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생면부지의 상태로 운허스님의 상좌가 되다
페이지 정보
최동순 / 2022 년 9 월 [통권 제113호] / / 작성일22-09-05 10:00 / 조회4,068회 / 댓글0건본문
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1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 ①
<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는 2009년부터 2019년까지 10년 동안 제방의 원로 스님들과 불자들을 영상으로 채록해 온 최동순 박사가 진행합니다. 이번호에서는 대장경의 한글번역 사업을 이끌어 온 운허스님과 월운스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월운스님은 1960년대 초에 시작된 불경 번역 사업을 맡아 완간해 냄으로써 한국의 불전 번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월운스님을 통해 역경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담아냈습니다. 본 내용은 2011년 12월 23일 봉선사 다경실에서 진행한 대담을 다듬은 것입니다. - 편집자 주
젊은 시절 어떤 인연으로 출가하게 되셨나요?
한문을 배우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참 열심히 읽은 걸로 기억해요. 열여덟 살이 돼 가지고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에 외숙부 한 분 계셨는데 내가 찾아가서 취직시켜 달라고 했어요. 돈을 벌어야겠다고. 그래서 하루는 떨치고 집을 나갔어요. 어렵게 물어서 서울 외숙댁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그때는 좌우익이 충돌하는 시절이었는데 우리 외숙이 그만 좌익으로 몰려 있더라고요. 무슨 심부름을 좀 했던 모양입니다.
남해 화방사로 출가하게 된 사연
그렇게 난리가 나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되지도 않았어요. 그런 딱한 사정을 만나서 집으로 돌아갈까 말까 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내려가는 무슨 기차 편이 하나 있었어요. ‘에이~ 나 멀리 가버리자’ 하고 그 기차를 탄 거예요. 그 당시 내가 열여덟 살에 집을 나왔는데, 남북이 냉전관계에 있을 때였어요. 그래서 북한에서 월남동포가 자꾸 내려오고, 그 사람들을 서울에 놔두기가 힘드니까 남쪽으로 실어 나르는 화물차가 있었어요. 그걸 타고 내려와서 진주에 내렸어요.
그렇게 진주에서 며칠 살고 있는데 거기 아낙네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남해 금산 보리암 산신령님께 기도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그래요. 그때 나의 소원은 “어떻게 돈을 좀 벌어서 나도 실컷 좀 배부르게 먹고, 나이도 많이 들었으니 부모님을 좀 모셔야겠다.”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기도를 하기 위해 남해 금산을 찾아간다고 길을 나섰어요. 그런데 먼 길을 걸어가 보니 발도 아프고 그럴 즈음 금산 가기 전에 화방사라는 절이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절로 찾아가서 어쩌다 보니 그곳에서 재무 노릇을 하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게 있었어요. 화방사에 들어갈 때 보면 양쪽에 물이 합쳐지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쳐다보면 저만치 절이 보여요. 당시 내 꿈에 거기서 웬 노인들이 날을 보고 오라고 깔깔 웃어요. 그런 꿈을 꾸기도 했고, 또 이상한 냄새도 나고 그랬어요. 그 냄새는 우리 고향 경기도에서는 모르는 냄새였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지역에 많이 나는 서어나무를 태워서 생기는 냄새였어요.
화방사에서 불경을 처음 접하다
운허스님의 상좌가 된 사연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화방사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절에 들어가니까 인심도 좋고 그랬어요. 하루 쉬는데 안남미 밥을 주어서 밥을 먹는데 책상 위에 책이 있어요. 자세히 보니까 탄허스님이라는 분이 토를 달아 놓은 『금강경』이라는 책이 있고, 『금강경 삼가해』라는 책이 있고, 『보조국사 법어』가 있었는데 모두 토가 잘 달려 있고, 한문토로 인쇄를 해놨어요. 당시 내가 서당에 좀 다녔는데 그때까지 내가 생각한 불교는 ‘세상을 속이고 못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말하자면 인간 축에도 못 되는 사람들이 사는 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동네 가끔 탁발 나오는 분들 보면 무식했었거든요.
