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30대에 만난 선지식 지월스님과 서암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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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2 년 4 월 [통권 제108호] / / 작성일22-04-04 11:58 / 조회5,857회 / 댓글0건본문
은암당 고우스님의 수행 이야기⑥
고우스님은 첫 안거를 1965년 묘관음사 길상선원에서 정진한 뒤 1966년 여름 안거는 설악산 백담사에서 정진하였다. 그 뒤 설악산이 좋아 오세암에 선원을 복원하고 정진하려고 했지만 불의의 사건으로 중단하고는 다시 묘관음사로 돌아가 동안거를 지내게 되었다.
1966년 다시 묘관음사에서 정진하다
당시 묘관음사에는 참선하려는 이들이 많았으나 선방이 좁아 비구승들은 보살님들과 큰방에서 정진하고 비구니 스님들은 토굴에서 따로 정진을 했다. 그러다 납월팔일臘月八日(음력 12월 8일 부처님이 깨친 성도절)에는 용맹정진을 했는데, 그때는 큰방에서 비구·비구니·보살들이 함께 중좌까지 치고 앉아 철야정진을 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공부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다.
그때 묘관음사에는 혜암스님, 진제스님, 활안스님, 기성스님, 현기스님 등이 같이 정진했다. 혜암慧庵 (1920~2001) 스님은 “공부하다 죽어라!” 하는 말씀처럼 오직 공부만 생각하신 수행자였다. 훗날 해인사 원당암에서 재가선원을 열어 선풍을 일으켰고, 해인총림 방장과 조계종 종정에 추대된 구참 수좌였다.

활안活眼(1926~2019) 스님은 뒷날 송광사 천자암에 주석하시다가 종단 원로의원으로 추대된 역시 구참 수좌였고, 고우스님과는 김천 수도암 행자시절부터 인연이 있어 여러 철 안거를 같이 보내며 각별하게 지냈다. 수도암에서 안거를 날 때 활안스님이 입승을 맡아 죽비를 잡았다. 지금 지리산 상무주암에 주석하는 현기스님도 함께 있었는데, 향곡스님 상좌라서 묘관음사 원주나 공양주를 하면서 선방에서 정진하였다. 현기스님은 일하는 것도 좋아해서 농사일을 잘 했고, 쌀 한 가마니를 가볍게 들만큼 기운도 장사였다.
비구니 수좌 중에는 ‘생불生佛’이라 존경받았던 경주 흥륜사 천경림선원 혜해慧海(1921~2020) 스님이 향곡스님을 따르며 정진을 열심히 잘 했다. 향곡스님은 법문하실 때 “혜해가 반쯤 눈이 열렸다.” 하시며 혜해스님 공부를 칭찬하고 격려해 주었다.

고우스님은 묘관음사 안거 때 문서 수발과 기록을 담당하는 서기書記 소임을 봤다. 향곡 조실스님이 편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때 서기인 고우스님을 불러 쓰게 하였다. 고우스님은 강원을 나와 한문을 이해하고 글씨도 반듯해서 조실스님이 좋아하셨다.
그렇지만 고우스님은 향곡 조실스님에 대한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향곡스님은 전법傳法 인가 받은 도인으로 고준한 선禪 법문을 잘 하셨지만 너무 엄하시고 어려웠다. 하루는 선원 대중이 운력으로 선방에 도배를 새로 한 적이 있었다. 출타하셨던 조실스님이 돌아오셔서 촛불을 가져다 비추며 자세히 살펴보시더니 도배지 무늬가 약간 어긋난 것을 발견하시고는 뜯어내고 다시 도배를 하라고 하셨다. 당시 고우스님은 그런 조실스님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지월스님께 수행자의 자세를 배우다
묘관음사에서 정진할 때 ‘하심下心 도인’이라 불리던 해인사 지월指月(1911~1973) 스님이 오셨다. 지월스님은 오대산 월정사 지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한암스님께 공부한 뒤 전쟁 때 피난하여 해인사에서 정진한 수좌였다. 지월스님은 후배 스님은 물론 신도와 행자도 존중하여 도량에서 지나가다 만나도 먼저 허리를 숙여 합장하고 항상 존댓말로 대하신 하심下心 도인이었다.

