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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자국사와 문화전통에 대한 주체적 인식으로 실학자가 쓴 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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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1 년 10 월 [통권 제102호]  /     /  작성일21-10-05 11:34  /   조회4,84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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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사서史書 10 / 『해동역사海東繹史』 「석지釋志」①

 

 

『해동역사海東繹史』는 한치윤韓致奫(1765~1814)이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세기世紀·지志·고考의 기전체로 서술한 역사서이다. 전체 8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32권 「석지釋志」는 중국과 일본의 서적에 수록된 우리나라의 불교 기사를 석교釋敎·사찰寺刹·명승名僧으로 분류하여 재구성했다. 불교 기사의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중국과 일본의 서적에 수록되어 있는 우리나라 불교 기사와 한치윤과 그의 조카 한진서의 안설案說이다. ‘안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이다.

 

‘석교’조는 우리나라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불교사를 개관했다. 그러나 전체 분량에서 고대 불교는 삼국의 불교 전래만을 수록했고, 대부분의 내용이 고려 불교에 집중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불교 기사는 1581년(선조 14) 조선이 명明에 “존천尊天 24신身, 아라한阿羅漢 108신을 올려 천불사千佛寺에 바쳤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삼국의 불교 전래는 『일본기日本紀』와 『후주서後周書』 등의 내용을 강綱으로 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목目에 두어 단편적인 불교 전래 기사를 보완하는 형식을 취했다. 고려 불교는 국사國師·왕사王師 등 승직僧職과 그에 따른 복색服色의 구분, 불상과 의식구儀式俱, 송宋과 요遼의 대장경 하사 등의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반면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소개가 단 1건에 불과한 것은 조선의 불교 탄압이 일차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아울러 명나라의 불교가 쇠퇴기를 맞이하였고, 불교에 대한 국가적 통제와 배불론排佛論 등으로 그 내용이 소략한 것과 관계가 깊다.

 

 

 

사진1. 『해동역사』

 

 

 

‘사찰’조는 전체 28개의 사찰을 수록했는데, 시대별 분포는 통일신라 1, 고려 26, 조선 1개 사찰로 구성되어 있다. 사찰은 연혁부터 관련 설화와 편찬자 한치윤의 답사를 통한 고증 등에 관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내용의 출처가 대부분 중국의 역사서인 까닭에 고려가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의 예를 표시하는 부분이 나타나기도 한다.

 

‘명승名僧’조는 고대에서 조선까지 전체 68명의 승려를 수록하고 있다. 시대별 분포는 조선의 승려가 2명에 불과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대의 승려가 50여 명이나 차지하고 있다. 명승조에서 주목할 것은 중국의 불서佛書인 『전등록傳燈錄』에 수록되어 있는 우리나라 스님들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도의道義와 무염無染·품일선사品日禪師와 같이 신라 말의 선종 개창조와 도선道詵·의천義天과 같은 고려의 대표적인 스님들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 병자病者를 구해 준 신라의 무명승無名僧과 중국에서 활동했지만 행적을 알 수 없는 스님들을 소개했는데, 『원시선元詩選』·『열조시집列朝詩集』과 같은 중국의 시집에서 이들과 관련된 시를 찾아내 그 행적의 실마리라도 제공하고 있다.

「석지釋志」는 한치윤의 사론史論이기도 한 ‘안설按說’ 17개와 조카 한진서의 ‘근안謹按’ 2개가 있다. ‘안설’은 소략한 본문을 보완해 주는 역할뿐만 아니라 내용상의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았다.

 

a.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태조太祖가 안화선원安和禪院을 지어 대광大匡 왕신王信의 원당願堂으로 삼았고, 예종睿宗이 이를 중수하여 안화사安和寺로 만들었으니, 대개 안화사는 비록 태조 때 처음으로 지어졌으나, 안화사로 이름 지어진 것은 실로 예종 때에 비롯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보면, “안화사는 송악松嶽의 자하동紫霞洞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는, “절에 대송大宋 황제가 ‘신한문宸翰門’이라고 친히 편액扁額을 쓴 다음 채경蔡京에게 명해 문에 걸게 한 것이 있으며, 단청이나 지은 모양새가 아주 교묘하여 우리나라에서 으뜸간다.”라고 하였으니,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이른바, “절의 편액은 바로 태사太師 채경蔡京이 쓴 것이며, 신한문宸翰門과 능인전能仁殿이라고 쓴 두 편액은 금상今上 황제의 어서御書이다.”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b. 만력 9년에 고려에서 (살펴보건대, 고려는 마땅히 조선으로 해야 한다) 존천尊天 24신, 아라한 108신을 올렸는데 모습이 아주 이상하였다.

