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전통·근대 경험한 교육자이자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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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1 년 9 월 [통권 제101호] / / 작성일21-09-06 11:34 / 조회5,006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9
백성욱白性郁 1897-1981
백성욱白性郁(1897-1981. 사진 1)은 승려 출신의 학자이자 교육자이며 동국대 총장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행정가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한학을 비롯해 전통적 방식으로 불교를 배운 이였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유럽에 유학하여 근대학문을 접한 선각자이기도 했다. 또 다년간 선 수행에 전념한 실천가였고 정부 관료를 지내는 등 활발히 사회적 활동을 펼친 이였다. 이처럼 그는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해방의 경험 등 시대의 이중성을 겪은 복합적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1897년 8월 19일 한성부 한복판인 연화방(현재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1901년에서 1903년까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호동학교에서 배웠다고 하며 1904년부터는 서숙에서 한문을 익혔다. 그는 일제의 강점으로 한일합방이 일어나기 불과 한 달 전인 1910년 7월 정릉에 있는 봉국사에서 최하옹崔荷翁에게 출가했다. 1911년부터는 불교전문강원에서 경전을 수학했다고 하며 1917년 경성의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하여 1919년에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중앙학림의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당시 중앙학림의 강사였던 한용운은 백성욱, 김법린 등 학생들을 불러 참여를 권유했고 많은 이들이 서울과 지방에서 조직적 활동을 펼쳤다.
사진 1. 백성욱.
이때 백성욱도 청년 지식인으로 민족의식에 눈을 떴을 것이다. 그는 얼마 후인 5월에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서 1년여를 머물렀다. 중국에서의 구체적 활동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근대화의 물결을 직접 보고 느꼈을 것이다. 당시 그가 쓴 글에서 중국의 사회상과 서양에 대한 정보는 물론 문학에 대한 관심도 엿볼 수 있다.
백성욱은 중국에 있으면서 유럽 유학을 결심했는데 당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권유했다는 설도 있다. 1920년 5·4운동 이후 중국에서는 근공검학 운동이 일어나 프랑스에 노동자로 청년들을 파견해 학업을 병행하게 하였는데, 1차 때만 1,600명이나 보내졌다. 훗날 중국을 이끈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도 이 시기에 프랑스에 가서 일하고 공부하며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백성욱도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중국에서 프랑스로 유학 갈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20년 프랑스 파리 보베Beauvais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1921년 2월에 프랑스 유학길을 떠난 김법린보다도 한 해 빠른 행보였다. 백성욱은 어떤 이유인지 파리에서 독일어와 라틴어를 수학하였고 1922년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유서 깊은 뷔르츠부르크Wurzburg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1924년 9월에 대학을 졸업하였고 다음 해 한스 마이어Hans Meyer 교수로부터 「불교순전철학」이라는 제목의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한다. 연도를 따져볼 때 당시 독일 대학의 학제나 학부 및 대학원의 재학 기간, 박사학위를 정식으로 수여했는지의 여부 등 몇 가지 의문이 들지만, 독일 유학을 마친 그는 1925년 9월 9일 금의환향했다.
불교 형이상학을 의미하는 그의 논문 〈불교순전철학〉은 《불교》 잡지에 내용이 소개되었는데, 전통적 방식을 차용하여 서분(서론), 정종분(본론), 유통분(결론)으로 글을 구성했다. 서분은 1절 역사적 개념과 불교순전철학, 2절 관념, 3절 논리(사색의 방식)이고, 정종분은 1장 붓다, 2장 다르마로 편성되어 있다. 백성욱은 이 글에서 유럽의 불교학 연구 성과와 함께 존재론, 인식론, 논리학 등 서양 철학의 개념 틀을 활용하고 있다. 또 국내 독자들을 위해 범어를 한국어 발음으로 일일이 표기했다.
1928년 4월에는 불교전수학교에서 강의했고 7월부터는 불교사 논설부에서도 근무했다. 이후 1929년 1월에 열린 전국 승려대회에서 종헌과 종법을 제정할 때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다 1930년 5월 금강산에 있는 지장암 등에서 대중을 모아 본격적으로 수행을 시작했는데 낮에는 농사를 짓는 등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결사 형태의 수행공동체를 꾸렸다. 이 공동체의 명칭은 선불장選佛場이라고 했는데, 보통 지장암에는 30명, 안양암에는 15명 정도가 모여 기도와 염불, 간경과 참선을 시간을 정하여 행했다고 한다. 특히 『화엄경』의 독송을 권장했고 ‘대방광불화엄경’ 일곱 자를 염불처럼 염송하게 했다.
