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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인간 세상을 벗어난 불국토 속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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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4 년 8 월 [통권 제136호]  /     /  작성일24-08-05 09:23  /   조회94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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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46 | 법주사 ①

 

충청북도 보은군에 들어서면 기암괴석들과 영봉들이 우뚝 솟은 속리산俗離山을 만난다. 경상북도 상주尙州군과 걸쳐 있다. 이곳은 옛날 신라의 삼년산군三年山郡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상주 땅이었다.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린 소백산맥의 가운데에 자리하며, 사방으로 상주, 회인懷仁, 옥천沃川, 청주淸州와 가까이 있지만, 속세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별천지 같기도 하다. 산이름부터 인간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인 절속리세絶俗離世를 말하지만,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군사 요충지로 전란의 싸움터가 되기도 했다.

 

신라시대부터 불리던 이름 속리산

 

속리산은 오래전부터 광명산光明山, 지명산智明山, 미지산彌智山, 소금강산小金剛山, 자하산紫霞山, 구봉산九峯山, 형제산兄弟山으로도 불렸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에는 속리악이 중사中祀를 지낸 산으로 나오고, 『삼국유사』에는 속리산으로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는 9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어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했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770)에는 산세山勢가 웅장하고 바위로 된 산봉우리들이 모두 하늘을 향해 솟아난 옥부용玉芙蓉과 같아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른다고 되어 있다. 여하튼 여러 이름 가운데 속리라는 산이름은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속리산은 천왕봉天王峯(1058m)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 길상봉吉祥峯, 문수봉文殊峯, 보현봉普賢峯, 관음봉觀音峯, 묘봉妙峯, 수정봉水晶峯 등 높은 화강암 봉우리가 모두 불교 이름을 하고 있어 이곳이 불국토임을 말하고 있다. 문장대文藏臺, 입석대立石臺, 경업대慶業臺, 배석대拜石臺, 학소대鶴巢臺, 신선대神仙臺, 봉황대鳳凰臺, 산호대珊瑚臺 등 8개의 화강암 바위로 된 높은 대臺는 각가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사진 1. 속리산의 웅장한 산세. 사진: 국립공원공단.

 

천왕봉 골짜기에서 나온 물은 동쪽으로는 낙동강 상류로 가고, 북쪽으로는 한강 상류로 흐르며, 남쪽으로는 금강 상류가 되어 천고千古의 세월을 흐르고 있다. 바위산에 계곡이 많으니 자연 석문石門들도 많아 속리산에는 내석문內石門, 외석문外石門, 상환석문上歡石門, 상고석문上庫石門, 상고외석문上庫外石門, 비로석문毘盧石門, 금강석문金剛石門, 추래석문墜來石門 등 이름만 붙은 것도 8개가 있고, 계류가 굽이치는 지점마다 세워진 다리들도 자연 속에 스며들어 산자수명山紫水明한 풍경을 더하였다. 솜씨 좋은 화사畵師가 이를 그리면 금강산에 뒤지지 않을 산수경이리라. 어쩌면 때 묻지 않은 골짜기 어디쯤 복숭아꽃 만발한 도화원桃花園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신선神仙이 내려와 살았을지도 모른다.

 

문인 묵객들이 군자의 덕을 키우던 산

 

그래서 옛날부터 많은 선비들과 문인, 묵객들이 찾아와 요산요수樂山樂水로 군자의 덕을 키우기도 했고, 선계仙界의 깊은 산속으로 와 학문과 수양에 힘쓰고 문장과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고려시대의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 석재石齋 박효수朴孝修(?∼?), 조선시대의 나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 충암冲庵 김정金淨(1486∼1521), 대곡大谷 성운成運(1497∼1579),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 청육靑陸 김덕겸金德謙(1552∼1633),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1620∼1681), 손와損窩 최석항崔錫恒(1654∼1724), 정암正庵 이현익李顯益(1678∼1717),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1689∼1756), 위헌韋軒 송교명宋敎明(1691∼1742), 노우魯宇 정충필鄭忠弼(1725∼1789), 하서荷棲 조경趙璥(1727∼1787), 지암遲庵 이동항李東沆(1736∼1804), 옥천玉泉 강주호姜周祜(1754∼1821), 강주우姜周祐(1757∼1817), 어당峿堂 이상수李象秀(1820∼1882),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1846∼1918),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1850∼1927) 등 많은 선비들이 속리산을 유람하고 글을 남기거나 시를 짓기도 했다. 거칠고 추악한 속세를 멀리하고 자신을 지키며 산 은자隱者들도 많았으리라.

 

나라 일을 하려고 출사한 성운 선생도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를 겪으면서 처가인 속리산 종곡鐘谷에 대곡서실大谷書室을 짓고 학문에 매진하며 살았다. 그는 왕의 외척세력들인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권력투쟁으로 전개된 을사사화乙巳士禍(1545)에서 작은 형이 장살杖殺되는 일을 겪고는 아예 관로와 단념하고 여러 차례의 조정의 부름도 모두 거절한 채 속리산인이 되었다. 그의 <유속리游俗離> 시 가운데 한 수이다.

