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식민지 불교지식인의 굴곡진 삶과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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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2 년 7 월 [통권 제111호] / / 작성일22-07-05 09:28 / 조회3,392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19 | 허영호許永鎬(1900~1952)
허영호許永鎬(1900~1952)는 범어사 승려 출신의 지식인이자 교육자, 사회운동가로서 3·1 운동에 앞장섰고 현실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두 차례 일본에 유학하여 불교학을 공부한 후 중앙불교전문학교, 혜화전문학교와 동국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후학을 양성했고 다수의 연구 성과를 잡지에 발표했다.
식민지의 빛과 그림자, 허영호의 굴곡진 삶
비록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전반에 친일로 전향했고,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가서 생을 마감했지만, 대표적 불교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불교 경론에 대한 역주,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원효에 관한 글을 남기는 등 한국 불교학의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허영호는 1900년 12월 부산의 동래에서 태어났다. 1915년 동래 동명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중등학교인 범어사 지방학림에 입학했는데 법호는 경호鏡湖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법린의 주도 아래 범어사 승려들과 함께 동래에서 적극적 활동을 펼쳤다. 그는 “한 번 죽더라도 자유를 얻겠다.”는 격문을 작성해 만세 시위를 주동했고 그로 인해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1년부터 2년간 일본 도쿄의 도요東洋대학 문화학과에서 공부했는데, 재적 사찰인 범어사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3년에 귀국한 뒤에는 강연과 함께 지역에서 활발히 사회운동을 펼쳐나갔다.
1925년 11월 동래 청년연맹을 창립한 후 대표로 활동했고, 1926년 8월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월간 문예잡지 『평범』을 동래에서 발간했다. 이 잡지는 일반 대중을 독자층으로 했지만 재정난으로 3호까지만 냈다. 이 시기에 그는 잡지 『신민』에 소설 「방황」(1925), 「그와 그들」(1927) 등과 논설인 「자유인과 노예」(1925), 「농민운동」(1926), 「조선의 민족운동과 계급운동」(1926) 등을 실었다. 1928년 4월에는 신간회 동래지회 전형위원과 본부 대표위원·정치문화부 간사를 맡으며 활동의 폭을 넓혔다. 그러면서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 의무교육, 만주 동포 생존권 문제 등에 관한 의견을 피력했다. 1928년 5월에는 조선청년총동맹 경남도연맹에서 대회 집행부 부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부산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총독부 당국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면서 신간회 활동이 위축되었고 지역 운동도 침체기를 맞자 1929년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도쿄에 있는 다이쇼 대학大正大學 불교학과에 입학해 불교학을 전공했는데, 다이쇼대학은 일본 천태종, 진언종, 정토종이 힘을 모아 만든 불교 연합대학이었다. 다이쇼대학 시절에 산스크리트어, 빨리어도 접했고 근대불교학의 연구 성과를 습득할 수 있었다. 이후 그가 반야부를 비롯한 대승경전의 번역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시기에 쌓아 놓은 언어 능력과 학문적 소양이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1930년 5월에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만당의 동경 지부에 가입했고, 재일본 조선청년회 서무부 간사, 조선 유학생 동창회장을 맡는 등 일본에서도 대외 활동을 이어갔다.
1932년 대학 졸업 후 김법린 등과 함께 귀국한 뒤 1932년 9월부터 1933년 5월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가르치면서 학감도 맡았다. 하지만 1933년 교무원의 주도권 문제로 인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동래로 돌아왔고 1934년 7월 김해의 해은사 주지가 되어 1937년까지 소임을 맡았다. 1937년 『불교』 잡지가 속간되면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게 되어 다시 서울로 왔고 해동역경원의 주임 역경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조선불교 교정연구회 연구부장, 조선불교 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불교계의 당면한 현실을 고민하고 문제점과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그는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등 이전과는 달리 친일로 전향했다. 1937년 2월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총본산 건설 기초위원에 선임되었고, 1938년부터 1945년 8월까지 중앙교무원 평의원과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1941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941년부터는 조선불교 조계종의 종정 사서로 활동하면서 각종 기고문과 시국 순회강연을 통해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 예를 들어 1941년 8월 종교, 사상, 정신문화 단체 대표자들과 함께 ‘조국 일본을 수호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애국을 위한 모임’이라는 시국 간담회를 열었고, 1942년 9월 조선불교협회가 주최한 일본과 조선 승려 합동 시국 강연회 때는 ‘대동아전쟁과 일본의 사명’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1943년에는 김태흡 등과 불교문화보급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는데, 그 창립 취지는 황도불교를 선양하고 흥법보국을 내세운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9월 혜화전문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교장에 취임했고, 건국준비위원회 개최 모임에 참가하는 등 대외 활동을 재개했다. 1946년 1월에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6월에는 혜화전문이 동국대학으로 승격되자 1948년 11월까지 초대 학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교단과 불교혁신총연맹의 갈등을 중재하기도 했다. 1949년 1월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부산시 갑구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지만, 다음 해 6월 선거
