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남종선의 초전지로 추정되는 폐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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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2 년 4 월 [통권 제108호] / / 작성일22-04-04 11:14 / 조회4,524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18 | 선림원지 ①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에서 횡성 쪽을 향하여 내륙으로 들어가다 보면 미천골米川谷로 접어든다. 이 길을 따라 미천골 자연휴양림 방향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고요 속에 잠긴 깊은 골짜기에 크고 작은 바위들이 풍경을 만들고, 계곡을 따라 맑은 벽계수碧溪水가 흐른다. 【사진 1】
억성사로 추정되는 선림원지
이 깊은 산중 계곡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노라면 왼쪽으로 당대 납자들의 최대 수행처였던 선림원지禪林院址를 만난다. 호젓한 겨울에 이 길을 걷노라면 속세와는 완전히 단절된 느낌이 들고, 깊은 산중에 홀로 선 자신만을 확인하게 된다.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하게 내리는 적막강산寂寞江山에 홀로 선 자기를 보면 더 좋으리라. 어쩌면 눈을 뚫고 나온 한매寒梅를 만날지도 모른다.
양쪽으로 높은 산들이 겹겹이 있고 계곡은 길고 깊다. 아마도 그 옛날 이곳에는 금당金堂과 조사당祖師堂과 석등, 석탑이 서 있는 큰 수행도량과 함께 계곡을 따라 작은 암자들이 설산에 흩어져 있어 붓다의 길을 걸어간 많은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이 골짜기에서 한 소식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골짜기마다 작은 집에 승려들이 머물며 법을 찾고, 덕 높은 선사들을 찾아 이곳 산중을 찾아온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길 없는 길’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보니 그 많은 밥을 짓기 위한 쌀을 씻은 흰 뜨물이 긴 계곡을 따라 멀리까지 흘러내려갔을 것이고, 더운 여름이면 쏟아지는 월광月光을 받으며 송림간松林間의 찬 개울물에 몸을 담그고는 했을 것이다. 얼음 같은 냉천冷泉에 들어앉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왜 이곳으로 왔는가?’ 정신이 깨끗해지면 지혜는 밝아지는 법이다[神淸智明].
현재는 ‘선림원지’라고 쓴 안내판이 길가에 서 있는데, 학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억성사億聖寺로 비정한다. 우리 불교사에서 통일신라시대인 784년에 당나라로 가서 40여 년 동안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온 도의道義(?-?, 도당 유학: 784~821) 선사가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최초로 남종선의 선법禪法을 펼치고, 그 제자인 염거廉居(?~844) 화상이 그 맥을 이어받아 선법을 펼쳤다는 바로 그 억성사이다. 지금까지 나온 유물이나 자료들을 근거로 보면, 설악산 일대에서 이곳 이외에 달리 억성사라고 볼 만한 곳이 없는 형편이니 이곳을 억성사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억성사 삼층석탑
도로에서 석축을 쌓아 놓은 사역寺域으로 돌계단을 밟아 오르면 【사진 2】 넓은 절터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곳에는 늘씬하게 서 있는 3층 석탑石塔과 파손된 부도탑浮屠塔 그리고 석등石燈과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가 서 있다. 이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오늘날에 와서 이곳을 발굴하여 조성하여 놓은 선림원지를 보면 그 규모가 작지 않고, 탑이 있는 이곳뿐만 아니라 길게 뻗쳐 있는 미천골의 계곡을 따라 좌우에 여러 당우들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왕경에서 멀리 떨어진 설악산 지역에서 진전사가 있는 지역과 이 골짜기 일대가 남종선이 도입되어 활발하게 법을 펼쳐가고 많은 납자들이 수행을 한 공간이 아닌가 하는 상상도 해본다. 【사진 3】
선림원지에 다시 복원해 놓은 승탑도 원래 산등성이에 파손된 채로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고 보면, 억성사의 사역이 컸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1948년 절터에서 연대가 804년으로 적힌 신라시대의 동종銅鐘이 나오면서 창건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종의 명문에 ‘사림沙林’이라는 글자로 보아 사림사沙林寺로 불리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억성사의 사역으로 들어가면 먼저 삼층석탑三層石塔을【사진 4】 만나는데, 이 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이 탑신의 팔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는데, 자유롭고 화려한 양식에서는 진전사의 삼층석탑을 계승하였지만 그 수준에서는 진전사의 석탑이 더 뛰어나기 때문에 이 탑은 진전사의 탑보다는 나중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양식으로 보아 이 석탑은 염거대사가 주석할 때는 없었고 사세가 번창했던 시절인 홍각선사가 주석할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사라졌다. 이런 양식의 삼층석탑은 왕경인 경주지역에서 먼저 세워지고 8세기에 양식상의 완성을 본 후 9세기에 들어 더 자유로운 양식으로 나가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조성된 것이다. 복원하기 전에 기단부에서 소탑 60여 기와 동탁 1개가 발견되었고, 탑 앞에는 안상을 새긴 배례석이 남아 있다.
