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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선문정로]
이해로 깨닫고 점차 닦아 나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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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21 년 7 월 [통권 제99호]  /     /  작성일21-07-05 09:21  /   조회6,09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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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선문정로』 13 | 해오점수解悟漸修


[원문] 성철 스님 [옮김]  활인검

 

편집자 | 【번호】·【평석】·【강설】은 성철 스님이 직접 쓰고 말씀하신 것이다. 【13-1】은 제13장 제1절이라는 의미다. * 표시가 붙은 것은 보다 쉽게 풀이한 것이다.

 

【13-1】 ①돈오점수頓悟漸修라 함은 돈오(일출과 해생孩生)와 점수(상소霜消와 해장孩長)이니 해오解悟니라. ②우선 돈오頓悟하여 바야흐로 점수漸修함은 이는 해오解悟이다. 그런 고로 『화엄』에서 설하되 시초발심始初發心할 때에 문득 정각을 성취한 연후에 3현三賢과 10성十聖을 차제次第로 수증修證한다고 하였다. ①頓悟漸修者는 頓悟(日出・孩生)와 漸修(霜消・孩長)이니 爲解悟니라. ②先須頓悟하야 方可漸修者는 此約解悟니 故로 華嚴에 說하되 初發心時에 便成正覺後에 三賢十聖을 因次第修證하느니라. (①圭峰, 『圓覺大疏』 上之二, 『大正藏』39, p.527a. ②圭峰, 『都序』, 『大正藏』48, p.407c) 

 

  * ①돈오점수라 함은 돈오(해가 뜨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와 점수(서리가 녹고 아이가 자라는 것)이니 ‘이해적 깨달음[解悟]’이 된다. (『원각대소』) ②우선 돈오하여 바야흐로 점수하는 사람은 ‘이해적 깨달음[解悟]’이다. 그런고로 『화엄경』에 깨달음을 향한 첫 마음을 낼 때 문든 깨침을 성취한 후 10주·10행·10회향과 10지를 차례로 닦는다고 나온다. (『도서』)

 

【평석】 교가敎家의 수행방법인 해오점수解悟漸修는 당하當下에 무심하여 돈증불지頓證佛地하는 선문종지와 정반正反하나니, 금사金沙를 불분不分하며 옥석玉石을 혼동하면 일대과오가 발생된다.

 

  * 교문敎門의 수행방법인 해오점수는 곧바로 그릇된 생각 없이 몰록 깨달아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는 선문禪門의 가르침과 정 반대이다. 금과 모래를 나누지 못하고 옥과 돌을 혼동하면 크나큰 잘못이 생긴다. 

 

【강설】 돈오점수의 ‘돈오’는 곧 ‘해오’이다. 해오란 얼음이 본래 물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듯 중생이 본래 부처란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러나 번뇌 망상은 아직 그대로이다. 얼음이 본래 물이라 해도 얼음인 채로는 융통 자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중생이 본래 부처란 것을 알았다 하여도 번뇌 망상을 그대로 두고는 생사에 자유자재한 해탈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완전히 녹은 물처럼 자유자재한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차이는 천지현격이라 하겠다.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6추를 비롯한 3세의 미세망상까지 완전히 끊어 일체를 해탈해야 그것을 증오라 한다. 

 

