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중국 고대불교사 연구의 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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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2 년 7 월 [통권 제111호] / / 작성일22-07-05 09:21 / 조회3,623회 / 댓글0건본문
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19 | 탕용동湯用彤 1893-1964 ①
탕용동湯用彤(1893~1964)은 중국 근대불교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서양 역사학 방법론과 철학 방법론을 수용하여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에 전래된 한대漢代부터 중국불교로 완성되는 남북조 시기까지의 불교를 사상적으로 분석, 정리하였다. 탕용동 연구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인데, 이 저서는 이후 중국 근대 불교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 고대불교사 연구의 교과서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
탕용동은 자字가 석여錫予이고 호북성 황매 사람으로 감숙성 통위通渭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 근대의 유명한 국학대사國學大師로 이름을 날렸고, 중앙연구원의 수석위원을 역임하였다. 스스로 “어려서 가정교육을 받아 일찍부터 역사서를 공부했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평생 한학을 연구한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11년에 북경 청화淸華 학당에 입학하여 1917년에 졸업하였고, 1918년 중국 최초의 정부지원 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하바드대학에 진학해 진인각陳寅恪, 오밀吳密(1894~1981) 등 중국인 유학생들과 같이 공부하였다. 이들 모두는 이후 중국 근대 학술계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탕용동은 하바드에서 인도학자 찰스 록웰 랜만에게서 인도철학과 함께 전통불교 연구에 필수적인 산스크리트어, 빨리어를 배웠고, 어빙 배빗(Irving Babbit, 1865~1933)의 신인문주의 영향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탕용동은 중국 전통문화의 가치를 새삼 확인하였고, 중국 전통에 대해 비판적 태도로 일관하였던 호적胡適과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그는 1922년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고, 이후 중국의 국립 동남東南 대학 북경대학교 철학교수, 북경대학교 문학원 원장, 북경대학교 교무위원회 주석主席 등을 거쳐 1951년 10월 이후 북경대학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평생 활발한 불교 학술 활동을 지속하다가 1964년에 병으로 서거하였다.
탕용동은 중국불교사와 위진 시대의 현학玄學에 정통하였는데, 대표작으로 1938년에 간행된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 외 『위진현학논고魏晋玄論稿』 등이 있고, 이 저서들은 오늘날까지 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 외 수·당 시대의 불교사 및 사상사를 기술한 『수당불교사고』를 비롯하여 『인도철학사략印度哲學史略』, 『왕일잡고往日雜稿』, 『강부찰기康復札記』 등이 있다.
서양 역사·철학적 방법과 중국전통의 고증학 방법의 조화
사실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한, 위, 동진과 서진, 남북조 시기는 동아시아불교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이다. 불교를 열렬히 옹호하거나 모질게 탄압하는 역사 속에서 불교가 중국에 정착한 것은 기적이라 할 만한 일이다. 탕용동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에서는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중화주의를 표방하는 유학 및 도교사상과 충돌하면서 뿌리내리게 된 과정이 대하드라마처럼 화려하게 펼쳐진다.
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었던 도안, 혜원, 구마라집, 승조, 축도생, 승랑, 양무제, 부대사, 달마, 천태, 신행, 담란, 진제 등 기라성 같은 천재들의 삶이 사실적으로 서술되어 있고, 그들이 보여준 위대한 사상의 금자탑도 그 속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인도불교 경전과 논서들이 속속 번역되고 새로운 사상이 잇따라 분출되는 이 시기는 오랜 세월 학자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당대 불교문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문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와 빨리어의 장벽을 넘어야 하고, 그 시대 정치·문화·사상의 흐름을 파악하려면 방대한 역사는 물론 현학과 유학에 대한 이해도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험난한 영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첫 학자가 바로 탕용동이었다. 중국 근대 국학대사國學大師로 추앙받은 그는 위진남북조 및 수당시대 불교와 관련된 여러 저술을 남겼지만, 특히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가 학계에 끼친 영향이 가장 컸다.
탕융동은 이 책에서 한나라와 위진남북조 시대에 전래된 불교를 수많은 사료 분석과 엄밀한 고증을 통해 초기 중국불교의 형성과 변천 과정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인도와 중국의 문화 차이에서 발생한 갈등을 극복·융합하면서 불교가 점차 중국화하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는 등 중국불교의 원류를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발간과 더불어 세계학계의 큰 관심을 모았고, 이후 초기 중국불교사를 다루는 논문과 저술들이 크게 늘었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초기 중국불교사 연구자들에게 이 책의 가치는 여전히 지대하다.