이 석탑 뒤에는 법당의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 5】 법당과 탑이 매우 가까이 위치한 것은 진전사의 경우와 매우 닮은 점이다. 두 사찰이 모두 계곡을 앞에 둔 지형에 지어져 그러한 것 같다. 이러한 화려한 탑을 조성하려면 상당한 재력이 있어야 하는데, 석재를 구하고 이를 다듬는 뛰어난 석공을 구하는 일까지 그 일에 든 경비를 생각해 보면 진전사든 억성사든 이런 탑을 조성할 때는 설악산 지역에서 사세가 강했다고 보이고, 왕실의 지원이 없이는 그런 일이 어려웠을 것이다.
억성사 승탑
삼층석탑을 지나 사역 공간으로 더 들어가면 파손되고 남은 승탑이 있다. 【사진 6】 우리나라에서 승탑 또는 부도탑은 당나라에서 선종이 들어와 확산되면서 조성되기 시작한다. 탑은 원래 붓다의 유골을 봉안한 무덤에서 유래하여 붓다의 상징으로 조성된 것인데, 선종에서는 선사들을 붓다에 비견하는 지위로 보았기 때문에 선사들의 유골을 봉안하는 탑을 조성한 것이다. 탑塔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stupa와 팔리어인 투우파thupa라는 말이 중국으로 와서 중국식 발음에 따라 솔도파率堵婆 또는 탑파塔婆로 쓰이고 이것이 줄어서 탑으로 되었다.
승탑을 말하는 부도浮屠는 붓다를 소리에 따라 한자어로 표기한 것으로 부도浮圖, 부두浮頭, 포도蒲圖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소리를 표기한 것이어서 그에 사용된 한자의 뜻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원래의 탑에 비견하여 승려의 유골을 봉안한 탑을 부도탑이라고 한다. 승탑이라는 용어는 승려[僧]의 유골을 봉안한 탑塔이라는 의미에서 만든 용어에 불과하다. 이 승탑은 일제강점기에 완전히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에 각 부분을 모아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기단부만 남아 있다. 기단의 구조로 보아 8각을 기본으로 한 승탑인데, 기단 아래 받침돌 밑을 크게 강조한 것은 8각형의 일반적인 승탑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를 세운 시기는 절터에 남아 있는 홍각선사비와 이 승탑이 홍각선사의 승탑인 점으로 미루어 정강왕定康王(886~887) 1년인 886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대석은 거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높게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의 조각은 지금도 원래의 모습대로 선명하게 남아 있고, 장중한 느낌 을 준다. 상대석과 하대석은 2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새겨 마주보게 하였는데, 모양이 여주 고달사지高達寺址의 부도와 흡사하다. 상대석 위에 놓이는 탑신부터 상륜부까지 모두 없어졌다.
석등과 홍각선사탑비
여기서 탑비가 서 있는 곳으로 가면 그 앞으로 석등이 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 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이 독특하여 주목된다. 【사진 7】 하대석의 복련석伏蓮石에는 귀꽃조각이 강하게 돌출되어 있고, 그 위에 중대석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간주석竿柱石의 양끝에는 구름무늬의 띠를 둘러 새겨놓았고,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새긴 다음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잎의 띠를 둘러 새겼다.