  규봉과 보조를 비롯해 교가에서는 흔히 얼음이 본래 물인 줄 아는 해오를 두고 ‘돈오’라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 종문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선문의 정통적 주장에 따르면 얼음이 완전히 녹아 자유자재한 물이 되었을 때인 증오를 돈오라 한다. 교가에서는 해오를 돈오라 하여 “깨달은 후에 3현 10성의 지위를 거치며 닦아나간다.”라 하고, 선가에서는 증오를 돈오라 하여 “10지 등각마저 넘어선 구경각이 깨달음이니 다시 배우고 닦을 일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돈오’라는 용어는 같이 사용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견성에 있어서도 ‘해오점수’에서 말하는 견성과 ‘증오돈수’에서 말하는 견성에는 차이가 있다. 해오의 견성은 10신초十信初이고 증오의 견성은 10지를 넘어선 최후의 묘각을 일컫는다. 육조께서 증명한 선문의 견성이 증오의 견성임은 이미 누차에 거쳐 밝힌 바이다. 마명 보살은 불교의 총론이라 할 『기신론』에서 “10지 보살을 지나 등각의 금강유정에서 6추는 물론 3세의 미세한 망념까지 완전히 끊어져야 그때서 견성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또한 영명 연수 선사도 용수 이후 최대의 역작이라 일컬어지는 『종경록』 첫머리 「표종장」에서 “3세 6추의 모든 망념이 단박에 없어지고 변함없이 항상恒常한 진여본성을 활연히 증득하니 이것이 망념을 없애 진여를 증득한 구경무심, 즉 견성이다.”고 하였다. 종문의 말씀이 『기신론』의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선을 닦는다면서 해오 즉 10신초를 견성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다. 허나 그것은 교가의 주장이지 선문의 정통사상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보조 지눌 국사의 영향으로 해오를 돈오이며 견성이라 여기는 이들이 우리나라에 특히 많은데, 돈오점수설의 원조라 할 규봉 조차도 해오를 돈오라고는 했지만 견성이라고까지는 칭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종문의 정종이 아닌 이런 주장들에 이끌려 선문의 정통을 흐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13-2】 ①돈오한 후에는 시초始初로 10신위十信位에 득입得入한다. ②처음 돈오한 자는 설법을 못하며 타인의 문난問難에 대답도 전연 못한다. ①悟後에 初入十信位也니라. ②初悟之人은 未能說法하며 答他問難을 皆悉不得이니라. (①圭峰, 『師資承襲圖』, 『卍續藏經』110, p.875a. ②圭峰, 『都序』, 『大正藏』48, p.410b) 

  * ①깨달은 뒤 비로소 처음으로 10신의 경계에 들어간다. (『사자승습도』) ②처음 깨달은 자는 설법을 못하며 다른 사람이 묻고 따지는 것에도 전연 대답하지 못한다. (『도서』)

 

【평석】 견성은 현증원통現證圓通한 구경각이므로, 10신초위十信初位를 내용으로 하는 해오解悟인 돈오는 견성이 아니다. 자고로 선문에서는 돈오하였다 함은, 심심극현甚深極玄한 난문難問으로써 시험하여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이 명명료료明明了了한 정답이 불능하면 타출打出되어 인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10신위는 정오正悟가 아니므로 설법과 문난問難이 불능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원증圓證을 내용으로 하는 선문의 돈오, 즉 견성과 해오解悟인 교가敎家의 돈오는 기실其實 천양지판天壤之判이 있다. 

 


백련암의 봄. 5월 8일 박우현 거사 촬영.

 

