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수]
네 가지 폭류[四暴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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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2 년 5 월 [통권 제109호] / / 작성일22-05-04 09:51 / 조회4,182회 / 댓글0건본문
사폭류四暴流(cattāro-oghā, Sk. catvāra oghāḥ)는 번뇌를 분류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사폭류四瀑流, 사류四流, 사대폭하四大暴河라고도 한다. 폭류는 모든 선善을 떠내려 보내는 번뇌를 거센 물결[暴流]에 비유한 것이다. 사폭류란 감각적 욕망의 폭류(kāma-ogha, 欲暴流), 존재의 폭류(bhava-ogha, 有暴流), 견해의 폭류(diṭṭhi-ogha, 見暴流), 무명의 폭류(avijjā-ogha, 無明暴流)를 말한다.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권 「염부차경閻浮車經」에서 염부차라는 외도外道가 사리불舍利弗에게 “흐름[流]이라고 하는데 무엇을 흐름이라 합니까?”라고 물었다. 사리불이 “흐름[流]이란 욕류欲流·유류有流·견류見流·무명류無明流입니다.”라고 답했다. 염부차가 또 물었다. “사리불이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흐름을 끊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사리불이 “있습니다. 팔정도八正道가 바로 그것입니다.”(T2, p.127a)라고 답했다. 이 경에서는 네 가지 흐름[四流]의 명칭만 나타날 뿐 자세한 설명은 없다. 반면 『증일아함경』 제23권 제9경에서는 네 가지 흐름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욕류欲流란 무엇인가? 다섯 가지 욕망[五欲]이다. 다섯 가지 욕망이란 눈으로 형색을 보면, … 귀로 소리를 들으면, … 코로 냄새를 맡으면, … 혀로 맛을 보면, … 몸으로 접촉하면 그 대상에 집착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이것을 욕류라고 한다.”(T2, 672b)
“유류有流란 무엇인가? 삼유三有를 말한다. 삼유란 욕유欲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이다. 이것을 일러 유류라고 한다.”(T2, 672b) 즉 욕계·색계·무색계이다.
“견류見流란 무엇인가? 이른바 이 세상은 영원하다는 견해와 무상하다는 견해, 이 세상은 끝이 있다는 견해와 끝이 없다는 견해, 육체가 곧 영혼이라는 견해와 육체는 영혼이 아니라는 견해, 여래에게 죽음이 있다는 견해, 여래에게 죽음이 없다는 견해, 여래에게 죽음이 있기도 하고 죽음이 없기도 하다는 견해, 여래에게 죽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음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견해이다. 이것을 일러 견해의 흐름이라 한다.”(T2, 672b)
“무명류無明流란 무엇인가? 무명이란 앎이 없고[無知], 믿음이 없고[無信], 견해가 없다[無見], 또 마음에 항상 탐욕이 있고 항상 희망希望하는 것이 있다. 또 다섯 가지 장애[五蓋]가 있다. 또 괴로움[苦]을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발생[集]을 알지 못하며, 괴로움의 소멸[盡]을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일러 무명의 흐름이라 한다.”(T2, p.672c)
위 경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감각적 욕망의 폭류[欲流]는 눈·귀·코·혀·몸을 통한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에 관한 집착을 말한다. 둘째, 존재의 폭류[有流]는 욕계·색계·무색계에서 일으키는 번뇌에 대한 집착을 뜻한다. 셋째, 견해의 폭류[見流]는 이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등 형이상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이른바 예순두 가지 잘못된 견해가 이에 속한다. 후대에는 유신견有身見·변집견邊執見·사견邪見·계금취견戒禁取見을 일으키는 것을 견류로 보았다. 넷째, 무명의 폭류[無明流]란 어리석음[癡]을 말한다. 즉 앎이 없고[無知], 믿음이 없고[無信], 견해가 없고[無見], 마음에 항상 탐욕이 있고, 다섯 가지 장애[五蓋]가 있고, 사성제四聖諦를 모르는 것을 말한다. 이 네 가지를 ‘번뇌(āsava)’라 부르기도 하고, ‘속박(yoga)’이라 부르기도 한다.
‘네 가지 폭류’를 다른 경(AN4:10)에서는 ‘네 가지 멍에[四軛]’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요가(yoga)’라는 용어에는 멍에[軛], 속박束縛, 계박繫縛, 결합結合, 관계關係 등의 다양한 뜻이 있다. 요가를 불교에서는 ‘속박’의 의미로 사용하지만, 브라만교(지금의 힌두교)에서는 ‘결합’의 의미로 사용한다. 불교에서는 소에게 매는 멍에는 번뇌를 상징하므로 속박의 의미로 사용한다. 반면 힌두교에서는 요가를 신과 인간의 결합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즉 내면의 참다운 자아가 궁극의 브라흐만과 합일하는 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베단따 철학에서는 이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그러나 붓다는 요가를 번뇌(āsava), 즉 속박이라고 보았다. 또한 번뇌를 거센 물결 혹은 사나운 물결, 즉 폭류(ogha)에 비유했다. 이처럼 불교에서의 요가는 번뇌 혹은 멍에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요가 숫따(Yoga-sutta, 束縛經)」(AN4:10)에서 “비구들이여, ‘네 가지 속박(yoga)’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감각적 욕망의 속박(kāma-yoga), 존재의 속박(bhava-yoga), 견해의 속박(diṭṭhi-yoga), 무명의 속박(avijjā-yoga)이다.”(AN.Ⅱ.10)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감각적 욕망의 속박인가? 비구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감각적 욕망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가 감각적 욕망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해서 감각적 욕망에 관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 감각적 욕망에 대한 환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애, 감각적 욕망에 대한 홀림,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증,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뇌熱惱,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향한 경향을 일으키면, 비구들이여, 이것을 감각적 욕망의 속박이라 한다.”(AN.Ⅱ.10) 나머지 존재의 속박, 견해의 속박, 무명의 속박도 이와 같다.