화사석은 8각으로 빛이 새어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무늬들이 새겨져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8각의 모서리선이 뚜렷하게 남아 있고, 추녀에는 하대석의 귀꽃조각과 같이 새겨져 있는데, 일부 추녀의 조각들을 의도적으로 파손한 흔적도 뚜렷이 남아 있다. 전체적인 양식과 장식적 조각 등은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등 뒤쪽으로는 신라하대의 석비石碑 양식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홍각선사탑비가 서 있다. 【사진 8, 9】 이 비는 원래 비신이 파손되어 귀부와 이수만 여기에 있었는데, 2008년에 비신을 새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홍각弘覺(814~880) 선사는 경주 출신의 김씨로 830년(흥덕왕 5년)에 17살의 나이로 출가하였다. 그는 출가하기 전에 이미 경사經史에 능통할 정도로 공부를 하였고, 해인사海印寺로 가서 선지식善知識을 참예하고, 이후 여러 사찰을 찾아다니며 공부하기도 했다.
해인사는 당시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이었던 만큼 홍각선사도 초기에는 화엄종의 교학敎學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의상義湘(625〜702) 대사의 법손이자 도당 유학승인 순응順應(?~?) 화상이 화엄사찰로 해인사를 짓기 시작하여 그 제자 이정利貞 화상이 완공한 때가 애장왕哀莊王(800〜809) 2년인 802년이다. 홍각선사가 출가한 때를 기준으로 보면 해인사가 창건되고 화엄승들이 모여 법을 전파하던 중심지로 된 지 이제 30년이 되어 가던 시기인 동시에 도의선사가 신라에 귀국한 지 10년이 좀 지난 때이다.
그 당시 해인사는 의상계의 화엄종의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던 대사찰이었지만 홍각선사가 해인사를 찾아간 시기에는 일대를 풍미해 온 화엄종에서도 선법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선에 대해서도 융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순응화상도 억성사의 상화상上和尙으로 있었으며 동종을 주조할 때 참여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종의 경우에도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기본으로 이해하여 왔는데, 성철性徹(1912〜1993) 대선사가 나타나 돈오점수頓悟頓修는 제대로 깨달은 상태가 아니어서 선종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고 화엄교학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며 돈오돈수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라고 한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나중의 일이기는 하다.
사진 9. 홍각선사탑비의 남아 있는 부분의 탁본 부분.
이 시절에 당나라로 가서 불교를 공부한 승려들은 평균 20여 년을 중국에 머물면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여러 사찰로 고승들을 찾아 공부하였는데, 선종을 공부한 승려라고 하더라도 적지 않은 승려들이 선종을 배우기 전에 여러 사찰을 다니며 교학敎學을 공부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무것도 모르고 눈 감고 있어 봤자 망상妄想밖에 더 있겠는가.
도당 유학승과 선법의 전래
의상대사의 스승인 지엄智儼(602〜668) 화상이 화엄종을 정립할 때는 4조인 도신道信(580〜651) 선사와 5조인 홍인弘忍(601〜674) 선사가 동시에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홍인의 제자 옥천신수玉泉神秀(?〜706) 화상이 정립한 북종선은 다른 종파와도 교류를 하면서 성당盛唐시대(713〜770) 내내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북종선과 남종선을 대립적으로 나누어 신수선사와 북종선을 적대적으로 폄하하고 선종의 계보를 만들어 홍인선사로부터 법을 받은 6조는 신수화상이 아니라 혜능화상이라고 하며 대립각을 세운 것은 활달한 수완으로 정치권력과 손잡고 자파 세력을 확장해 간 하택신회荷澤神會(684〜758) 화상이 등장하면서 만들어낸 일이다. 그러면서 하택선사는 자기가 선종의 7조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신라의 신행神行(704〜779) 화상은 지공志空 선사에게서 북종선을 공부하고 돌아와 신라에 북종선을 전파하였고, 다른 한편 마하연摩訶衍(8세기 후반) 선사는 티벳지역으로 가서 북종선을 펼쳐 나갔다.
