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선과 교를 겸하신 혼해강백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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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2 년 1 월 [통권 제105호] / / 작성일22-01-05 10:52 / 조회4,773회 / 댓글0건본문
은암당 고우스님의 수행 이야기③
고우스님은 1963년에 도반 도윤스님과 함께 정화 이후 용주사 주지로 가신 관응스님을 따라 가서 『대승기신론』을 공부했다. 당시 절의 수행 환경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궁핍하였다. 그렇지만, 대강백 관응스님의 청산유수와 같은 강설 덕분에 공부 열기는 뜨거웠다.
어려운 여건에서 용주사 강원에서 공부하다
고우스님은 불치병에 걸리고 어머님이 갑자기 돌아가시어 방황하던 중 삶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출가하였다. 이때 강원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접하고 제대로 공부하면서 재미를 느끼고 삶의 의욕이 생기게 되어 먹던 약을 버렸지만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었다.
특히 용주사 강원 시절에는 은사스님의 학비 후원이 끊겨 형편이 아주 어려웠다. 그 흔한 고무신 살 돈이 없어서 구멍 난 흰 고무신을 신고다녔다. 비가 올 때면 물구덩이를 피해 돌 위를 밟고 다녔다. 하지만, 절에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공부까지 가르쳐 주니 더 부족한 것도 바랄 것도 없었다.
월정사 탄허스님의 명강을 듣다
용주사 강원에서 공부를 하던 중 월정사 정화가 일어났다. 오대산 월정사는 폐사 직전에 지암 이종욱 스님에 의해 안정되고 재건되었다. 지암스님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월정사에서 한암스님을 조실로 모셨고, 31본산 주지 대표가 되어 당시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를 건립하고 조선불교 조계종을 재건하였다. 지암스님은 불교사의 굵직한 업적과 광복 후 국회의원이 되어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에서 불교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하였지만 대처승이라는 허물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재건된 조계종 종정을 지낸 한암스님의 제자 탄허스님은 젊어서부터 대강백으로 이름이 높았다.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하고 난 뒤 월정사에서 대처승들을 정화하려 하였으나 지암문도의 세력도 상당하여 일진일퇴를 하고 있었다. 1964년 무렵 탄허스님 쪽에서 전국 사찰과 강원에 월정사를 정화하니 와서 정화불사를 도와달라는 사발통문을 보냈다.
당시 서울 총무원에서는 승려 교육을 목적으로 종립 동국대에 입학시키기 위해 종비생을 선발하였는데, 종비생 1기에 법주사 월탄스님 등이 있었다. 종비생 스님들을 비롯하여 전국 강원에서 오대산 정화를 지원하려 모였는데, 젊은 고우스님은 용주사 강원에서 다섯 명을 인솔하여 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화하면 대처승을 절 밖으로 내쫓는 것이니 분위기는 싸움터 같았지만, 탄허스님은 대강백답게 정화의 와중에 10일 동안 『장자』 「재물론」 특강을 하셨다. 정화를 도우려 전국에서 온 강원 학인들은 탄허스님 강의에 관심이 높았고 좋아했다. 불과 열흘 밖에 안 되는 강의였지만, 책을 구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 탄허스님은 칠판에 『장자』 「재물론」을 한 구절 쓰시고 강의하고 지우고 다시 쓰고 하며, 그것을 다 외워 강의를 하셨다. 글씨도 명필에 워낙 박학다식하고 설법도 유창하여 공부 열기가 대단했다. 어떤 스님이 “어쩌면 그렇게 머리가 좋으시냐?”고 탄허스님께 물으니. 스님 말씀이 “어떤 글을 보더라도 300번은 봐야 한다.”고 답하셨다. 탄허스님 공부하는 방식이 그러셨다.
그 당시 고우스님이 놀랐던 일화가 있다. 월정사 산내 암자 육수암 비구니 스님도 그 강석 맨 뒤에 앉아서 강의를 들었는데 「재물론」을 다 외우고 있었다. 탄허스님이 칠판에 다다닥 쓰면 동시에 그 비구니 스님이 똑같이 읊조리고 있었다. 탄허스님도 대단했지만 그 비구니스님에게 더 놀라웠다. 나중에 그 스님은 환속했다고 들었다.
