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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서유기 ]
마왕이 된 손오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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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4 년 8 월 [통권 제136호]  /     /  작성일24-08-05 09:43  /   조회90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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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마왕과의 싸움 

 

손오공이 고향으로 돌아오니 화과산 수렴동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북방 수장동水臟洞의 혼세마왕混世魔王이라는 요마가 원숭이들을 잡아가고 돌 가구들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마왕은 구름과 안개, 비와 바람, 그리고 천둥 번개를 부리는 신통력의 소유자였다. 손오공이 마왕의 소굴인 수장동을 찾아가 보니, 마왕은 검은 복장 일색에 위압적인 크기를 자랑하며 부하들을 거느리고 손오공을 상대한다. 이에 손오공은 신외신身外身 술법을 써서 무수한 작은 원숭이들을 내어 요괴를 처치하고 수렴동의 평화를 되찾는다.

 

수렴동과 수장동

 

손오공이 실천하는 최초의 싸움으로서 본격적인 실습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혼세마왕은 수장동水臟洞에 살고 손오공은 수렴동水簾洞에 산다. 이에 의하면 구도자와 마왕의 차이는 주렴[簾]과 창자[臟]에 있다. 왜 주렴인가? 마음은 생멸하는 작용 그 자체다. 그것은 독립된 물방울과 같다. 사람들은 그 각각의 물방울들을 관념의 끈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실체로 인식한다. 구도자는 그것이 관념의 끈으로 연결된 가상임을 간파한다. 그래서 주렴으로 가려진 동굴, 수렴동에 살지만 실상에 어둡지 않다. 

 

이에 비해 이 마음이 창자와 같은 신체기관[臟]에 있다고 생각하면 수장동이 된다. 혼세마왕이 수렴동을 약탈하여 원숭이들(현상들)을 납치하고 돌 가구(불성)들을 가져다 자아의 살림을 차린 이유다. 그것은 자아를 왕으로 세우는 살림이기도 하다. 북방에 산다는 것은 이 마왕이 남쪽을 향해[南面]왕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사진 1. 혼세마왕과 손오공.

 

어째서 이 일이 일어났는가? 수행이 깊어 우주법계 전체 이대로 한마음임을 확인하는 체험을 했다고 하자. 그 체험을 반복하고자 하고, 또 그것을 기억의 보따리에 담아 소유하면서 수시로 도취의 자산으로 삼게 되는 데 있다.

 

혼세마왕이 그랬다. 혼세마왕은 거대한 체구에 번쩍이는 금 투구, 펄럭이는 검은 비단옷, 검은색 갑옷과 화려한 가죽 신 등의 명품으로 스스로를 꾸미고 있다. 무엇보다 마왕은 검은색 일색의 차림을 하고 있다. 검은색, 그 색이 나뉘기 전의 궁극의 하나에 자기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왕의 정체는 혼세마왕이라는 이름에도 암시되어 있다. 세상이 둘로 나뉘기 전의 혼돈混沌을 궁극의 하나로 집착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원래 『서유기』의 모든 마왕은 기왕의 성취에 머무는 마음에서 일어난다. 혼세마왕이 머무는 성취감은 전체를 관통하는 불변의 하나를 확인했던 체험과 관련이 있다. 손오공은 무수한 분신을 만드는 신외신身外身의 술법을 구사하여 이 마왕을 상대한다.

 

오공은 마왕의 흉맹함을 보고 신외신의 술법을 부려 터럭 하나를 뽑아 입으로 씹어서는 공중으로 내뿜으며 소리쳤다. “변해랏!” 그러자 2~300마리의 작은 원숭이 무리가 주위에 나타났다. … 이 작은 원숭이들이 끌어안고, 당기고, 허리를 잡고, 발을 걸고, 발로 차고, 털을 뽑고, 눈을 쑤시고, 코를 비틀고, 두들기면서 마왕을 공격했다.

 

사진 2. 손오공의 신외신 분신술.