사실 중국 근대 불교학자들은 전통 불교사상을 역사적·철학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과제를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탕용동뿐만 아니라 같은 미국 유학파였던 호적, 풍우란 등도 마찬가지였고, 이는 당시 학자들에게 부여된 공동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탕용동이 큰 역할을 한 것은 서양의 역사적, 철학적 연구 방법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중국 전통인 청대의 고증학 방법론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뒤 쇼펜하우어와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서양철학과 그리스 종교를 비롯한 서양 종교도 연구했다. 물론 서양철학과 종교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그것들을 중국 전통을 재해석하기 위한 참고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고증학 방법을 활용하여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 연구에 전념하였고, 사건 고증, 인물 고증, 문헌 고증, 도통 고증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고증학 방법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철학적 방법론과 고증학적 방법론을 동시에 수용한 탕용동의 연구 태도에 대해, 호적胡適은 “탕용동은 명확한 근거가 없는 말은 아무리 일리가 있어 보여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참으로 배울 만한 학문적 태도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중국불교사 권위자인 일본의 가마다 시게오鎌田茂雄(1927~2001)도 “탕용동은 중국의 전통적인 학문 방법을 근대 유럽, 미국의 연구방법과 통합해 완벽한 학문 방법을 창출하였다.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는 교리에 치중하지도 않았고 교단에도 치중하지 않았지만, 양자의 정수를 파악한 정통 통사通史이다.”라고 극찬하였다. 『불교의 중국 정복』 저자인 에릭 쥐르허(1928~2008)는 “탕용동 교수에게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를 표한다.”고 하였다. 이 저서는 중국뿐 아니라 초기 고대불교를 연구하는 동서양 학자들에게 마치 교과서처럼 받아들여졌다.
고증학적 방법론의 활용
탕용동은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에서 고증학적 방법론을 적극 활용하였는데, 예컨대 그는 처음부터 한대漢代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전설을 다루면서 이것들이 모두 근거가 없는 낭설임을 고증하였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10여 종의 전설을 제시하면서 그 속에 담긴 허구성을 지적하였고, 그러한 전설들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 논하였다. 백익이 부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설은 『산해경山海經』에 나오지만, 이는 이미 사람들이 위경僞經으로 의심하는 『해내경海內經』에 나오는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열자列子』에도 공자가 부처를 알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공자가 말한 서방의 성자는 서역으로 간 노자를 지칭하는 것이며 애초에 『열자』라는 책 자체가 위진 시대에 지어진 위서僞書로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전설에 의하면, 동방삭이 이미 불법을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한서漢書』의 기록에 의하면 이 또한 후세 사람들이 견강부회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또 『위서魏書』에는 장건이 서역으로의 교통을 열어서 불법을 전해 듣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저자의 억측일 뿐이라고 단정하였다. 유향의 『열선전서列仙傳序』에서도 신선이 된 사람들 중 절반은 불경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이 책 자체가 도교 도사들의 개작을 거친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 화호설化胡說이 나오면서 도교가 불교와 선두를 다투게 되자,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위서를 대량으로 만들어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던 것을 전설들이 양산된 근본 원인으로 진단하였다.
반면에 한나라 명제가 꿈에 금으로 된 사람[金人]을 보고서 영평 시기에 서역으로 불법을 구하러 갔다는 소위 영평구법설에 대해서는 상당한 진실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영평구법설에 대해 서술하는 문헌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고, 7가지 분야로 이 전설의 진위를 고증하였다. 세 가지 부류는 모자牟子 계통, 『화호경』 계통, 『명상기』 계통이다.
모자 계통의 기록에 의하면, 명제가 밤에 금인에 대한 꿈을 꾸고서 서역에 사자를 파견하여 대월씨국에서 불교 경전인 『사십이장경』을 필사하고 불상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화호경』 계통은 부처님이 깨닫고 열반한 연도를 기록해서, 부처가 노자의 후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가 나온 이유는 너무 분명하다. 도교가 불교보다 더 역사가 오래되고 훌륭한 종교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상기』에서는 가섭마등 등이 중국에 와서 경전을 번역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탕용동은 첫째, 불법은 한 나라 명제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서한 말기 이미 이존伊存이 구두로 불경을 전수했고, 명제 시대 초왕 영은 이미 불교도를 위하여 만찬을 준비하였다, 둘째, 『이혹론』과 『사십이장경』을 서로 비교한 결과, 『이혹론』은 더 일찍 나온 『사십이장경』에 의거해 명제의 사적을 수정하고 증보한 것이라며 고증에 근거하여 진위를 결정하였다. 그 결과 명제의 구법전설이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보았고, 이 전설에 제왕이 불교 포교의 중요한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후세 불교도의 기대가 함축되어 있음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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