 

사마계담상卸馬溪潭上

징파사석시澄波似昔時

녹래간척이鹿來看擲餌

용출청아시龍出聽哦詩

곡조무범향谷鳥無凡響

암운유영자巖雲有令姿

진환인이사塵寰人易死

회수총류류回首塚纍纍

 

말고삐 풀고 계곡 가에 내려보니

맑은 물결은 예나 다름이 없네

사슴은 내려와 먹이 던져주는 모습을 보고

용은 몸을 나타내어 시 읊는 소리를 듣고 있구나

골짜기의 산새는 곱고 예쁜 소리로 노래하고

바위 위 구름은 아름답기만 한데

풍진세상에 사람 목숨 쉽게도 죽어가는데

고개 돌려 보니 쌓여가는 무덤만 있을 뿐이네

 

대곡 선생은 서울에서 만난 지기知己인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선생,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 선생,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 선생 등과 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대곡 선생을 빼닮은 제자가 바로 당대의 문장가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 선생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낸 백호 선생도 조정의 당파싸움을 목도하고는 탄식을 하며 산수山水에 몸을 숨겼다. 대곡 선생의 학문은 당대의 거유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 선생과 백호白湖 윤휴尹鑴(1617∼1680)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대곡 선생의 시 <송전상인送田上人>

 

그 시절 속리산이 대곡의 산이라면, 지리산은 남명의 산이었다. 성운 선생과 조식 선생은 모두 불의한 세상을 멀리하고 산속에서 지식을 탐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멀리서나마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어느 날 법주사 출가승인 전田 화상이 지리산에서 가지고 온 남명 선생의 서찰을 전하고 돌아가자 대곡 선생이 써 보낸 답장에는 난세를 관통하던 두고사高士의 동도지교同道之交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송전상인送田上人>이라는 시다.

 

사진 2. <송전상인送田上人>이 수록된 『대곡집大谷集』(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재백일정山齋白日靜

오침초파수午枕初破睡

유승관시비有僧款柴扉

운자두류지云自頭流至

남명부오수南冥付吾手

척소송신자尺素送信字

문차심욕광聞此心欲狂

불각영도사不覺迎倒屣

서두유하사書頭有何辭

문아가식매問我佳食寐

기하수백자其下數百字

진시상별의盡是傷別意

고인학구가故人學丘軻

한마수심지汗馬收心地

의인인막신醫人人莫信

낭비천금이囊祕千金餌

용희오학도龍稀誤學屠

악용수인리惡用袖刃利

천구노개예天駒怒介倪

궤계수가비詭計誰加轡

입산득신산入山得神山

인여산상치人與山相値

오사동운수吾師同雲水

앙산모고의仰山慕高義

가사수장구袈裟隨杖屨

기향송하시幾向松下侍

궁산래방아窮山來訪我

역유원교지亦有願交志

고중청기언叩中聽其言

파견재초이頗見才超異

소석종이교所惜從異敎

복공비심지覆空費心智

당사이유학儻使移儒學

방행무여류芳行無與類

주석명월산住錫明月山

어아삼래기於我三來曁

양풍홀오서涼風忽鏖暑

구산몽적취舊山夢積翠

편편일신경翩翩一身輕

거약협우혈去若挾羽趐

위아보고인爲我報故人

발독용초췌髮禿容憔悴

침면영이수沈綿嬰二豎

엄골모귀사掩骨謀鬼事

상기천하견相期泉下見

망망안가기茫茫安可冀

 

산속의 거처는 낮에도 조용하여

한낮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네.

어떤 스님이 사립문 두드리며

말하기를, 두류산에서 왔다 하네.

남명의 부탁으로 손수 들고왔는데,

맑은 소식을 부쳐 보낸 것이었네.

이 말 듣고 너무나 기뻐서

나도 모르게 신발도 거꾸로 신은 채로 맞이하였네.

편지의 처음에 무슨 말이 있는가 보니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한지부터 물었고,

그 아래 수백 글자는

모두 헤어짐을 슬퍼하는 마음뿐이었네.

벗은 유가의 학문을 공부하여

마음자리에 큰 성취를 이루었지.

세상사람 치료할 수 있건만 믿어 주는 이 없으니,

천금 같은 약은 주머니 속에 숨겨져 있을 뿐이네. 

용은 드문데 용 잡는 법만 괜히 배웠으니

소매 속 날카로운 칼을 어디에 쓸 것인가.

천리마가 노하여 끌채를 부러뜨리니

누가 궤우詭遇의 계책으로 그 고삐를 잡아맬 수 있을까.

신선산을 얻어 산으로 들어가니

사람과 산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네.

우리 스님은 구름과 물과 같아

산 같이 높은 절의를 사모했으니,

가사 입고서도 남명 선생을 따르며

소나무 아래에서 그 얼마나 모셨던가.

외진 산골로 나를 찾아온 것이니

사귀어보려는 뜻도 있었으리라.

생각을 물어보고 말을 들어 보니

재주가 실로 뛰어남을 알 수 있었네.