에서 낙선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으로 가서 1952년 1월 30일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영호의 시대 담론과 학술 연구
허영호는 『불교』 잡지(1929~1933)에 「무아無我의 애愛를 더듬어서」, 「십이상연법十二相緣法에 대해서」 「요별삼십송了別三十頌의 석釋」, 「범파양어梵巴兩語의 발음법에서 본 조선어발음법에 관한 일고찰」, 「금강반야경에 대해서」, 「절寺의 어원에 대하야」, 「조선불교 교육제도의 결함과 개선」 등의 글을 기고했다. 여기서 불교 개념과 교리, 경전과 언어, 역사와 제도 등에 대한 그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1932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중앙불전에서 가르치게 된 허영호는 당시 사회주의 계열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하던 반종교 운동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썼다. 「반종反宗운동의 근거와 그 오류」(『불교』 100(1932))에서 그는 종교는 생활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비록 종교의 제반 사항을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반종교적 입장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종교의 발생은 무지와 공포뿐 아니라 생산과 경제, 인간의 행복 추구 관념 등 여러 다양한 원인과 배경에서 나온 것이므로 일방적 폐기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또 반종교운동 측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는 아편이라고 몰아붙이는데, 이는 종교를 반대하는 이론적 근거나 반종교운동의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어 교회와 사원이 자본주의 제도의 숭배자이자 옹호자로서 민중의 자원을 착취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의식을 마비시키는 독소를 뿌린다고 비판하며 타락과 부패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에 대해, 이는 감정적으로 싫어하는 것일 뿐 생활을 규정하고 이끄는 이론적 기제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의 본질적 관념 형태가 아닌 형식과 제도상의 결함인데, 반종교 이론이 과연 비판 대상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하고 있는지 또 정연한 논리를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허영호는 1937년 3월부터 1939년 1월까지 중앙교무원의 기관지 역할을 한 『신불교』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그는 이 잡지에 「교단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등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는데, 새로운 불교는 전통적 종파의 부활이 아니라 붓다의 교법에 의지하면서 시대를 이끌 수 있어야 하고, 현대인의 생활 요구에 해답을 주고 만족을 주어야 한다고 갈파했다. 하지만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지나사변과 불교도」 같은 권두언을 써서 신앙 보국과 징병 등을 주장했다. 특히 「대동아 전하戰下의 화제花祭를 맞아서」(『신불교』 36(1942)), 「시사-결전 제2년과 새로운 불교에의 구상을 맞아서」(『신불교』 47(1943)) 등의 글을 통해 대동아의 공영을 위한 전쟁에 불교계가 적극 협력해야 함을 주장했고, 대동아와 관련해 남방불교에 비해 북방불교(대승불교)의 우수함을 강조했다.
그가 『신불교』에 실은 글 가운데 학술 연구의 성과와 관련된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범한조 대역)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 주석」(『신불교』 1-4·6(1937)), 「역경의 급무(불경의 본의, 역경과 포교, 역경과 조선 문화)」(『신불교』 3(1937)), 「사교邪敎와 불교도」(『신불교』 4(1937)), 「십이문론」(『신불교』 5-9(1937)), 「부처님이 말씀하신 아미타경」(『신불교』 7(1937)),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신불교』 8(1937)), 「조선불교의 입교론立敎論」(『신불교』 9(1937)), 「조선불교의 본존론」(『신불교』 10(1938)), 「조선불교의 불성론」(『신불교』 11(1938)), 「대승기신론」(『신불교』 11-13(1938)), 「보시태자경」(『신불교』 11-12(1938)), 「천태사교의」(『신불교』 14-17·19(1938)), 「원효불교의 재음미」(『신불교』 29-35(1941·1942)), 「연구-대소품반야경의 성립론」(『신불교』 40·44·46·50·56(1942-1944)), 「연구-불전에 나타난 성수星宿」(『신불교』 62(1944)) 등이다.
이 글들의 주제를 보면, 경론 역주와 한국불교의 특성, 원효 연구에 집중되어 있다. 허영호가 일본 유학 당시 문헌학, 역사학, 언어학에 기초한 근대 불교학의 연구 성과를 익히고, 다이쇼대학 불교학과 졸업논문으로 산스크리트어 판본과 한역본에 입각한 「반야부경의 성립차제에 대하여」를 제출한 사실에서 그의 학문적 이정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그는 『불교성전』, 『불타의 의의』와 같은 저작을 통해 불교학의 확산을 도모했고, 연구와 교육을 병행하면서 통불교
로서 한국불교의 특징과 원효를 강조했다. 이처럼 ‘친일과 납북(월북)’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불교학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그가 많은 기여를 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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