그래도 나는 서당에 좀 다닌 터라 그 책들을 보니까 토를 썩 잘 달았어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니 중도 글을 아는가 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이가 탄허스님이었어요. 속가 이름이 택성스님이세요. 그래서 김택성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중도 글을 제법 많이 안다는 게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열여덟 살에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무렵에 정부를 세우려고 사회는 시끄럽고 뭐 테러가 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일에는 무서워서 끼어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저 절 일도 보고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익숙해졌어요. 그때 거기 있는 스님들이 나더러 중 되라고 그래요. 당시 사무를 보던 서창동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당시 스님들은 전부 머리를 기르고 출퇴근을 해요. 양복을 입고 절에 와서는 장삼을 입고 살았어요. 그 스님들은 나보다 한 댓살 위의 나이로 젊은 분들인데 나더러 중이 되라고 해요.
그렇게 한 일 년 지내고 있는데 그곳 스님들이 “쟤(월운스님)가 절 심부름도 곧잘 한다.”고 했어요. 또 육지 쪽에는 “쟤가 한문을 잘 한다.”고 자꾸 나를 선전했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서창동 서무스님한테다가 “쟤를 여기(화방사) 중 만들지 말고, 운허스님한테 보내서 중을 만들어주도록 하라.”고 그래요. 말하자면 내가 그 절과는 맞지 않다는 소리였어요. 그래서 운허스님한테 편지를 했다고 그래요. 그러더니 내게 무엇인가를 보여주면서 내가 운허스님 상좌라고 그래요. 당시 나는 뭐가 뭔지 몰랐어요. 그렇게 해서 이듬해인가 중이 되었어요.
하여튼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아무튼 그때는 내가 나름 영리했어요. 재齋 지내는 걸 보고 소리도 따라 하고, 불공도 할 수가 있고,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도 고칠 능력이 생기고, 부엌에 가면 반찬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그 이듬해에 6.25사변이 터졌어요. 돌아보면 그때는 참 철이 없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고향이 삼팔선 근처인데 전쟁이 터졌으면 쫓아가서 구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은 못 하고 거기 눌러 있었어요.
낯모르던 스승 운허스님과의 상봉
『능엄경』의 대의를 한문으로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화방사에 눌러 있다가 보니까 돈도 곧잘 생기고, 날 보고 스님이라고 그랬지요. 그때 문득 든 생각이 이럴 것이 아니라 ‘나도 어디 큰 데로 가 봐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마침 육지에 있는 스님들이 저더라 자꾸 오라고 그래요. 그렇게 해서 그곳을 훌쩍 내버리고 범어사로 갔어요. 그때는 6.25 사변 난 뒤였어요. 피난 온 스님들이 백여 명 모여 있었고, 운허스님이 거기서 강의하셨어요.
그런데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능엄경』을 우리말로 해주시는데 불경이 그렇게 어려운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엄청 어려웠어요. 그래도 한문으로 된 내용을 보고 무슨 말인지 좀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스님이 어느 날 시험 문제를 냈어요. ‘『능엄경』이 생긴 동기를 아는 데까지 써 봐라’ 그렇게 출제를 했어요. 그 답으로 내가 한문으로 글을 썼어요.
『능엄경』이란 아난존자란 인물이 행렬에서 이탈해서 혼자 탁발 다니다가 마등가라는 기생한테 홀려서 망신을 당하고 절로 쫓겨 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등가 기생한테 홀렸던 아난존자가 대중 앞에 부끄러우니까 부처님한테 “앞으로 이런 일이 안 닥치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 됩니까?” 하고 여쭈어요. 그에 대한 대답이 『능엄경』의 내용입니다. 운허스님이 『능엄경』 대의를 쓰라고 하시니까 “『능엄경』이 대의가 어디 있냐. 동기 자체가 아난이라는 싱거운 사람이 헛짓하다가 거기서 나온 것인데, 그 자체가 허황하다”고 한문으로 갈겨버렸어요.
며칠 있다가 운허스님이 시자 편에 날 오라는 기별이 왔어요. 범어사 뒷방에 계시는데 저녁 먹고 갔더니 “너는 본사가 어디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알고 보니 그 분이 바로 운허스님이고, 내가 그 분의 상좌였지요. 그때는 나는 은사스님이니 뭐니 그런 거 해줬다지만
그게 뭐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때 스님과 어쩌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 얘기였어요. 그러니까 전란이 나기 전 화방사에 있을 때 서창동 스님이 편지를 써서 “이런 사람을 운허스님 앞으로 중을 만들겠다.”고 한 거였지요.
