
내용은 7불七佛, 서천조사西天祖師, 중화조사中華祖師와 같이 인도와 중국의 조사祖師를 정리했고, 우리나라 승려들의 계보인 ‘해동원류海東源流’는 조선중기 저자의 계파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불조원류』는 우리나라 불교 자료로서는 가장 많은 고승이 실려 있고, 최초의 전반적인 불교사 정리로 주목되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대와 고려의 전등기록은 조사의 기록이 소멸되어 산성散聖으로 취급하였다. 이 또한 오자誤字와 오류가 많고,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고승이 뒤바뀌어 자료 섭렵의 한계나 그 고증이 부실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a. 佛祖源流에 이르기를 無畏國師는 諱 混其, 字 珍丘, 號 牧菴이며, 姓은 趙氏이고 肅公 德裕의 伯父이며, 圓妙의 11세손이다. - 『만덕사지』 권2 : 『고려조사』,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
b. 茶山云 湖山錄의 跋文에 이르기를, 大德 11년(1307) 10월에 王師 佛日普照 靜慧妙圓眞鑑大禪師 丁午跋이라 하다. 대덕 11년은 곧 瀋王(충렬왕) 때의 丁未이다. 그때의 年月이 서로 符合하고, 그의 法號도 서로 부합한 것이 한 字도 差錯이 없으니 무외가 丁午임을 알 수가 있다. 無畏는 賜號이고, 丁午는 法名이다. - 『만덕사지』권2
인용문 a는 『만덕사지』의 제8 목암국사牧菴國師에 관한 기록을 『불조원류』 「고려조사高麗祖師」의 무외국사 부분을 그대로 수록한 대목으로 “무외국사는 호가 목암으로 원묘요세의 11세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용문 b는 다산이 제7 국사 정오丁午 역시 무외無畏임을 그의 저술 『호산록湖山錄』을 언급하며 그 진위를 논하고 있다. 예컨대 다산은 b에서 “무외가 사호賜
號이고, 정오는 법명法名”이라고 해석하여 『만덕사지』 제7 무외국사가 곧 정오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국통國統 정오대사丁午大師는 충숙왕忠肅王 때 사람”이라는 『불조원류』의 기록으로 그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찬자들은 천인과 의선義璇, 백련결사 주맹主盟의 차서次序 등 고려시대 만덕사를 중심으로 한 백련결사의 인물에 대한 많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왕조가 교체되고 불교가 쇠퇴하여 전 왕조의 불교사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자료수집과 고거주의에 입각해 사지를 찬술하고자 했던 조선후기 『만덕사지』 찬자들은 오류투성이인 『불조원류』를 비롯한 단편적인 기록을 기초로 망실된 고려불교를 복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만덕사지』와 여타 사지의 차이점
이밖에 『만덕사지』는 비교적 관련 자료들이 풍부했던 조선시대 불교사를 중심으로 찬술했던 『대둔사지』와는 달리 시문과 비문 등 비교적 단편적인 기록들을 기초로 사지 찬술에 진력했다. 『만덕사지』의 인용 자료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은 첫째, 불교사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과 복원을 위한 노력들이다. 찬자들은 망실된 전 왕조의 불교사 기록을 수집하여 단편적인 수록과 인용에 그치지 않고, 고려시대 정혜결사와 함께 대표적인 신앙결사였던 백련결사의 흔적을 고증을 기초로 복원하고자 하였다.
비록 찬자들이 주장했던 자료의 고증작업과 불교사적 사실에 대한 진위 여부에 대한 분석은 모호하거나 잘못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동시대에 찬술된 대부분의 사지류가 이전의 기록을 맹목적으로 수록하거나 창건주나 연대 등을 실제보다 이전의 시기로 상정하는 오류를 범한 것에 비하면, 『만덕사지』는 고거주의에 기초한 객관성을 중시하였으며, 불완전한 채로 전해오는 고려시대 불교사를 온전히 복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불교사 자료의 보존 인식이 강했다.
인근의 사찰을 널리 수색하니 오직 무위사無爲寺의 형미국사逈微國師는 선덕先德이었는데, 사찰은 현재 폐하고 무너질 지경이라 명적名蹟이 사라질 것 같다. -만덕사지』 권6
인용문은 만덕사가 위치한 강진의 무위사無爲寺에 남아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문先覺大師遍光塔碑文>을 『만덕사지』에 수록하였다. 찬자들은 이미 사찰이 폐허화되어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형미국사의 흔적을 수습한 것이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명적名蹟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한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고려 중기에 창건된 강진의 월남사月南寺에 남아 있는 진각국사의 비문의 사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찬자들은 “진각혜심의 비가 도리어 월남의 유허遺墟에 있는데 돌이 깨어지고 밭은 묵어져 오래지 않아 행적이 아주 없어질 것 같다.”고 하면서 비문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다. 찬자들은 자료수집의 과정에서 고려시대 만덕사를 중심으로 한 불교사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음을 안타까워했고, 남아 있는 자료조차도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사찰과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애석해 했다. 찬자들은 이들 자료가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고 『만덕사지』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지만 자료보존의 차원에서 수록한 것이다. 이것이 『만덕사지』와 동시대 사찰과 불교관련 저술들의 두드러진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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