이러한 금강산에서의 활동은 그에게 최초의 유럽 유학승이라는 타이틀에 덧붙여 수행승의 면모를 각인시켜주었다. 하지만 1938년 경찰이 그를 사이비 종교인이라고 몰아붙이며 구속하였고 얼마 후 불기소처분이 되었지만 일제는 수행공동체의 해체를 명했다.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서울로 돌아왔고 1939년부터 대외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돈암동 자택에서 다시 수행에 전념했다. 전시체제기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당시의 명망가들이 전시 동원을 독려하고 전쟁을 미화한 것과 차별되는 무위의 행보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후 백성욱은 이승만에게 정권을 양도하라는 연판장을 미군정에 내는 등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에 가담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1950년 2월에 그는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지만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음 달에 그만두었다. 전쟁 중이었던 1951년 2월에는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의 사장이 되었는데 그는 독일에서 공부할 때 광부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1952년 8월에는 무소속으로 부통령에 출마했다가 떨어지기도 했다.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직후인 1953년 8월에는 동국대 총장에 취임하였고 1961년까지 재임하였다. 또한 1954년 5월에 동국학원 이사장을 겸임하는 등 교육행정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다시 부통령직에 나섰지만 이번에도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에도 4.19나 5.16 등 극심한 정치적 부침 속에서 대광유지 사장, 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 경기학원 이사장, 고려대장경보존동지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다.
한편 그는 동국대에서 『화엄경』, 『금강삼매경론』, 『선문염송』 등 선과 교의 주요 텍스트를 대상으로 대학원 강의를 진행하는 등 정치인과 행정가, 사업가와 교육자를 오가며 말 그대로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면모를 보였다. 1961년 동국대 총장을 퇴임하고 나서는 부천 소사에 일종의 수행공동체인 ‘백성목장’을 설립하여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실천했다. 이곳에서는 특별한 영험이 있다고 하여 전통적 방식으로 『금강경』을 독송했으며 뒤에 ‘금강경독송회’가 만들어졌다. 백성욱은 80대 중반인 1981년에 입적했고 경기도 양주 대승사에 탑과 비가 세워졌다.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백성욱의 불교 개혁론과 지향점을 간단히 살펴본다. 그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20년대 후반에는 해외 유학생 출신들이 세계 불교학계의 최신 동향을 소개하는 한편 조선불교의 개혁 방안을 제시한 글들을 여러 지면에 실었다. 프랑스에 유학한 김법린, 일본에서 공부한 강유문, 김경주, 김태흡, 허영호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백성욱도 당시에는 거의 없던 유럽 유학생 출신으로 현대사회에 필요한 불교의 역할과 과제에 대한 고민을 담아 1926년 6월 「현대적 불교를 건설하려면」이라는 글을 《불교》에 발표했다.
백성욱은 이 글에서 도덕적 수양을 통해 사고를 공평하게 하고 자타의 경계를 넘는 데 불교가 도움이 되며, 사회의 정신적 난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불교는 중생 구제를 실천해왔고 한국 등 북방의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사회적 책임이 매우 중요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불교는 민족문화 향상에 이바지하고 승려는 선각자적 위상을 가져야 한다고 거듭 역설했다. 그는 승려는 역사적으로 지식계급이었고 승려가 무식할 때 냉대와 멸시를 당했다고 하여 승려들의 분발과 심기일전을 촉구했다.
나아가 당시 불교계의 폐단과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했는데, 도승, 교육, 포교, 재정, 비구니로 항목을 나누어 기술했다. 그는 먼저 승려를 뽑는 도승 시험 및 자격조건을 강화하고 이를 전담하는 기관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교육은 전통적인 전문강원 및 선방 체제를 강화하고 범패와 불화 등 불교예술을 계승하는 한편, 인문학, 자연과학, 의학 등 근대의 여러 분과학문도 함께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불교와 근대학문 분야를 망라한 시험 과목을 예로 들었다. 덧붙여 자신의 경험을 되살려 외국 유학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불교 포교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포교당의 경제적 자립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지식과 체육의 양성을 도모하고 신도의 조직과 활동을 장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사업의 경영과 산림 활용을 통해 사원경제를 운영하고 사회구제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비구니는 수계 조건을 비구와 똑같이 하고 의무교육을 통해 불교 교리를 배우는 한편 간호, 유아교육, 문학 등 여성에 맞으면서 사찰에 필요한 특화된 전문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백성욱은 그 유명세에 비해 학문적 성과나 생애와 관련된 공개 자료가 의외로 적다. 전통적 교육을 받았고 최초의 유럽 유학파 세대임에도 식민지라는 현실의 제약과 해방 후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 전쟁 등으로 인해 학술 연구에 올곧게 몰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20대에 근대불교학의 본고장인 유럽에 가서 성과를 체득하고 연구방법론을 익힌 그가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면 해방 후 한국 불교학의 수준과 위상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시대의 굴곡과 한계를 극복하고 동·서양과 신·구의 세대를 과감히 뛰어넘는 역할을 했다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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