 

하나에서 많음을 내는 신외신의 분신술은 하나를 고집하는 혼세마왕을 격파하는 효과적인 전술이다. 싸움이 끝난 뒤 손오공은 분신술로 나타난 무수한 원숭이들을 다시 한 가닥 털로 불러들인다. 하나가 모든 것이었으니까[一卽多], 모든 것이 하나[多卽一]로 돌아옴을 보는 것이다. 이처럼 신외신 술법은 하나의 본질과 다양한 현상이 둘이 아님을 보는 눈뜸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를 고집하는 치우친 견해를 물리치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자아왕국의 건설

 

혼세마왕의 난리를 겪은 손오공은 수렴동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 세상의 무기고를 털어 부하들을 무장시킨다. 또한 손오공은 동해의 용궁을 방문하여 여의봉如意棒을 강탈한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용왕들을 협박하여 투구와 갑옷과 신발에 이르기까지 일습을 탈취하여 스스로를 꾸민다. 여의봉을 손에 쥔 손오공은 여섯 마왕들과 짝이 되어 만사여의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 잠을 자다가 저승으로 끌려간다. 손오공은 저승사자를 때려죽이고 명부의 왕들을 협박하여 생사부에 적힌 자기 이름을 지우고 돌아온다. 죽지 않게 된 것이다. 

 

마왕이 된 손오공

 

손오공은 수보리 조사의 회상에서 도를 성취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다시 자아의 왕국을 건립하는 마왕이 된 것일까? 그 깨달음이 가짜였기 때문일까? 원칙적 차원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 뒤에 이런저런 미혹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진짜 깨달음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선문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일체의 번뇌를 단멸하여 여래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고 보는 입장도 있고, 깨달음을 체험한 뒤에 남은 번뇌를 제거해 가며 깨달음을 공고히 하게 된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직전의 체험을 잘 지키고 키워갈 것인지, 그것을 아낌없이 버릴 것인지에 따라 입장이 갈리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번뇌가 남아 있다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므로 그 체험에 머물지 말고 남김없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서유기』는 양자의 입장을 겸한다. 매번의 고난을 해결한 뒤, 이를 발판으로 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건너간다는 점에서 그것은 작은 깨달음을 쌓아 큰 깨달음을 성취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점에서 돈오점수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요마를 물리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요컨대 기왕의 성취를 버리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모든 요마는 직전의 체험에 머무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요마와의 싸움은 기왕의 성취와 그 자부심을 버리는 일이라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왕의 성취를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는 입장에 있는 것이고, 이것이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적 입장과 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손오공이 스스로 마왕이 되는 과정을 보자. 손오공은 혼세마왕의 난을 겪은 직후 수렴동을 요새화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소박하게 대나무와 나무 따위로 창, 칼을 만들어 원숭이들을 훈련시킨다. 그러다가 인간 세상의 무기고를 털어 정식으로 무장을 한다. 그 위엄에 온 세상의 짐승과 요괴들이 그를 왕으로 떠받들게 된다. 수렴동은 철통 요새가 되고, 화과산은 절대적 자아왕국이 된다.

 

손오공은 도술을 익히고 혼세마왕을 물리친 주체로서의 나에 집착한다. 혼세마왕을 물리치던 순간의 초월과 해방의 체험! 그것이야말로 더욱 꼭 쥐고 놓지 않아야 할 본질적인 실체가 아닐까? 그 순간 구도자는 진리와 그에 대한 체험을 특별한 무엇으로 규정하는 함정에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자신이 남다른 체험을 한 특별한 존재라는 자부심이 일어나고 그것에 의한 자기 무장이 일어난다. 여기에 그를 떠받드는 대중들이 가세하면 타는 불에 기름 끼얹기가 된다. 이렇게 하여 화과산 수렴동에 자아숭배의 왕국이 건립된 것이다.

 

여의봉과 자아의 형제들

 

손오공이 자신에게 맞는 무기가 없어 고심하자 네 명의 신하들이 말한다. “대왕께 신통력이 있으시다면 우리 이 철판교 아래의 물이 동해의 용궁으로 통하니 그곳으로 가보십시오. 용왕을 만나 무엇인가 무기가 될 것을 내놓으라 하면 마음에 맞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손오공은 동해 용왕에게 가서 여의봉을 받아낸다. 그것은 바라는 대로 늘어나고 줄어들며, 크게 하면 우주를 채우고, 작게 하면 귓바퀴에 들어가는 신축자재한 보물이었다. 그야말로 뜻과 같이 되는[如意] 몽둥이[棒]였다. 여의봉을 얻은 손오공은 용왕의 형제들에게 투구와 갑옷에 신발까지 얻어 완전한 모습으로 개선한다. 손오공은 자아의 무장에 혁혁한 공을 세운 네 명의 부하들을 장군으로 삼고 천하의 여섯 마왕들과 회동하여 칠형제 모임을 만들어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간다.

 

사진 3. 용궁에서 탈취한 여의봉.