 

인용문은 『고려도경』에 수록된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에 대한 기사를 우리나라 기록인 『고려사』·『동국여지승람』을 통해 보완하였고, 조선을 고려로 표기한 『춘명몽여록春明夢餘錄』의 기록을 지적하고 바로잡았다. 「석지」가 『고려도경』의 기록을 중심으로 편찬된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문헌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치윤이 중국의 문헌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진2. 『해동역사』 권제1 「세기世紀」 부분 

 

 

한편 한치윤과 같은 실학자가 역사서에 불교 관련 기록을 수록한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석지」의 편찬은 왜란과 호란 이후 대외 인식의 변화와 자국사에 대한 자주적 인식의 강조 아래 진행되었던 당시 실학자들의 역사 편찬이나 그 인식과도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불교사  편찬은 불교사 자체에 대한 관심과 함께 당시 시대적 문제와 결부된 몇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첫째, 대중국관이나 화이론華夷論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자국사에 대한 주체적 이해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우선 광범위한 사료 수집을 강조했고, 철저한 고거주의考據主義를 근거로 역사를 서술하기도 했다. 우선 조선 후기는 대외 인식으로 인한 역사의식의 변화가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대외 인식은 주자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화이론으로 명나라 때까지는 화명華明·모화慕華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7세기 명·청 교체는 전통적인 화이관과 국제 질서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후기 대중국관으로 인한 역사인식의 변화는 전통적인 존명중화의식尊明中華意識에 빠져 있던 조선인에게 충격을 주었고, 신왕조에 대한 반동적인 역작용이 여러 면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반청反靑 감정이 한편으로는 명에 대한 문화사대적 사상을 강조하였고, 한편으로는 명에 밀접히 연계되어 있던 자기 전통과 자기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화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과거의 중화가 될 수 없다는 사상이 중국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한국사의 주체적 체계화의 작업이 적극 활발하게 되었고, 그것이 정통론이라는 형식을 밟아 표출되었던 것이다.

 

둘째, 기존 역사서에 대한 불신이 강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역사서 편찬은 “조선의 역사는 풍부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문헌이 온전히 남아 있지 못하며, 고대와 중세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는 국가의 연혁과 인물들의 출처를 가히 믿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한 조선인의 자기 역사인식에 대한 무지無知는 종래의 역사서가 부실하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유득공柳得恭은 승려들이 찬한 고기류古記類와 같은 종래의 역사서는 허황되거나 황당하여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승려의 국가관이나 사회관·수행관은 유교의 실천 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결국 당시는 비록 일반 역사서가 신라 불교사를 취급했다 하더라도 척불론적斥佛論的 입장에서 신라의 불교를 다루었다. 불교에 관한 풍부한 사료를 무시하고, 불교에 관계되는 기사는 그 시초만을 쓰거나 그 심한 것만을 들어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셋째, 조선의 문화 전통 강조와 불교사 복원이다. 한치윤은 비록 “종래의 고기류古記類가 승려들에 의해서 서술되어 그 내용을 믿을 수 없고 소략하다.”라는 비판으로 일관했지만, 자국사에 대한 체계화와 복원을 염두에 두었다. 예컨대 그들의 역사인식과 편찬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국사와 대등하게 그 시종始終이 전개되고 있으며, 문화 전통 또한 중국에 비해 결코 뒤진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대동선교고大東禪敎考』와 「석지」의 편찬은 조선 후기 실학자의 자국사와 문화전통에 대한 주체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울러 그동안의 사서가 황당하고 믿을 수 없는 허무맹랑한 것으로 인식한 그들은 실증적 자세로 불교사를 면밀히 재검토하고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중국 사서에 수록된 우리나라 불교 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넷째, 우리나라 불교사에 대한 소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불교를 이단시하여 사상과 신앙은 물론이고 관계 서적조차도 철저하게 금기시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선입관은 불교 자체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사에 대한 무지를 불러일으켰다. 지나간 역사에 대한 연구나 편찬에서 불교에 대한 기술은 이단임을 전제하여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 삭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히 불교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부진하게 했고, 그 이해조차도 드문 일이었다. 『삼국사기』와 중국의 역사서에 수록된 우리나라의 불교 기사는 우리의 불교문화 전통이 중국과 대등한 면을 지니고 있음을 중국에 알리는 것임과 동시에 그동안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선입관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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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동국대 및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공부하고 「조선후기 사지寺誌편찬과 승전僧傳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 저서로 『조선후기 불교동향사』, 『사지와 승전을 통해 본 조선후기 불교사학사』, 『한국근대불교사론』, 『석전영호대종사』(공저), 『신흥사』(공저)등이 있다. 조선시대와 근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사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역임.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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