애석하게도 이교의 가르침 따르는 바람에

산속에서 마음과 지혜를 허비하고 있으니,

만일 우리 유가의 학문으로 옮겨온다면

아름다운 그 행실은 견줄 사람 없으리라.

명월산에 머물 때에는

세 번이나 나를 찾아왔었지.

처서가 다가오며 서늘한 바람 불어오니

지난 날 살던 푸른 산 꿈속에서 보았으리.

신선처럼 훨훨 장삼을 펄럭이며

날개 치며 날듯이 떠나가노니, 

이내 말을 벗에게 전해 주시게.

머리카락은 빠지고 얼굴은 초췌해지며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며 지내고 있어

이제 죽어 땅에 묻힐 일만 남았으니,

구천에서나 서로 만날 수밖에 없고

세월은 아득하기만 하니 어찌 편하기를 바라겠느냐고.

 

진정한 벗, 즉 지음知音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공자孔子(BCE 551∼BCE 479)가 ‘벗이 멀리에서 찾아오니 그 얼마나 즐거운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도道를 추구함에 간담상조肝膽相照하고 의기투합意氣投合하는 벗,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벗, 말이 필요 없는 벗, 마주하지 않아도 서로를 아는 벗. 바로 그런 벗이 자기를 찾아왔을 때의 기쁨이란 밥 먹던 숟가락도 던지고 버선발로 사립문으로 뛰어나가는 희열喜悅이다.

 

영남의 선비들이 속리산으로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정충필 선생은 당대의 거유巨儒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 선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순암順庵 이헌유李憲儒(1733∼1804) 선생이 옥천현감沃川縣監으로 부임하자 경북 영천에서 속리산까지 유람을 떠났다. 1776년 가을날 떠난 원행遠行은 여러 선비들도 만나고, 천하의 산천도 둘러보며 심신을 다스리는 여정이었다. 그해는 정권을 장악한 노론의 오랜 탄압 속에서 질곡의 삶을 살아왔던 영남의 선비들에게는 희망이 될 정조正祖(1776∼1800)가 즉위한 해였다. 칠계漆溪(옻골)의 스승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선생댁에 들러 계획을 알리고 떠난 먼 여정을 <유속리산록遊俗離山錄>으로 남겼다.

 

사진 3. 속리산 법주사 전경. 사진: 충청일보.

 

그는 대추나무 숲이 펼쳐진 보은을 지나 박석고개를 넘어 속리산 동구로 들어갔다. 몇 굽이를 돌아 드디어 법주사法住寺의 금강문金剛門 밖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이때부터는 산수를 몸으로 느끼려고 작시作詩도 멈추었다. 출발할 때 이헌유 현감에게 보낸 시 한 수는 이렇다.

 

도불원인인원도道不遠人人遠道

산비이속속리산山非離俗俗離山

기어속리산하리寄語俗離山下吏

가능시도속리산可能時到俗離山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인간세상 떠나지 않는데 세상이 산을 떠나네.

속리산 아래 관로의 벗에게 소식 전하노니

제때에 속리산에 이를지 이를 알 수 없구려. 

 

속리산을 찾아 나선 여정을 도를 찾아가는 발걸음으로 표현하였다. 『중용中庸』에서 공자가 “도는 사람과 멀리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인간 세상과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라는 구절에서 시상을 가져와 첫 구를 시작하였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1792년 3월 정조는 안동 도산서원 맞은 편 분천汾川 모래사장 송림松林에서 영남선비들만 특별 등용하는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실시하고 합격자를 발표하자 3일 후 사간원 언관인 노론의 류성한柳星漢(1750∼1794)이 정조와 영남을 겨냥한 상소를 올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노론세력의 국정농단 하에서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어린 눈으로 보고 자신의 등극도 극력 저지한 노론 집단의 위협적인 힘을 겪은 정조에게는 실로 예민한 뇌관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조정에 큰 파란을 몰고 온 것은 물론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는 조정을 넘어 전국적으로 문제가 확대되어 갔는데, 드디어 4월에는 영남 지역에서 10,000명이 넘는 선비들이 직접 연명한 만인소萬人疏 상소운동이 발발했다. 사도세자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관련자의 죄를 묻고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바로 잡으라는 것이었다. 이상정 선생의 조카인 이우李瑀(1739∼1811) 선생(이광정李光靖의 아들)이 소두疏頭가 되었다. 이 상소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조가 창덕궁昌德宮 희정당熙政堂에 직접 나와 대표자들과 소통을 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을 때, 이헌유 선생은 홍문관 수찬 김한동金翰東(1740∼1811) 선생과 강세륜姜世綸(1761∼1842), 김희택金熙澤, 이경유李敬儒(1750∼1821), 성언집成彦檝(1732∼1812), 김시찬金是瓚(1754∼1831) 등 소두를 포함한 주도적 인물 8인에 포함되어 목숨이 걸린 시간을 같이 한 인물이다. 노론이 중앙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 당시에 이헌유 선생은 그해 1월부터 선혜청宣惠廳 낭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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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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