 

손오공이 마음에 대한 비유이지만, 그가 찾아낸 여의봉 역시 마음에 대한 또 하나의 비유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손오공은 마음[心]의 상징이고, 여의봉은 뜻[意]의 상징이다. 마음(원숭이)이 뜻(여의봉)을 부리는 왕이기 때문이다. 이 여의봉이 뜻과 같이 된다[如意]는 ‘뜻’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자아의 뜻과 같이 된다는 뜻이다. 자아의 뜻은 온갖 욕망과 찌꺼기 감정의 총화이다. 자아는 이를 통해 배타적인 자아실현을 추구한다. 이때 그 주인은 마왕이 되고 여의봉은 천하의 재앙이 된다.

 

둘째는 자아를 벗어난 큰마음과 같이 된다는 뜻이다. 이때의 뜻은 진여 그 자체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공자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먹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 경우 여의봉은 전 우주를 평등하게 장엄하는 법륜法輪이 된다.

 

애석하지만 손오공은 지금 자아의 뜻과 같이 여의봉을 휘두르는 중이다. 자아가 있으니 사라진 것처럼 위장했던 집착들이 다시 일어난다. 손오공이 여의봉을 얻고 나서 투구에 갑옷에 신발까지 내놓으라 하는 일들이 그 일환이다. 또한 육체에 기생하고 있던 여섯 도적이 다시 왕위에 오른다. 소 마왕, 교룡 마왕, 붕새 마왕, 사자 왕, 원숭이 왕, 털 원숭이 왕이 그들이다. 여섯 도적은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감각기관과 의식을 형상화한 것이다. 여기에 손오공까지 더하면 일곱이 된다. 육욕칠정의 발현이라 해도 되고, 6식에 제7말나식이 연합하여 발호하는 현장이라 해도 된다. 손오공은 일곱째 말나의 왕으로서 찬란한 자아에 도취되어 살아간다.

 

여기에 최고의 아첨꾼들이 등장한다. 손오공을 부추겨 화과산의 자아왕국을 일구고 여의봉의 탈취를 사주한 네 마리의 늙은 원숭이가 그들이다. 이 늙은 원숭이들은 자아의 핵심 요소인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형상화이다. 그것은 자아의 세계를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이다. 손오공이 이들을 자아왕국을 지키는 장군으로 임명한 것은 당연하다. 

 

영생을 꿈꾸는 손오공

 

손오공이 오욕락을 즐기며 살아가던 어느 날,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가 저승으로 끌려간다. 손오공은 “삼계를 벗어나고 오행을 초월한” 자신을 잡아 온 두 저승사자를 박살낸다. 그리고 명부의 열 왕을 협박하여 생사부의 이름을 지우고 돌아온다. 손오공은 네 장군과 여섯 마왕들의 축하를 받으며 영생의 잔치를 베푼다.

 

육체를 가진 존재는 생멸의 윤회바퀴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진여의 차원에서 보면 생과 사는 하나의 큰 꿈이다. 장자가 설파했던 것처럼 지금의 이 삶은 나비가 꾸는 꿈이다. 도대체 그 꿈은 몇 겹으로 허망한가? 꿈 속의 꿈, 또 그 꿈 속의 꿈이다. 손오공은 이 꿈 속의 꿈 속에서 저승에 끌려간 일에 상관한다. 분노하고, 휘두르고, 주관한다.

 

사진 4. 저승사자를 때려잡는 손오공.

 

이 손어르신은 삼계를 벗어나 있고, 오행에 묶이지 않아 이미 그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나를 끌고 왔단 말이냐?

 

영생은 인류의 영원한 꿈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이를 위해 영약을 제조하고, 육체를 단련하고, 오행을 초월하는 기술이 연구되었다. 바른길만 찾는다면 지복과 영생을 약속하는 신선세계나 천상세계의 삶에 진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오행에 묶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물질적 한계를 넘어섰다는 뜻이고, 삼계를 초월했다는 것은 생멸윤회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아의 영속을 바라는 대표적 번뇌에 해당한다.

 

손오공은 무상, 고, 무아의 3법인에 대해 정면 도전하고 있다. 뜻과 같이 되는 것이 없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현장에서 뜻대로 되는 여의봉을 휘두른다. 필연적 소멸을 예정하고 있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존재임에도 생사부를 지워 영생을 기약한다. 이제 손오공은 하늘과 견주는 위대한 성인[齊天大聖]으로 자칭하며 천상을 쑥대밭으로 만들 판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에 도전하는 이 하늘 전쟁의 사연은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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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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