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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청암사 강원과 정화, 그리고 도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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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1 년 12 월 [통권 제104호]  /     /  작성일21-12-03 09:39  /   조회5,07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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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암당 고우스님의 수행 이야기②

 

출가한 다음 해인 1962년, 스물여 섯의 고우스님은 청암사로 내려가 강원 공부를 시작했다. 수도암 바로 아래 큰절 청암사에는 일제강점기까지도 학인이 수십 명이 되는 큰 강원 이 있었지만, 스님이 출가할 무렵에는 대처승들이 주지하면서 강원이 없었다. 본사인 직지사 스님들의 뜻으로 범어사 고봉스님을 강주로 초빙하여 청암사 극락전에 강원이 다시 열렸다. 

 

청암사에서 고봉스님께 강원 공부를 시작하다

 

강주로 초빙된 고봉高峰(1900-1968) 스님은 선과 교를 겸하신 강백이었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켜 용맹정진한 대선지식 용성스님 문하에 출가한다. 고봉스님은 용성스님을 따라 도봉산 망월사 선원에서 만일 수선결사에 참여하였고,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 선원을 거쳐 석왕사 선원에서 공부의 안목이 열렸다. 해인사 퇴설선원에서 정진할 때 우연히 화봉유엽 화상의 권유로 해인사 고경 강백 문하에서 불경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법주사, 범어사, 통도사, 유점사 강원을 두루 다니며 수학하였고, 서울 개운사 강원에서 석전한영 대강백에게 경안經眼을 인정받아 전강 제자가 되었다. 고봉스님은 선맥으로는 용성스님, 강맥으로는 한영스님의 맥을 이어 선과 교를 겸수한 대강백이 되었다.

 

 

 

사진 1. 1966년 청암사 강원. 가운데 앉아 있는 스님이 고봉스님. 뒤쪽에 고산스님과 종하스님이 함께하셨다. 

 

 

고봉스님이 강주로 강원이 열릴 당시 청암사는 대처승들이 주지하면서 절을 운영하고 있었다. 개울 건너 암자 같은 극락전에 학인 7~8인의 작은 강원이 만들어졌다. 강주 고봉스님이 조실, 설법 잘하시기로 유명했던 우룡스님이 주지, 쌍계사 방장으로 총무원장과 전계대화상을 역임하셨던 고산스님이 총무를 맡았고, 고우스님은 학인으로 공부하며 재무를 맡다 교무를 하기도 했다.

 

강주 고봉스님은 아주 엄하시고 철저한 분이었다. 사찰이나 종단 소임은 일절 맡지 않고 수행과 전법의 본분사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언제나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 참선, 간경, 강의를 일과로 하였다. 고봉스님은 고산, 우룡스님에게 강맥을 전하는 전강식傳講式을 청암사에서 했는데, 그때 고우스님이 교무로 사회를 봤다.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의 출범과 정화의 확산 

 

1962년은 한국불교사에서 매우 뜻깊은 해이다.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한 해이다. 한국불교는 삼국시대에 전래 되어 170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강점과 정책으로 한국불교의 전통이 훼손되고 지계정신이 무너지면서 대처승이라는 일본불교의 폐풍이 유입되었다. 용성스님은 총독부에 대처승 제도가 불교를 망친다고 대처승 철폐를 요구하기도 했다. 전통을 곧게 지키던 선승禪僧들은 총독부의 사찰령寺刹令에서 벗어나려고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禪學院을 건립하여 자치적인 거점을 마련하였다. 청담스님과 운허스님 같은 분들은 일제강점기에도 정화운동을 도모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성철스님과 속리산 복천암, 문경 대승사 선원에서 일제 패망 이후 정화운동을 준비하였다.

 

광복 뒤 청담스님, 경봉스님, 석주스님 등은 선학원을 근거로 교단 개혁을 추진하여 해인사에 총림을 지정하는 등 제도 개선의 노력을 하였으나 좌우 이념 대립과 남북 분단, 그리고 교단 안의 대처승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1947년에 성철, 자운, 보문, 우봉 등 선승들이 구산선문 전통의 희양산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로 결사를 시작, 승가 안으로부터의 정화운동을 시작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질 무렵 봉암사 결사가 중단되었고, 전쟁과 농지개혁의 여파로 사찰의 대처승 주지들은 가족 부양 때문에 선원 수좌들에게 양식을 대주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1954년 비구 선승들은 불교의 수행 전통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며 선학원에 모여 승단의 대처승 정화운동을 결의하였다. 일제 식민지 잔재인 대처승들이 교단과 사찰을 장악하고 수행과 전법을 위한 삼보정재를 사유화하니 불교의 심각한 위기였다. 1954년부터 선학원에 모인 비구승들은 “불법에 대처帶妻는 없다”는 기치로 대처승들을 교단과 사찰 밖으로 나가기를 촉구하고 조계사 대웅전에서 철야기도에 들어갔다. 선학원을 거점으로 효봉, 동산, 금오, 청담스님 등이 중심이 되었다. 전국 주요 사찰은 이 정화 문제로 비구와 대처 측의 치열한 대치가 벌어지고 급기야 세속 법정에서 재판까지 벌어졌다. 이 문제는 큰 사회 문제까지 되어 1962년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문교부가 적극 개입하여 비구승과 대처승의 화합을 종용하여 마침내 비구승 중심의 통합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청암사 정화와 갈등, 그리고 도피

