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책 이야기]
중국 근대불교학의 부흥, 금릉각경처 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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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정 / 2022 년 6 월 [통권 제110호] / / 작성일22-06-07 11:23 / 조회4,213회 / 댓글0건본문
성철스님의 책 이야기6 | 중국의 판각 불서③
백련암 성철스님이 소장했던 고문헌 2,231책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370여 종 1,206책은 근대 시기 중국의 여러 각경처에서 간행한 불서들이다. 널리 알려진 남경南京의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 뿐만 아니라 간기를 통해 확인되는 곳만도 강서江西, 상숙常熟, 여고如皐, 강북江北, 장사長沙, 계원鷄園, 남창南昌, 북경北京, 고소姑蘇 각경처 등 지역도 20여 곳이 넘는다. 성철스님이 1948년 9월에 김병룡 거사로부터 증여받은 519종 1,773책의 목록인 「증여계약서목」에 적힌 첫 번째 화엄부華嚴部부터 20번째 잡집부雜集部까지 분류된 390종 1,218책 대부분이 중국 각경처 불서들로 확인되었다.
백련암 소장본에는 금릉각경처에서 간행한 『대방광불신화엄경합론』 120권 30책, 『운서법휘』 34책, 『유가사지론』 100권 31책과 계원각경처의 『대반야바라밀다경』 600권 120책, 강북각경처의 『감산노인몽유집』 55권 20책, 고소각경처의 『묘법연화경문구기』 30권 30책, 상숙각경처의 『대보적경』 120권 24책, 유양장경원維揚藏經院의 『성유식론술기』 60권 20책 등 전질로 된 중요 불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중 『대반야바라밀다경』은 계원묘공雞園妙空(1826~1880)이 1874년(동치 13)에 판각을 시작하여 그가 입적 한 3년 뒤인 1882년에 600권으로 판각이 완간되었다. 중국에서 이 시기 이처럼 대규모로 다양한 불교 문헌을 간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양문회楊文會(호는 仁山, 1837~1911) 거사가 있었다.
양문회의 금릉각경처 불서 간행
금릉각경처는 1866년(동치 5)에 양문회가 뜻있는 거사들을 모아 함께 불서를 간행하고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젊은 시절 불교에 입문한 양문회는 당시 구해 볼 수 있는 불서가 턱없이 부족함을 실감했다. 그래서 불서를 수집하고 간행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금릉각경처를 설립한 해에 간행한 첫 책이 『정토사경淨土四經』이다.
『정토사경』은 청대 거사 위승관魏承貫(魏源, 1794~1857)이 『무량수경』·『관무량수불경』·『아미타경』의 정토삼경에 80권 『화엄경』 중 「보현행원품」을 더하여 간행한 합간본이다(사진 1). 이 책은 화엄과 정토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정토 법문이 중요시되던 청대 불교에 중요한 문헌이다. 금릉각경처의 최초 간행 도서가 『정토사경』이었다는 사실에서 금릉각경처 발기인의 신앙 경향이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기존 청대 불교의 큰 흐름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릉각경처의 불서 출판 방식은 여러 판본을 수집해서 교감과 대조를 통해서 정본定本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판각한 후 인출하는 방식이었다. 형식은 전통적인 방책본方冊本으로 만들어 유통하였다. 양문회가 설립한 금릉각경처를 특히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이곳에서 기존 불교 문헌에 대한 정본화 작업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산실散失된 많은 문헌들을 다시 간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당말唐末 이후 전란 등의 원인으로 몇몇 종파의 문헌을 제외하고는 불교 경전과 주석서들이 흩어져 사라진 게 많았다.
양문회는 일본에 전래된 중국 찬술 문헌에 관심을 기울였다. 양문회가 일본에서 중국 찬술 문헌을 구할 수 있었던 데는 그가 영국 체류 중에 교류한 난조분유南條文雄(1849~1927)의 도움이 컸다. 양문회는 1878년 청정부가 파견한 유럽 주재 흠차대신欽差大臣 증기택曾紀澤(1839~1890)을 수행해서 유럽을 방문했다. 1882년까지 프랑스와 영국에 장기간 체류했다. 1879년 초 영국 런던에 도착해 난조분유를 만났다.
양문회와 난조분유의 불서 교류
난조분유는 일본 승려로서 런던 옥스퍼드 대학에서 인도학자이자 종교학자인 막스 뮐러Max Müller(1823~1900)에게 범어와 불교를 학습하고 있었다. 양문회는 난조분유와의 첫 만남에서 자신이 간행한 『대승기신론』을 선물하고 『기신론』 덕분에 불법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때 『기신론』의 산스크리트본이 존재하는지도 난조분유에게 묻는다. 실제 양문회는 유럽으로 오기 전인 1877년에 장사각경처에서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를 간행했다. 이 책은 진제가 번역한 원문에 현수법장, 규봉 종밀, 운서 주굉의 주석과 양문회 자신이 찬술한 과문科文과 법수法數를 함께 편찬한 것이다(사진 2). 이 주석서가 난조분유에게 선물한 책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기신론』 주석서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그가 간행한 책인 것은 분명하다.
