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禪, 禪과 시]
책바위와 확연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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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1 년 9 월 [통권 제101호] / / 작성일21-09-06 10:58 / 조회5,494회 / 댓글0건본문
시詩와 선禪 선과 시 4
확연무성廓然無聖
혼자 두세 시간 걷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걷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은 산 속의 나무뿌리처럼 물을 찾아 뻗어갑니다.
오늘은 중고교 동창생들과 함께 북지장사로 산행하는 날입니다. 모두 스무 명이 모였습니다. 차는 대구방짜유기박물관 앞 도로변에 세워두고 출발합니다. 칡꽃 향기가 은은하게 산기슭을 휘감고 있습니다만, 칡꽃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포장된 길을 피해 인적이 드문 소나무 숲길을 선택합니다(사진 1). 1.3km에 달하는 소나무 숲길은 기쁨과 안심 그리고 마음에 위안을 줍니다. 사람은 걸을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고 말한 사람은 샤르트르입니다. 부슬비가 살짝 내리자 흙냄새, 낙엽냄새, 풀냄새가 사람들 키 높이로 올라옵니다. 잡풀 무성한 개활지를 지나 바람 한 점 없는 못 둑에 올라섭니다. 저 멀리 팔공산 노적봉이 보입니다. 소나무 숲 아래에는 언제나 소슬한 그늘이 깔려 있어 지나가는 사람을 감싸 줍니다. 무성한 소나무 숲은 인간을 자신의 가치에 합당하도록 납작하게 만들어줍니다.
사진 1. 북지장사 소나무숲 길.
우리는 북지장사로 들어가지 않고 우측 바람고개 가는 길로 접어듭니다. 숲속 계곡으로 내려가서 한참 동안 휴식합니다. 언젠가는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이 정도 계곡에서 만족해야 할 날이 오겠죠. 그때도 여전히 소나무에서는 송진 냄새가 나고 개울물은 노래하며 흘러가겠죠.
바람고개 가는 길 입구에 부도탑이 하나 있습니다. 잠깐 올라가보니 한경 대종사 부도탑입니다. 어떤 무덤이든 부도탑이든 그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는 기호입니다. 조금 올라가니 가파른 산길이 나옵니다. 이 길은 경사도 50도가 넘는 절벽 같은 길인데, 길옆으로 멧돼지 발자국이 요란합니다. 최근에 지나간 멧돼지 발자국이라고 누가 말해줘서 알았습니다. 갑자기 야생의 기운이 우리를 채찍처럼 휙 내리칩니다.
그냥 올라갈 수 없어서 안전 로프 밧줄을 설치해 놓았군요. 휴, 올라가기 힘든 길이군요. 늘그막에도 산을 오를 때마다 새로운 경치를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산행할 때는 귀찮더라도 스틱을 갖고 다녀야겠다고 머릿속에 고딕체로 적어놓습니다.
한참 올라가자 커다랗고 칼로 잘라놓은 듯한 직사각형 바위들이 나타납니다. 한눈에 봐도 바위의 기운이 범상치 않습니다.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바위도 이 정도쯤 되면 부처님이 내려오실 만한 바위다.”
음, 정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인상적이고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바위에 이름이 없을 리가 없겠죠? 바위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집에 와서 여러 모로 검색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습니다. 한나절을 인터넷 속에서 헤맨 끝에 이 바위가 ‘책바위’란 것을 알았습니다(사진 2). 이 바위를 책바위라고 이름 지은 선조님은 분명 책을 좋아하는 분이었겠죠? 오늘은 책바위를 만난 것만으로도 산행의 보람이 있다 하겠습니다. 책바위 옆에도 바위로 된 테라스가 있어 모두 이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봅니다.
사진 2. 북지장사 책바위
책바위라는 이름조차 처음 들었으니 바라보는 풍경 또한 낯선 풍경입니다. 이곳은 420고지에 불과합니다만, 마음속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아무리 낮은 산도 그 산꼭대기는 우리들의 삶을 숭고한 차원으로 끌어올려줍니다. 아무리 낮은 산도 정상에 서면 발아래 시야가 확 트여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왜 마음이 편안해질까요?
책바위에 앉아 팔공산의 파노라마(사진 3)를 둘러보노라면 우리는 잠시나마 ‘자신’을 망각한 채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이 이 세계를 관조하게 됩니다. 이 경험은 분명 자아가 사라져 이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경험입니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이 경험을 표상에서 벗어나 존재로 진입하는 경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산 정상에서 멀리 보는 즐거움을 “세계의 청명한 눈”이라고 불렀습니다.