  *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은 결함 없고 두루 통하게 깨달은 궁극의 깨침이므로, 10신의 첫 단계를 내용으로 하는 ‘이해적 깨달음[解悟]’은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 아니다. 자고로 선문에서 돈오했다 함은 의미가 매우 깊고 지극히 알기 어려운 질문을 받고, 푸른 하늘에 뜬 밝은 해와 같이 분명하고 확실하며 올바르게 답변 하지 못하면, 인가 받지 못한다. 그러나 10신에 이른 수행자의 경지는 올바른 깨달음이 아니므로 설법과 묻고 따지는 것에 그런 수행자가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결함 없이 깨치는 것[圓證]을 내용으로 하는 선문의 ‘몰록 깨침[頓悟]’인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見性]’과 ‘이해적 깨달음[解悟]’인 교가의 깨달음은 사실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강설】 교가에서 말하는 돈오와 견성은 해오의 견성으로서 소견이 치성해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해도 실제로 실상에 대해 물으면 아무 것도 모른다. 예로부터 선문의 시험이란 보통 어려운 문제로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임제종 중흥조라 일컬어지는 오조 법연 선사 밑에 3불이 났으니 불안佛眼, 불감佛鑑, 불과佛果 선사 등이다. 불감 혜근佛鑑慧勤 선사 밑에 오래도록 수학하던 한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은 대중에 섞여 살며 법을 묻곤 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도 전혀 깨달은 바가 없자 스스로 탄식하고는 “내가 이생에서 철저하게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이불을 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렇게 부모님 상이라도 당한 듯 결연한 자세로 49일을 서서 눕지 않은 채 정진하고 있었다. 하루는 불감 선사가 상당하여 법문하시는데 “삼라만상이 모두 한 법에서 도장 찍히듯 나온 것이다.”는 말끝에 단박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불감 선사를 찾아가 말씀드리니 “아깝다! 한 알의 밝은 구슬을 이 지랄병 든 놈이 주웠구나.”라며 인정하였다. 불과 극근佛果克勤 선사, 즉 원오 스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아직 깨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였다. “내가 꼭 시험해 봐야겠다.” 하고는 사람을 시켜 불러오게 하였다. 한 번은 같이 산을 오르다 폭포아래 깊은 소沼를 지나는데 원오 스님이 갑자기 그를 깊은 소 아래로 확 밀어버렸다. 그리곤 허우적대며 숨이 턱에까지 찬 그 스님에게 대뜸 물었다.

 

  “우두 스님이 4조 도신 스님을 만나지 않았을 때는 어땠는가?” 

  “못이 깊으니 고기가 모입니다.”

  “만난 뒤에는 어땠는가?”

  “나무가 높으니 바람을 부릅니다.”

  “만나지 않았을 때와 만난 뒤에는 어떤가?”

  “다리를 뻗는 것은 다리를 오므리는 가운데 있습니다.”

 

  이렇게 숨이 막힐 지경인데도 막힘없이 척척 대답을 해내는 것이다. 이에 원오 스님이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분이 바로 불등 수순佛燈守珣 선사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나 죽는다고 허우적대며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건 바른 대답이 나와야 바로 깨달은 것이다. 선문의 시험이란 이렇게 혹독한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시험에 임하지 않고는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 눈앞에 손가락을 들이대 보라. 눈만 껌뻑껌뻑하며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모른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소견을 견성이라 하고 깨달았다 한다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그래서 종문에서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 정말로 생사를 초월한 깨달음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그 지혜가 청천백일처럼 빛나고 그 마음이 자유자재해야 올바른 견성과 깨달음으로 인정하고 인가했지, 그렇지 않으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13-3】 ①이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의의意義는 일장대승一藏大乘에 구비하였는데 『기신론』, 『원각경』과 『화엄경』이 그 종宗이다. ①此頓悟漸修之義는 備於一藏大乘而起信圓覺華嚴이 是其宗也니라. (①圭峰, 『承襲圖』, 『卍續藏經』110, p.875b) 

  * ①이 돈오점수의 의미는 여러 대승 경전에 갖춰져 있다. 『기신론』, 『원각경』, 『화엄경』 등이 그 가르침을 담고 있다. (『승습도』)

 

【평석】 불립문자不立文字하고 교외별전敎外別傳하여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선문돈종禪門頓宗의 원증圓證을 3현10성을 차제수증次第修證하는 교가 점수의 해오解悟에 융합하려는 무리無理는 결국 그 사람의 파멸을 자초한다. 

  *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 이외 별도로 전하며,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해 결함 없이 몰록 깨치는 선문의 가르침을 3현10성을 차례로 닦아 깨닫는 교가의 점차적인 수행으로 얻는[次第修證] ‘이해적 깨달음[解悟]’에 융합하려는 ‘그런 이치에 맞지 않는[無理]’ 시도는 결국 그 사람의 파멸만 불러온다.

