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禪, 禪과 시]
풍경의 불교적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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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2 년 2 월 [통권 제106호] / / 작성일22-02-04 10:23 / 조회5,301회 / 댓글0건본문
보라, 두 눈에 비치는 저 풍경을 말 없는 곳에 근심도 없도다!
사람이 만들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에는 대자연의 신비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대구 근교에 사람이 잘 가 보지 않은 비경이 있습니다.
대구 시내에서 보면 남쪽에 앞산(658.7m)과 최정산(905m)이 보이고, 그 뒤로 비슬산(1083.4m)이 있습니다. 앞산과 비슬산은 더러 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평생을 대구에 살았지만 최정산에는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최근까지 미군 위성추적 레이다기지, 육군 미사일 기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설 보호 차원에서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습니다. 일반인 접근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대자연의 신비가 살아 있는 곳입니다.
최정산 정상 부근은 대관령처럼 수십만 평의 고위평탄면이 발달했습니다. 습지가 많아서 옛날에는 고랭지 목장이 있었습니다. 해발 700m에 있는 옛 목장 주차장까지 올라와서 차를 세우고 출발합니다.
산길에는 야자 매트가 깔려 있어서 걷기에 편안합니다. 습기가 많은 곳인지 매트는 축축하게 젖어 있는 곳이 많습니다. 곳곳에 서리가 끼어 있고 그늘진 곳에서는 살짝 언 얼음도 보였습니다. 길가에는 하얗게 빛나는 억새가 야생의 기운을 전해 줍니다. 해발 700고지에 불과하지만 저 멀리까지 확 트인 기막힌 풍경이 나타납니다.
산들이 겹겹이 겹쳐지는 풍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깊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풍경은 우리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활력을 불어넣어 삶을 활기차게 합니다. 산길을 타박타박 걸어갑니다. 억새는 곳곳에서 우리들 자신의 내면 풍경처럼 하얗게 빛이 납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말을 걸면 숨어 있던 내면의 목소리가 깨어납니다.
20분 정도 걸어가면 억새밭 조망대에 올라설 수 있습니다. 억새밭이라고는 하지만 화왕산이나 간월재처럼 와! 할 만큼은 아닙니다. 소박한 시골 처녀의 수줍은 미소처럼 최정산 억새밭은 때가 묻지 않았습니다.
억새밭 전망대를 지나 700고지에서 조금씩 위로 올라갑니다. 도중에 절반의 사람들이 다른 길로 빠졌고 나도 그 팀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이렇게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햇빛이 다르게 보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고산 습지에 조성한 누리길이라 그런지 질퍽질퍽한 곳이 이따금 나타납니다. 억새밭 전망대를 출발한 지 1시간이 훨씬 넘어 794고지 청산벌 전망대에 도착합니다. 이 전망점에서 바라보이는 고산 평탄면을 옛날에는 청산벌이라고 불렀습니다. 내려다보이는 6만 평 정도의 청산 벌 곳곳이 억새군락으로 하얗게 빛이 납니다.
청산벌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우리들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원경도 빼어납니다. 저 멀리 푸르스름하게 솟은 산봉우리는 가야산 연화봉(우두봉, 1432)인 것 같습니다.
산을 오르는 육체적 체험은 결코 낮은 단계의 경험이 아닙니다. 산을 오르면서 땀을 흘리고 한숨 돌리면서 쉬고 있을 때, 얼굴을 스치는 바람의 감촉을 느껴봅니다. 바람이 살짝만 불어와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그렇게 한숨 돌릴 때, 우리들 삶과 풍경에 깊이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풍경의 깊이라는 것도 정확하게 말하면 풍경을 바라볼 때 자기 안에 일어나는 반응의 깊이를 말합니다. 우리들의 희미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해상도 높은 풍경을 찾아 밀푀유처럼 수천 겹으로 켜켜이 쌓인 불교문화 속으로 걸어가 보겠습니다.
『무문관』(주1)을 쓴 무문혜개 선사(1183~1260)는 『무문관』 제19칙에 이런 게송을 남겼습니다.