난조분유는 양문회의 독실한 신앙과 중국 불교 개혁에 대한 포부에 감동하여 교류를 시작하였다. 1882년 유럽 체류를 마치고 귀국한 양문회는 1885년부터 당시 일본에 있던 난조분유와 편지 교류를 시작했다. 편지 왕래는 1909년까지 30여 년간 지속된다. 실제 양문회가 난조분유에게 보낸 편지 28편이 그가 편찬한 『양인산거사유저楊仁山居士遺著』 제10책 「등부등관잡록等不等觀雜錄」 권7, 8에 수록되어 있다(사진 3). 양문회는 1890년부터 중국에서 산실된 불서를 편지를 통해 일본에 있는 난조분유에게 의뢰하였고, 이렇게 구매한 불서가 3백여 종이라고 말한다.
양문회의 노력과 난조분유 등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수입한 불서의 상당수는 이미 중국에서 사라진 위진시대부터 수 당대에 이르는 번역 경론과 중국 찬술 문헌이었다. 양문회는 대략 20여 년간 지속적으로 불교 문헌을 구매했는데, 여기에는 화엄종, 정토종, 법상종, 천태종, 삼론종 관계의 중요 전적들이 포함되어 있다. 고대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많은 중국 찬술 불교 문헌들이 근대에 와서 일본으로부터 다시 역수입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교감학과 동아시아 불교 찬술 문헌의 부흥
일본에서 많은 문헌이 수입되자 청말 중국 불교계는 교리와 사상 연구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양문회는 자신이 신봉한 정토종과 화엄종 계열의 희귀 문헌을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법상종 관련 문헌에 대한 교감校勘과 간행에도 힘썼다. 특히 『성유식론』, 『섭대승론』, 『섭대승론석』, 『성유식론술기』, 『유가사지론』 등의 교감과 간행은 이후 중국의 근대 유식학 부흥의 계 기가 되었다.
경학 전통에서 불교 연구에 가장 뚜렷하게 사용된 방법이 교감학이다. ‘교감’은 여러 문헌을 대조하여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교감 이외에 ‘교수校讎’라는 용어도 자주 쓰인다. ‘교수’는 단순히 한 판본만을 갖고 그것의 오류를 수정하는 게 아니라 동일 저작의 상이한 판본을 비교하여 옳고 그름을 확정하는 것을 말한다.
금릉각경처 간행 당시 교감에 사용되었던 고려재조대장경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곳곳에 있어 주목된다. 양문회는 1896년에 『성유식론』(사진 4)과 1898년에 『반야등론석』을 간행할 당시 책에 교감기를 남겼다. 그는 “이들 논서를 중간할 때 송·원·명·고려의 네 가지 대장경을 서로 대교했는데, 그 중 고려본이 가장 훌륭했으며[此論以宋元明麗四藏讎校 高麗最善] 많은 부분을 고려대장경본에 따라 개정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1899년에 현수법장이 찬술한 『범망경보살계본소梵網經菩薩戒本疏』에도 고려대장경이 가장 우수하여 정본으로 삼아야 한다[梵網戒經 古今各本 增減不同 光緖十年(1884) 依澫益合註本 刊成正文 仍不能釋然於心 玆從日本傳來賢首戒疏 復依縮本藏經 參校宋元明麗四藏 其中以麗藏爲最善 今多從之 俾與疏意相符也 誦戒者當以此本爲正]고 기록해 두고 있다.
백련암 소장본 중에는 금릉각경처에서 간행한 한국 찬술 문헌도 확인된다. 1897년(광서 23)에 간행된 최치원崔致遠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 1899년에 간행된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의 주석을 회편한 『대승기신론소기회본大乘起信論疏記會本』 6권 2책이 확인되었다. 정확한 간행 시기와 장소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원효의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1책(사진 5)과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1책도 금릉각경처에서 판각된 책으로 확인된다. 특히 『유심안락도』는 양문회가 그의 친척인 소소파蘇少坡가 외교관으로 일본에 부임할 때 난조분유에게서 구한, 중국에서 일실된 정토 관련 10책에도 포함되어 있던 책이다. 「휘각고일정토십서연기彙刻古逸淨土十書緣起」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근대 중국에서 불교 서적이 다시 보급되고 확산된 계기는 양문회와 같은 재가 거사의 원력이 큰 밑거름이 되었다. 금릉각경처 불서의 교감에서도 드러났듯이, 고려 재조대장경은 중국의 여느 대장경보다 원문의 정확성을 내재하고 있다. 800여 년 동안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경판이 흩어지지 않고 해인사 장경판전에 봉안되어 세계적인 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국불교의 저력과 가능성은 이렇게도 입증된다.
다만 고려시대 초조대장경의 완성 이후 동아시아 고승들의 저술인 장소章疏를 모두 수집하여 교감해서 간행하고자 했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교장敎藏 간행이 후대에도 제대로 이어졌더라면 한국불교의 위대한 사상가인 원효 등의 저술을 타국에서 찾아 헤매는 아쉬움이 덜했을 것이다. 중국 근대 불교학의 부흥에서 배운 교훈을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이 무엇인지 모색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김영진, 『중국 근대불교학의 탄생』, 부산: 산지니, 2017.
김영진, 「중국 근대 금릉각경처의 각인 사업과 백련암소장 금릉각경처각본 유식문
헌의 성격 고찰」, 『불교학보』 90, 서울: 불교문화연구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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