 

비구승 중심으로 조계종단이 출범하자 산중 사찰에도 정화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청암사 큰절을 장악하고 있던 대처 측과 개울 건너 극락전 강원의 비구 측이 정화로 시비하던 중 멱살잡이와 주먹다짐이 일어나 양쪽이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인원은 7~8명으로 양쪽이 비슷하였으나 비구 측은 20대 학인이 었고, 대처 측은 결혼한 파계승들이었다. 대처 측이 먼저 고소하자 비구 측도 맞고소하여 다음 날 양쪽이 다 지서에 가게 되었다. 그때 고우스님은 발목이 접질려 걸을 수가 없었다. 지서에서 대처 측이 이빨이 부러지고 많이 다쳤다고 하자 우리 쪽에서는 고우스님이 아주 심하게 다쳐 걸을 수도 없어 못 왔다고 한 모양이다. 지서에 가 보니 사태가 좀 심각하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고산스님이 주재하는 대책회의에서 고우스님을 비롯해 세 사람이 주모자로 책임을 지기로 했다. 

 

 


사진 2. 입적 4개월 전에 마지막으로 참배한 청암사. 학장 지형스님이 고우스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는 군인들이 정권을 잡아 사회 기강을 잡는다고 깡패 단속이 아주 심할 때였다. 경찰은 깡패나 부랑자들을 잡아다 반쯤 죽도록 패고는 제주도로 끌고 가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당시는 인권이고 민권 같은 게 없었다. 이대로 잡혀가면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책임지기로 한 세 사람이 도망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고우스님과 해인사 율주를 지낸 종진宗眞 스님, 수좌 기성寄星 스님은 수도암으로 올라가 수도산을 넘어서 도망을 갔다.

 

한겨울에 홑옷에 흰 고무신을 신고 수도산을 넘어 도피한 곳이 영주 부석사였다. 그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부석사에 잘 도착했다고 띄운 편지에 고산스님은 경북 도내에 지명 수배가 떨어졌으니 도를 벗어나라고 답신을 보내왔다. 그래서 영주 부석사보다 더 깊은 봉화 문수산 축서사로 갔다. 당시 비탈의 암자였던 축서사에 가보니 노스님 한 분이 반겨 주시어 머물게 되었다. 고우스님은 뜻밖의 정화사태로 산중 깊은 곳으로 도피하며 봉화와 첫 인연을 맺게 되었고, 후일 축서사 주지도 지내고, 각화사 동암, 서암을 오가며 머물다 마침내 70대에 금봉암을 창건하여 주석하게 된다.

 

관응스님에게 『대승기신론』을 배우다

 

고우스님은 축서사에 도피해 있던 중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면령이 내리고 수배가 풀려 다시 청암사로 돌아와 강원에서 고봉스님께 『금강경』을 배웠다. 나이가 많고 한자를 좀 안다고 월반을 하기도 했다. 그 뒤 직지사 강원으로 가서 관응스님에게 『대승기신론』을 배웠다. 당시에는 강원 교과라도 이름난 강사스님이 있으면 찾아가서 배우는 풍습이 남아 있던 때였다. 지금은 아쉽게도 그런 게 다 없어졌다.

 


사진 3. 관응스님 진영. 김호석 화백이 그린 작품. 

 


관응觀應(1910-2004) 스님은 상주에서 태어나 남장사에서 탄옹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금강산 유점사 강원을 마치고 설호 강백에게 전강을 받은 분이었다.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를 다니다 일본 류코쿠대학에 유학도 하였다. 그 뒤 유점사, 월정사, 김용사 강원을 거쳐 직지사 강원에서 명강의로 이름이 높았다.

고우스님은 청암사와 직지사 강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대승기신론』을 공부하던 중 관응스님이 1963년에 용주사 주지로 가시자 스님도 따라서 용주사로 가서 본격적인 불교 공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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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20여 년간 종무원 생활을 하다가 고우 스님을 만나 성철스님 『백일법문』을 통독하고 불교의 핵심인 중도에 눈을 뜬 뒤 화두를 체험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불교인재원에서 생활참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유튜브 생활참선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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