말하자면 중이 된 지 삼사년 후에 운허스님을 뵙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날 보고 하신 말씀이 “경은 또 보고, 또 봐야 된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때 내 생각에는 건방지게 “아난존자가 어찌 그 나이 돼 가지고 그 실수, 저 잘못 했겠느냐. 우리 중생들보고 이렇게 잘못되어 고통 받는다는 걸 보여 주려고 시범하신 거지. 부처님하고 아난존자가 짜고 하는 얘기에 진실이 뭐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분들의 마음이 진실이지 뭘 찾을 게 없다고 답을 썼더랬어요. 그러니까 스님은 그 대답은 안 하시고, ‘근고이득지勤苦而得之’라고 ‘노력을 해야 얻어지는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운허스님이 나의 은사스님이라는 걸 알았어요. 내가 상좌지만 그 분도 객지에 계셨고, 나도 뭘 해야 되는지 모르고 지냈지요.
이승만 대통령과 밴 플리트 사령관과 면담
그리고 그 분이 범어사를 나가시고 나는 남았어요. 돌이켜보니 내가 고향에서 어려운 살림을 산 사람이란 말이요. 비 오면 뭐 빨랫줄 걷어 들이는 것도 알았고, 불전 의식儀式도 했지요. 말하자면 폭이 넓은 셈이었어요. 그런데 소위 비구와 대처의 마찰이 첨예하게 나타난 데가 범어사예요. 그러다 보니 공부보다는 소용돌이에 말려 사건을 일으킨 게 가장 큰 일인 것 같았어요. 좌우간 그해 양력 설 쯤인데 다들 나가고 아무도 없어요. 주지 스님도 안 계시고, 우리 (운허)스님은 벌써 나가셨고.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하고 유엔군의 밴 프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사령관이 찾아왔어요.
밴 플리트 유엔군 사령관을 말씀하시나요?
그런 사람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범어사에 왔는데 아무도 없으니까 내가 안내를 했어요. 내가 범어사 안내를 다 한 뒤에 누가 그래요. “대통령 각하께서 모처럼 오셨는데 건의사항 있으면 하라.”고 그래요. 내가 그 뭐 20살짜리가 뭘 안다고 “국가가 토지개혁을 다 하고는 절에 땅이 하나도 없다. 부처님께 마지 올릴 밥도 쌀도 없고, 노승이 병이 나도 죽 한 그릇 쑤어드릴 수 없다. 땅을 돌려받아야겠다. 또 젊은이들을 모조리 징병을 해서 데려가니까 쌀도 없는 데다 지붕이 썩어내려도 못 고친다.”고 했어요.
내가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소리 했는지 모르겠어요. 내 분명히 그 소리를 했거든요. “절이 모두 문화재인데, 만들긴 불교계에서 만들었지만 그 뒤엔 어찌 불교계의 것만 되느냐. 국가가 대책을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니깐 그 사람들도 그걸 적어 가지고 가서 검토해 보겠다고 그래요.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물었어요. 미군들이 와서 도량에 다니면서 별짓을 다 하고 해서 추해서 못 살겠다고 했어요.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남녀들이 가다가 길모퉁이에서 입 맞추고 한참 서 있는 그런 것이었어요. 그때는 그게 징그럽고 무서웠어요.
그 얘기를 했더니 즉석에서 밴 프리트 장군이 무슨 메모를 하나 해줬어요. 그것을 간판집에 가서 만들어 붙이니까 미군들이 싹 그 짓을 안 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미군 참 놀랍다고 했어요. 담배도 피지 말라 그런 거였지요. 그때는 영어를 몰랐는데, 아는 사람이 ‘리멤버 히어(remember here)’라고 그래요. ‘주의해라’는 뜻이라는 거예요.
아무튼 그때 그 사건이 생겨서 대통령이 처자식 있는 사람은 절에서 물러가라. 절 땅은 작은 절은 4km, 중간 절은 6km, 큰절은 8km 이내에 있는 땅은 돌려줘라 하는 조치가 취해졌어요. 이래 가지고 지금 절에서 땅 구경을 해요. 말하자면 내가 조계종에 공로가 있어요.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
원택스님 /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
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
법등을 활용하여 자등을 밝힌다
1. 『대승기신론』의 네 가지 믿음 [질문]스님, 제가 얼마 전 어느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여쭙니다. 그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 중에 일심一心, 이문二…
일행스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