선과 교를 겸하신 혼해스님을 만나 선禪에 발심하다
고우스님은 1965년에 상주 남장사로 가서 혼해混海스님께 강원 사교(四敎, 『금강경』, 『원각 경』, 『대승기신론』, 『능엄경』)과정을 배웠다. 혼해 스님은 삼척 천은사로 출가해서 금강산에서
경을 본 뒤 대승사, 도리사, 직지사, 해인사 선원에서 정진한 분으로 1950년 인민군이 쳐들어왔을 때 해인사 주지를 하셨다. 흔히 스님들은 경전을 강설하면 강사, 선원에서 참선하면 선사라 하고 주지를 맡아 소임을 살면 사판이라 한다. 혼해스님은 강사, 선사, 그리고 해인사 주지까지 특이한 이력을 가진 분이었다.
상주 남장사에서 혼해스님께 『금강경』을 일대일 독강으로 배웠다. 혼해스님은 그동안 강백으로 이름이 높았던 고봉, 관응, 탄허스님들께 배운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강을 하셨다. 모든 강을 선禪 문답식으로 하였다. 가령 『금강경』을 배울 때 첫 머리에 “부처님께서 공양 때가 되어 사위성으로 가서 일곱 집을 차례로 걸식하시어 본래 자리로 돌아와 공양을 마친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았다”고 첫 대목을 읽으시고는 “부처님이 이 걸식하여 본래 자리로 돌아온 행으로 모든 법문을 설해 마쳤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하고 학인인 고우스님께 물었다. 그동안 배운 강사스님들이 모두 일방적인 강의였는데, 혼해스님은 토론식, 문답식으로 강을 하셨다. 차원이 달랐던 혼해스님에게서의 배움은 고우스님을 선에 발심케 하였다. 스님께서 늘 “내가 이렇게라도 경전과 조사어록을 보는 것이 다 혼해스님의 영향이다. 특히 혼해스님의 『금강경』 강은 너무나 좋았다. 선에 눈을 뜨게 해주셨다. 참선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혼해스님은 오랫동안 경전을 공부하셨고, 또 참선도 해서 체험도 깊으니 교와 선을 두루 한 그런 깊이가 나왔다. 상주 남장사 강원에서 혼해스님께 그렇게 독강으로 사교를 배울 때 아랫반에 지금 공주 학림사 대원스님과 구미 금강사 정우스님이 후배로 들어와서 사집을 보았다.
그런데 이 혼해스님이 참 재미있는 분이었다. 절에 들어오는 사탕이나 떡 같은 것을 말려 차곡차곡 모아서 고우스님에게 주소를 주면서 부치라 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님 나이 70세에 애를 낳았는데 그 집으로 보낸 것이었다. 당시에는 참 이해하기가 어려운 행이었다.
혼해스님은 6·25 전쟁 중에 함양 읍내 작은 사찰로 피난 갔는데, 절 공양주가 전라도에서 피난 온 20대 여인이었다. 본래 호남 갑부집 딸로 동경 제대를 나와 교감을 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는데, 남편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경찰에 잡히자 시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함양 절로 피신해 온 것이었다. 그런 공양주와 인연이 되어 혼해스님은 칠십에 아이가 생긴 것이다. 그 뒤 혼해스님은 쌀 30가마니 돈을 주어 감옥살이하는 남편을 구하게 하여 석방이 되자 그이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그런데 5·16 정변이나 사상범 재검거령으로 남편이 다시 감옥에 끌려가자 그 여인은 다시 함양으로 와서 살았다. 그렇게 혼해스님은 기구한 인연의 여인과 아들을 끝까지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젊은 학인 고우스님의 눈에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엄경』을 배우려 명봉사로 가다
1966년에 혼해스님은 유일한 상좌였던 해인사 송월淞月스님이 예천 명봉사 주지가 되자 명봉사로 가셨다. 혼해스님께 강원 사교과 공부를 마친 고우스님은 대교과 『화엄경』 공부를 하려고 혼해스님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절 살림도 어려웠지만, 경전 구하기는 더 어려웠다. 특히 『화엄경』은 60권, 80권이니 더 귀했다. 혼해스님은 경을 구해 놓으라 하시고는 출타를 하셨다. 고우스님은 경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니 대승사에 『화엄경』이 있어 대승사로 가서 경을 가져와 한 달이나 기다렸는데도 혼해스님이 오지 않았다.
그때 고우스님은 『금강경』을 공부한 뒤라 참선을 해보고 싶은 발심發心이 나서 선원으로 갈까 계속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참선하고 싶은 마음으로 명봉사를 떠나 향곡스님이 계시는 기장 묘관음사 선방으로 갔다.
그 뒤에 혼해스님이 범어사 강사로 가시어 선원에 있는 고우스님한테 범어사로 오라고 편지가 왔지만, 이미 참선에 발심해서 공부하고 있었으니 다시 강원으로 가지 않고 평생 선의 길을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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