신라의 도당 유학승이 북종선과 남종선의 선법을 가져왔다고 하고, 남종선의 경우에는 홍주종洪州宗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선종과 교종을 어떻게 보았는지, 그리고 이들이 각각 특색 있는 산문을 열었는데 그 특색이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충분치 않아 정확히 그 사정을 알기가 어렵다.
사진 10. 염거화상 부도탑. 국립중앙박물관 소재.
그리고 이런 도당 유학승들은 과연 그 전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펼친 불교사상과 이론을 부정한 것인지, 아니면 이를 인정하고 깨달음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불교를 다시 설파한 것인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이후에 그 많은 유학승들이 나왔는데도 원효대사가 이룬 저술에 필적할 만한 성과를 내놓은 사람은 왜 없는지? 그러면 후대 선사들은 원효대사의 저작을 다 공부하였는지? 그리고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등등 여러 가지가 궁금하기는 하다.
신라하대에는 교학으로는 화엄학과 유식학唯識學이 우월한 가운데 율학律學도 있었고, 아비담阿毘曇(阿毘達磨, abhidharma)도 있었다. 많은 저술들이 남아 있으면 이런 의문은 가지지 않아도 좋은데,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의문은 당연히 생겨난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손가락이라는 것을 알아야 달을 바로 볼 수 있으니까. 당우들이 사라진 절터를 걷다 보니 망념妄念이라고 해도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홍각선사는 출가하기 전에 타고난 영특함으로 여러 경사經史에 능통하였다고 하는데, 지식의 면에서 보면 이때의 지식인 사이에서는 이미 유학에 관한 전적들이 상당히 통용되어 있었다. 신라에서는 이미 원성왕元聖王(785~798, 金敬信) 4년 즉 788년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과거제를 실시하여 3등급으로 관리를 선발하면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예기禮記』, 『문선文選』, 『논어論語』, 『효경孝經』, 『곡례曲禮』를 시험과목으로 하였다.
그리고 ‘오경五經’ 즉 주역周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 춘추, ‘삼사三史’ 즉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의 글에 능통한 사람은 시험 없이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이미 신문왕神文王(681~692, 金政明) 2년 즉 682년에 국학國學을 설치하고 가르쳤던 것이라 이 당시에 오면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문사철文史哲에 관한 이러한 지식은 충분히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독서삼품과를 실시하던 당시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와 외국유학생으로 대우받으며 관리가 되는 길을 더 선호하였다. 그것은 지식의 본산에 가서 직접 공부하는 것이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리라. 사정이 이러하니 홍각선사도 출가 전에는 이러한 지식에 접하여 공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지식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하여 자신이 가진 근본적인 의문을 풀 수 없었기에 출가하여 불법에 뛰어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홍각선사는 이후 다시 경남 합천에 있는 영암사靈巖寺에도 갔다가 당시 도의대사의 법을 이어 억성사에서 법을 펼치고 있는 염거화상을 찾아가서 공부하며 염거화상이 입적할 때(문성왕 6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염거화상이 입적한 후에는 【사진 10】 혜목산惠目山 고달사高達寺에 주석하고 있던 원감圓鑒대사 현욱玄昱(玄旭, 788~869, 도당 유학: 824~837) 화상을 찾아가 그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 당시에 현욱화상은 중국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의 제자인 장경회휘章敬懷暉(754~815) 선사에게서 법을 전수받고 837년 희강왕僖康王 (836~838) 2년 4월에 왕자 김의종金義琮(?~?)을 따라 귀국한 후, 이듬해 남악南岳 실상사實相寺로 들어가서 주석하다가 840년에 이 고달사로 와서 주석하고 있었다. 그 시절 당나라에서는 마조선사의 문하에는 장경회휘 이외에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 서당지장西堂智藏(735~814), 염관제안鹽官齊安(?~842), 마곡보철麻谷寶徹(?~?), 남전보원南泉普願(748~834) 등 기라성같은 선장들이 쏟아져 나와 선풍을 날리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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