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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
두 가지 수행, 사마타와 위빠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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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1 년 7 월 [통권 제99호]  /     /  작성일21-07-05 11:14  /   조회5,31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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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굿따라 니까야』의 「둘의 모음」에서는 ‘두 가지 수행’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두 가지 수행이란 사마타(samatha, 止)와 위빠사나(vipassanā, 觀)이다. 이 두 가지 수행은 불교 고유의 수행법이다. 붓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자들에게 마땅히 두 가지 법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윗자바기예나-숫따(Vijjābhāgiyena-sutta, 明分經)」(AN2:3:10)에서 붓다는 두 가지 수행인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구들이여, 사마타를 닦으면 어떤 이익을 얻는가? 마음이 계발된다. 마음이 계발되면 어떤 이익을 얻는가? 탐욕(貪欲, rāga)이 제거된다. 비구들이여, 위빠사나를 닦으면 어떤 이익을 얻는가? 지혜가 계발된다. 지혜가 계발되면 어떤 이익을 얻는가? 무명(無明, avijjā)이 제거된다. 탐욕에 오염된 마음은 해탈하지 못하고, 무명에 오염된 지혜는 계발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탐욕이 제거되어 마음의 해탈[心解脫]이 있고, 무명이 제거되어 지혜의 해탈[慧解脫]이 있다.[AN.Ⅰ.61]”

 

   이 경에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차이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 경에 따르면 사마타 수행은 탐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고, 위빠사나 수행은 무명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사마타 수행을 통해 탐욕을 제거하여 마음의 해탈(ceto-vimutti, 心解脫)을 얻고,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무명을 제거하여 지혜의 해탈(paññā-vimutti, 慧解脫)을 얻는다. 이와 같이 초기경전에 나타난 수행법은 간단명료하다.

 

   이 경에서 말하는 탐욕과 무명은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다. 다른 경에서는 탐욕 대신 갈애(渴愛, taṇhā)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인간의 근본적인 괴로움의 원인이 무명과 갈애라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윗자바기예나-숫따」에 대응하는 『증일아함경』 권11 제7경에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련[阿練] 비구는 마땅히 두 가지 법을 닦고 실천해야 한다. 두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sanā)이다. 만일 아련 비구가 사마타[止]를 터득하면 곧 계율을 성취하여 위의威儀를 잃지 않고, 금지하는 행위[禁行]를 범하지 않아 온갖 공덕을 지을 것이다. 또 아련 비구가 다시 위빠사나[觀]를 터득하면 괴로움[苦]을 관찰하여 사실 그대로 알고, 괴로움의 발생[苦集]을 관찰하고, 괴로움의 소멸[苦盡]을 관찰하며,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苦出要]을 관찰하여 사실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T2, p.600ab]”

 


이경미 작

 

   위 경문의 ‘아련(阿練)’은 아란야(arañña, 阿蘭若)의 음사로, 숲속이나 동굴 등 한적한 곳[空閑處]에 거주하면서 수행하는 자를 말한다. 즉 아란야에서 수행하는 비구는 마땅히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에서는 앞에서 인용한 「윗자바기예나-숫따」의 내용과는 약간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다르게 설명한 것일 뿐이다. 불교의 수행은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경에서는 선정 이전에 갖추어야 할 지계가 사마타를 닦으면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빠사나를 닦으면 고집멸도를 사실 그대로 알게 된다고 한다. 즉 위빠사나 수행은 결국 지혜를 계발하여 무명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무명이란 고집멸도 사성제의 원리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를 닦으면 사성제의 원리를 있는 그대로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관찰하고 나면 욕루欲漏의 마음에서 해탈하고, 유루有漏의 마음과 무명루無明漏의 마음에서 해탈하여 곧 해탈의 지혜를 얻는다. 그리하여 ‘나고 죽음이 이미 다하였고 범행梵行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을 이미 다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아느니라. 과거의 모든 다살아갈(多薩阿竭: 如來)・아라하阿羅訶・삼야삼불三耶三佛께서도 다 이 두 가지 법으로 말미암아 성취하게 되었다. 그 까닭은 보살이 나무 밑에 앉았을 때에 먼저 이 지止와 관觀, 두 가지 법을 생각하였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지에 대해 터득하고 나면, 마원魔怨을 항복 받을 것이요, 또 관을 터득하고 나면, 이내 세 가지 밝은 지혜[三達智]를 이루어 위없는 지진至眞・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러 비구들이여, 아련 비구는 마땅히 방편方便을 구해 이 두 가지 법을 닦아 행해야 한다. 여러 비구들이여,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위 경문의 욕루欲漏・유루有漏・무명루無明漏는 세 가지 근본적인 번뇌를 말한다. 욕루kāmāsava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이고, 유루bhavāsava는 존재에 기인한 번뇌이며, 무명루avijjāsava는 어리석음에 기인한 번뇌이다. 다살아갈多薩阿竭은 따타가따tathāgata의 음사로, ‘여래’를 지칭한다. 아라하阿羅訶는 아라한뜨arahant의 음사로, 아라한阿羅漢 혹은 응공應供을 말한다. 삼야삼불三耶三佛은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 三藐三菩提)의 음사로, 정등각자正等覺者를 의미한다. 삼달지三達智는 세 가지 지혜(tivijjā, 三明)라는 뜻이다. 또 ‘위없는 지진至眞・등정각等正覺’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즉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일컫는 말이다.