“봄에는 온갖 꽃이 피어나고 가을이면 달이 비치며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니 만일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세계의 호시절이다.”(주2)
봄, 여름, 가을, 겨울, 대자연에는 아름다움이 흘러넘치지만 우리들은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맛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아서 눈앞에 별세계를 두고도 마음은 다른 곳에서 헤매곤 합니다. 혜개의 말대로 인간은 망상(생각)에 빠져 있지 않으면 본질의 세계를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선종의 3대 조사인 승찬(?~606)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가려서 선택하는 것을 멀리하면 된다. 다만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버리면 툭 터져 저절로 명백해질 것이다.”(주3)
도는 무심의 경지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참모습입니다. 망상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의 방황을 없애는 것입니다. 만약 망상을 없앨 수 있다면 우리는 곧바로 깨달음에 이르고 별세계에 들어가게 된다고 7세기에 승찬이 말하고, 13세기에 혜개가 다시 게송으로 거듭 말해 줍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임진왜란 당시에 72세로 승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은 16세기 말에 일선암一禪庵 벽에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산은 스스로 무심히 푸르고
구름은 스스로 무심히 희어라.
그 가운데 스님 한 사람
이 또한 무심한 나그네로세.”(주4)
산은 절로 푸르고, 구름은 절로 희다, 그 속에 사는 사람, 그도 역시 무심한 나그네라 했습니다. 사실 인생은 누구나 덧없는 나그네입니다. 무심히 구름처럼 왔다 갔다 하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무심이란 일체의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에 이르면 생각이 사라지고 느낌이 사라집니다. 단순히 존재함만 남은 상태, 아무 욕심도 없고 의도도 없는 순수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의식의 상태이자 긴장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9세기의 유명한 선승 의현(?∼867)은 “한 개 마음이 없다면 어디서든지 모두 해탈이다.”(주5)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무심할 수 있다면 어디에 있든지 해탈한 상태라는 말은 그만큼 무심하기 어렵다는 뜻도 있는 줄 압니다.
18세기 일본의 하쿠인(1686~1763)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수천 봉우리에 비 걷히니 영롱히 이슬 빛나네.
보라, 두 눈에 비치는 저 풍경을
말 없는 곳에 근심도 없도다.”(주6)
우리가 언어를 갖고 있는 한, 있는 그대로의 자연으로부터는 소외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언어의 의미 체계 너머에 있는 것을 직접 접촉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숙명입니다.
우리가 오직 두 눈에 비치는 풍경을 아무런 언어도 없이 바라볼 수만 있다면 모든 환상이 사라집니다.
거짓된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무심하게, 어떤 언어도 없이 ‘풍경 자체’를 경험하는 것, 이것은 불교의 관점에 근접한 관점입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이, 아무런 언어도 없이 바라볼 때 나타나는 해상도가 높은 선명한 풍경과 연결될 때 우리는 살아있음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얼굴은 저절로 빛이 납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각 경험 이면에 자리 잡은 언어와 배경 지식을 모두 벗겨내는 일이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요?
돌이켜보건대 종교야말로 가장 깊은 정신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에 불교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는 어느 정도의 정신적 깊이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똑같은 길이지만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길과는 맛이 다릅니다. 산비탈을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심리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것과 같습니다. 억새는 여전히 빛나고 풍경은 더욱 내면으로 파고듭니다. 아직은 야생을 간직하고 있는 최정산의 비경이 우리들 영혼에 이야기를 겁니다. “너는 누구냐?” 작은 목소리가 끊임없이 늙은 우리들 가슴속에 메아리칩니다. 주차장에 서 있는 겨울나무가 노년기에 접어든 우리들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수많은 잔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일제히 손을 뻗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용케도 살아 있구나, 싶어서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주>
(주1) 혜개가 46세(1228년) 때 동가東嘉의 용상사에서 선객들에게 강의하고, 집성해 모은 것이 『무문관無門關』이다. 혜개는 옛 선인의 공안 48칙을 선별해 본칙과 혜개 자신의 수행 체험을 바탕으로 48개 화두에 평창評昌과 송을 붙였다.
(주2) 『무문관無門關』, 第十九則 平常是道, “頌曰 :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주3) 『信心銘』,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주4) 『淸虛堂集』, 題一禪庵壁, “山自無心碧 雲自無心白 其中一上人 亦是無心客.”
(주5) 『臨濟錄』, “一心旣無, 隨處解脫.”
(주6) 白隠, 『槐安國語』, “千峰雨霽露光冷 君看双眼色 不語似無憂.” 上句는 大燈國師の漢詩이며 下句는 白隠禪師가 덧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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