고우스님은 지월스님의 명성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터라 존경하는 마음으로 지월스님께 인사드리니, “향곡스님처럼 복수용福受用하지 말라.”고 하셨다. ‘복수용’의 뜻을 몰라 다시 여쭈니, “출가 수행자가 대중과 달리 특별하고 값진 것들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늘 공심으로 승가 공동체 정신으로 살라는 이 말씀이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고우스님은 그때부터 부처님 가르침대로 지월스님을 상대할 때 존중하는 마음과 언행일치 정신을 행하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평생 출가 수행자로서의 지침이 되었다.
문경 운달산 김용사와 금선대에 가다
1966년 가을에서 67년 봄 사이 어느 때에 고우스님은 문경 운달산 김용사 금선대로 갔다. 지금 범어사 총림의 방장을 맡고 계시는 지유스님과 함께 서암스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때 성철스님은 김용사에 계시다가 막 해인사 백련암으로 가셨을 때라 만나지 못했다. 성철스님은 팔공산 성전암에서 10년 동구불출을 끝내고 1965년 4월에 운달산 김용사로 와서 첫 대중 설법인 운달산 법문(제1차 백일법문이라고도 한다)을 하셨다. 또 찾아온 수좌들과 불자 대학생들에게 3천배와 용맹정진을 시키며 참선을 지도했는데, 김용사 도량이 좁아서 봉암사로 가서 결사를 이어서 계속 하려고 했다. 그때 마침 해인사 자운스님과 영암스님이 해인사로 오시라고 하여 1966년 10월에 해인사 백련암으로 가신 뒤였다.

고우스님이 서암스님을 만난 운달산 김용사 금선대金仙臺는 김용사 큰절에서 한 시간여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 암자인데, 신라시대에 세워진 유서 깊은 수행처였다. 백두대간의 자락인 운달산은 해발 1천 미터나 되는데, 그 8부 능선에 동남향으로 시원한 전망을 가진 빼어난 수행처로 수 없이 많은 수행자들이 거쳐 간 곳이다. 현대에는 조계종 종정에 추대된 서옹스님, 성철스님, 법전스님이 수행한 도량이다.
서암西庵(1917~2003) 스님은 예천 서악사에서 출가하여 1938년 문경 김용사 강원을 수료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서 일본대학 종교학과에서 공부하다가 1940년에 폐결핵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42년 김용사 선원에서 참선을 시작한 이래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던 중 병에서 회복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문경 대승사 선원에서 청담, 성철 스님과 정진하다 해방을 맞았다.

1945년 광복 뒤에는 예천포교당에서 불교청년운동을 했으며, 1946년 계룡산 나한굴에서 용맹정진하여 본무생사本無生死의 도리를 깨달으니 당시 나이 30세 때였다. 전쟁이 나고는 1952년부터 문경 청화산 원적사로 가서 수행하다가 종단 정화운동에 참여하여 경북 종무원장을 지냈다. 이후에도 본분사에 정진하여 1966년에는 도반인 정영스님이 도봉산 천축사에 무문관無門關을 세우자 부처님의 6년 고행 수도를 따라 ‘무문관 6년 결사’에 동참하였다가 1년이 지나 운달산 금선대로 와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우스님은 서암스님을 찾아가 뵈었다.
생활 속에서 수행하신 서암스님
그때 고우스님 나이 30세였고, 서암스님은 50세였다. 서암스님이 나이는 스무살 위였지만 고우스님과 공통점이 참 많았다. 폐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같았고, 일본에서 생활한 경험도 그랬다. 그렇게 금선대에서 서암스님을 만난 이래 고우스님은 서암스님을 모시고 따랐다.

서암스님은 언행이 일치하는 선지식이었다. 현대교육을 받아 현대적인 언어 감각이 있으셨고, 생활에서 수행하고 생활법문을 주로 하셨는데 그것도 고우스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서암스님은 따로 법문을 하지 않고 농사짓고, 밥하고, 바느질하면서 하는 공부를 가르치셨다. 한마디로 이신작칙以身作則하였다. 생활에서 공부하는 법을 말이 아니라 몸소 행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고우스님은 늘 서암스님이 행하신 생활에서 공부하는 가풍이 사라져 버렸다고 이것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서암스님은 밥하고 반찬 만드는 일을 그렇게 잘 하셨다고 한다. 그땐 불을 때서 밥을 지을 때이니 밥을 잘못하면 먹지 못했다. 고우스님이 밥을 잘 못하니 당신이 밥 짓는 전문가라며 손수 밥을 하셨다. 아마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혼자 자취생활을 많이 하셔서 그런 것 같다고 하셨다. 또 평소 농담도 잘 하시어 늘 재미있고 유쾌했다. 서암스님은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나 나는 고우스님께 하대하지 않았다. 고우스님은 그런 서암스님의 모든 것이 좋았고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며 은사처럼 따르게 되었다.

금선대에서 서암스님을 만난 이래 고우스님은 안거 때에는 묘관음사 선방에서 결제 정진하고 산철이 되면 금선대로 와서 서암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다. 어디를 가도 같이 따라 가고 그렇게 서로 많이 의지하며 살았다고 노년에 회고하셨다. 그래서 다른 스님들은 고우스님이 서암스님 상좌인 줄 알았다. 그렇지만, 고우스님께서는 스승과 상좌 이상의 관계였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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