붓다는 이 경에서 ‘네 가지 속박에서 벗어남’을 강조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속박에서 벗어남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감각적 욕망의 속박에서 벗어남, 존재의 속박에서 벗어남, 견해의 속박에서 벗어남, 무명의 속박에서 벗어남이다.”(AN.Ⅱ.11) 이른바 네 가지 속박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알지 못하면 네 가지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네 가지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유가안온瑜伽安穩(yogakkhema)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오가 숫따(Ogha-sutta, 暴流經)」(SN1:1)에 따르면 어떤 천신(Devatā)이 세존께 “스승이시여(mārisa), 당신은 어떻게 거센 물결[暴流]을 건너셨습니까?”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붓다는 ”벗이여, 나는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느니라.”(SN.Ⅰ.1)라고 말했다.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appatiṭṭha)’라는 것은 번뇌들로 인해 ‘멈추지 않았다’ 또는 ‘가라앉지 않았다’라는 뜻이고, ‘애쓰지 않고(anāyūhaṃ)’라는 것은 잘못된 정진을 통해서 애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짧은 대화 속에 붓다의 중도적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주석서에서는 붓다가 일곱 가지를 통해서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에 폭류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SA.Ⅰ.19-20) 다시 말해 붓다는 번뇌, 갈애, 사견(상견과 단견)은 물론 게으름과 들뜸, 쾌락의 탐닉과 자기 학대에 몰두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가 숫따」(SN1:1)에 대응하는 한역은 『잡아함경』 제48권 제1267경 「도류경度流經」이다. 이 경에 따르면 어떤 천자天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 사나운 흐름[駛流]을 건넜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천자여.” 천자가 다시 여쭈었다. “인연에 이끌림[攀緣]도 없고 또 머묾도 없이 사나운 흐름을 건넜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천자여.” 천자가 다시 여쭈었다. “인연에 끌림도 없고 또 머묾도 없이 사나운 흐름을 건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러이러하게 끌어안고[抱], 이러이러하게 올곧게 바로 나아가면 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며, 이러이러하게 끌어안지 않고 이러이러하게 올곧게 바로 나아가지 않으면 곧 물에 떠내려가고 만다. 천자여, 이것을 인연에 이끌림도 없고 또 머묾도 없이 사나운 흐름을 건너는 것이니라.” (T2, p.348b)
이 경에서는 “인연에 이끌림도 없고 또 머묾도 없이 사나운 흐름[駛流]을 건넜다[無所攀緣, 亦無所住, 而度駛流].”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한 ‘사나운 흐름[駛流]’이란 네 가지 폭류暴流, 즉 욕류欲流·유류有流·견류見流·무명류無明流를 가리킨다.
한편 인도의 승려 하리발마訶梨跋摩(Harivarman, 250~350년경)가 저술한 『성실론(成實論, Satyasiddhi-śāstra)』에도 ‘네 가지 흐름[四流]’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성실론』에서는 사류四流 중에서 삼계의 견혹見惑인 견류見流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삼계의 견혹으로 인해 생사유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실론』에 따르면 “이른바 중생은 세 가지 번뇌[三惑: 見思惑·塵沙惑·無明惑]로 말미암아 유전流轉하며, 삼계三界에 정처 없이 떠돌기 때문에 되돌아올 수 없다. 또한 ‘네 가지 거친 하천[四暴河]’이라고도 한다. 그 혹업惑業으로써 거센 폭류로 하천을 형성하여 흐르는 중생을 빠뜨린다. 또한 ‘네 가지 멍에[四軛]’라고도 하는데, 중생은 혹업에 얽매인다. 만약 소의 멍에가 마차에 묶이게 되면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釋一如, 『三藏法數』, p.174ab)
붓다가 네 가지 흐름[四流]을 언급한 것은 그것을 벗어난 네 가지 즐거움[四樂]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증일아함경』 제23권에 이렇게 설해져 있다. “만일 범부凡夫가 네 가지 흐름에 대한 설법을 듣지 못하면 그는 네 가지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이른바 휴식하는 즐거움[休息樂], 바르게 깨닫는 즐거움[正覺樂], 사문의 즐거움[沙門樂], 열반의 즐거움[涅槃樂]이다. 만일 범부가 이 네 가지 흐름을 알지 못하면 그는 이 네 가지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T2, p.67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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