등산 체험에서만 누릴 수 있었던 이 숭고한 평온을 그는 “더 나은 의식bessere Bewusstsein”이라 불렀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아가 사라져야 “더 나은 의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주1)
산 정상에서 세계를 둘러보는 것은 심미적 태도이기도 합니다. 심미적 태도는 동시에 관조적 자세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범부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 관조적 자세가 아닐까요. 하지만 산 정상에 서면 누구나 잠깐 동안은 이런 관조적 자세를 저절로 갖게 됩니다. 알든 모르든 이런 관조적 자세가 좋아서 사람들은 정상으로 올라가는 지도 모릅니다.
젊었을 때는 그냥 지나쳤습니다만 『벽암록碧巖錄』을 다시 읽으며 달마의 ‘확연무성廓然無聖’ 네 글자를 접하고 마음속으로 환호작약했습니다. ‘확연무성’이야말로 “더 나은 의식”의 발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후, 작은 산이라도 확 트인 정상에 서게 되면 저절로 ‘확연무성’ 4글자가 떠올랐습니다.
『벽암록』 제1칙은 ‘성제제일의聖諦第一義’입니다. ‘달마達磨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도 합니다.
“양나라 무제(재위 502-549)가 달마 대사에게 물었다.
‘불교에서 가장 소중한 진리는 무엇인가?’
달마 대사가 답하였다.
‘모든 것은 휑하니 텅 비어 있어 진리라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황제가 다시 물었다.
‘내 앞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달마가 답하였다.
‘모르겠습니다.’”(주2)
이 공안은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실상實相을 주제로 한 것입니다. 세상의 실상은 활짝 갠 푸른 하늘처럼 휑하니 텅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선은 기본적으로 일원론입니다. 한 존재는 전 존재와 동일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공안을 읽어보면 선의 마음은 항상 현실 세계의 여러 현상 속에서 ‘일즉전一卽全’이라는 전 존재의 본질을 터득하는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본질을 보는 마음은 광대무변 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확연무성’입니다. ‘확연무성’은 ‘무심無心’이기도 합니다. 실상은 머리의 기능 이전의 세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 3. 책바위에서 바라본 팔공산 파노라마.
어쩌면 ‘확연무성’은 양나라 무제가 좌뇌左腦로 묻는데 반해 달마는 우뇌右腦로 대답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치판단을 하는 좌뇌를 제거하고 나면 거기에는 활짝 펼쳐진 푸른 하늘의 이미지만 남고, 성聖이니 속俗이니 하는 개념 따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달마는 선입관 없이 대상과 접하는 사람만이 무일물無一物의 마음으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말해 줍니다.
선어록을 공부할 때는 “역사적 사실 여부”는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설사 그것이 가공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사실”보다 “이야기”이기에 보다 더 진실한 존재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인간이기에 과학적·역사적 실증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시나 신화 혹은 공안의 형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이 있고, 그런 진실에 의지해 우리들 인생은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상 대사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시에 의지하는 것은 허구에 입각하여 리얼리티를 나타내기 위해서다.”(주3)
인간의 경험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경험은 미적인 경험에서 옵니다. 『벽암록』은 선 시집으로 읽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뛰어난 문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벽암록』을 통해 불법의 새로운 일면과 그 즐거움, 복잡함, 심오함을 경험하고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북지장사 책바위에 올라 세속의 생각을 내려놓고 잠시 동안 ‘확연무성’의 순수의식의 상태가 되어보았으니 이 짧은 한 순간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히 행복하다 하겠습니다.
책바위에서 바라보면 바로 건너편에 인봉이 보입니다. 인봉 아래 5부 능선쯤에 천년 고찰 북지장사가 보입니다. 우리는 책바위 화강암 테라스에 앉아 오랫동안 쉬었습니다. 경사 급한 길을 올라오느라 팽팽해진 근육과 신경이 풀어질 때까지 편하게 쉬었습니다. 등산의 즐거움은 산에 오르는 것 못지않게 쉬면서 산을 구경하는 데 있습니다.
내려오는 길은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라 비교적 수월합니다. 등산로에는 나무뿌리가 마치 계단처럼 받침목 역할을 해줍니다. 나무뿌리가 등산화에 닿는 감각은 정신적인 자극과 신체적인 밸런스를 가져다줍니다. 이승의 내리막길에서 어딘지 쓸쓸하면서도 단단한 나무뿌리를 밟고 또 밟았습니다.
주)
(주1) 뤼디거 자프란스키, 『쇼펜하우어』, 2018, “‘더 나은 의식’을 경험하려면 자아가 갑자기 사라져야 하며 그와 더불어, 행동하고 주장하고 개입하라고 다그치는 세계 역시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상성’으로서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얘기다.”
(주2) 『碧巖錄』, 第一則 「聖諦第一義」, “., 梁武帝問達摩大師: ‘如何是聖諦第一義?’ 摩云: ‘廓然無聖!’ 帝曰: ‘對朕者誰?’ 摩云: ‘不識.’”
(주3) 義相(625-702), 『華嚴一乘法界圖記』, “所以依詩, 卽虛現實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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