 

   위 경문에 의하면 사마타 수행을 통해 욕루의 번뇌에서 벗어나 마음의 해탈을 얻고,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유루와 무명루의 번뇌에서 벗어나 지혜의 해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과거의 모든 부처도 이 두 가지 수행법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래서 붓다도 보리수 밑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통해 마군魔軍을 항복받고 삼명三明을 얻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란야에 거주하는 비구는 마땅히 사마타와 위빠사나 두 가지 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에 따르면 “사마타는 마음이 하나로 된 상태(cittekaggatā, 心一境性)이고, 위빠사나는 형성된 것들은 [무상・고・무아라고] 파악하는 지혜이다.”[AA.Ⅱ.119] 다시 말해서 사마타는 선정을 얻기 위한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지혜를 얻기 위한 수행이다. 이처럼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는 목적이 서로 다르다.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에 따르면 “여기서 사마디(samādhi, 三昧)는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해탈하였기 때문에 마음의 해탈이고, 지혜는 무명으로부터 해탈하였기 때문에 지혜의 해탈이라고 알아야 한다. …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마음의 해탈이라 하고,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지혜의 해탈이라고 한다. 또 사마타의 결실이 마음의 해탈이고, 위빠사나의 결실이 지혜의 해탈이라고 알아야 한다.”[MA.Ⅰ.165]

 

   이와 같이 마음은 삼매의 동의어로 마음의 해탈은 삼매를 통한 해탈이고, 지혜의 해탈은 빤야(paññā, 般若)를 통한 해탈이다. 주석서에서는 지혜를 통한 해탈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마른 위빠사나를 닦은 자(sukkha-vipassaka, 乾慧者)와 네 가지 선정으로부터 출정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자들을 말한다.[DA.Ⅲ.879]

 

   그런데 마음의 해탈은 단독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지혜의 해탈과 함께 나타난다. 이른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다 갖춘 것을 양면해탈(兩面解脫, ubhatobhāgavimutta)이라고 부른다. 또한 붓다는 「마하니다나-숫따(Mahānidāna-sutta, 大因緣經)」(DN15)의 말미에서 ‘양면해탈’을 얻은 비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천하고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비구는 양면해탈을 한 자라고 한다.[DN.Ⅱ.71]” 

 

 모름지기 수행자라면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바로 지금・여기에서 현법열반(現法涅槃, diṭṭhadhamma-nibbāna)을 증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법열반을 증득한 사람을 우리는 ‘아라한’이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사마타와 위빠사나 중 ‘어느 것을 먼저 닦아야 하는가?’하는 논쟁이 있었다. 지금도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가 다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사마타를 먼저 닦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테라와다의 수행자 중에는 사마타 없이도 순수한 위빠사나 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수행해 보면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경계가 불명확하다. 따라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동시에 닦아야 한다. 즉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동시에 닦는 지관겸수止觀兼修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내려오는 통설通說이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실천하고 있는 독경, 염불, 주력, 참선 등은 대부분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선정 수행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행들은 넓은 의미의 사마타 수행에 포함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 즉 사념처관四念處觀을 통해 지혜를 계발하지 않으면 아라한과를 증득하기 어렵다. 사념처관을 다른 말로 ‘알아차림’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즉 ‘알아차림’을 통해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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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에서 학사와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샤카무니 붓다』, 『잡아함경 강의』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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