 

【강설】 『기신론』이 돈오점수의 교의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견성에 있어서만은 10지 이후 보살지가 다한 구경각이라야 비로소 견성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13-4】 ①우선 심성心性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시 공적空寂함을 심신요해深信了解하여 그 신해信解를 의지하여 훈습수행薰習修行함이 무방하니라. ①先須信解心性이 本淨하고 煩惱가 本空하야 不妨依解薰修者也니라. (①『定慧結社文』, 『韓國佛敎全書』4, p.700b) 

  * ①우선 마음의 본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텅 비어 없는 것임을 깊이 믿고 올바르게 이해해 그 믿음과 이해에 의거해 수행을 하는 것이 좋다. (『정혜결사문』)

 

【평석】 이 신해(信解)는 해오(解悟)인 돈오를 말함이니 이는 교가의 돈오점수 사상이다. 

  * 이 믿음과 이해는 ‘이해적 깨달음’의 돈오를 말함이니 이는 교가의 돈오점수 사상이다.

 

【13-5】 ①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입로入路하여 일념에 회광回光하여 자기의 본성을 득견得見하여 이 성지性地에 원래로 번뇌가 없으며 무루無漏한 지성智性이 본연本然으로 구족하여 곧 제불과 더불어 조금도 다르지 않는 고로 돈오라 한다. 비록 본성이 제불과 다르지 아니함을 오득悟得하였으나, 무시無始의 습기習氣를 창졸히 제거하기 난難하므로 오悟를 의지하여 수습修習한다. 점점 훈습薰習하여 그 공功이 성취되어 성태聖胎를 장양長養하여 구구久久에 성성成聖할새 점수라 하느니라. ①忽被善知識의 指示入路하야 一念回光하야 見自本性하야 而此性地에 元無煩惱하며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하야 卽與諸佛로 分毫不殊일새 故로 云 頓悟也요 雖悟本性이 與佛無殊나 無始習氣를 卒難頓除故로 依悟而修하야 漸薰功成하야 長養成胎하야 久久成聖일새 故云 漸修也니라. (①『修心訣』, 『大正藏』48, p.1006c)

 

  * ①홀연히 훌륭한 스승[善知識]의 지시로 수행의 길에 들어서 한 생각을 돌이켜 자기의 참다운 본성을 체득해 ‘본성의 자리[性地]’에 원래로 번뇌가 없으며, 망상과 번뇌가 없는 본래 모습 그대로 모두가 ‘본성의 자리[性地]’에 갖추어져 곧 모든 부처님들과 더불어 조금도 다르지 않기에 ‘몰록 깨침[頓悟]’이라 한다. 비록 본성이 모든 부처님과 다르지 아니함을 깨달았으나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가지고 있던 습관과 기질을 순식간에 없애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해 수행한다. 점점 수행의 기운에 몸에 배어 그 공덕이 성취되어 ‘성스러운 깨달음의 토대[聖胎]’를 오랫동안 기르고 기르면 성인이 되므로 점수라 한다. (『수심결』)

 

【평석】 전장前章(주1)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견성은 현증원통現證圓通하여 돈초10지頓超十地한 구경각인 원증圓證을 말한다. 그런데 10신초인 해오解悟로 견성이라 함은 불조의 언교言敎에 전연 위배된 독창적 신설新說이다. 여하한 논설도 불조의 언교言敎에 배치되면, 불교인으로서는 단연히 이를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것처럼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다는 것은 결함 없이 몰록 깨달아 일시에 10지의 경지를 뛰어넘어 궁극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10신초인 ‘이해적 깨달음[解悟]’을 참다운 본성을 깨달은 것으로 간주함은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독창적인 새로운 주장이다. 여하한 말이나 글도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에 배치되면 불교인으로서는 단연히 이를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강설】 “성품 자리에 원래 번뇌가 없으며 번뇌 없는 지혜 성품이 본래 갖추어져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을 규봉 스님은 돈오라 했다. 그러나 견성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보조 스님의 가장 큰 과오는 규봉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담하게도 이것을 견성이라 했다는 점이다. 번뇌 망상이 있더라도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다. 예를 들면 거울에 먼지가 가득 앉아 있으면 밝은 빛이 드러나진 않지만 거울의 밝은 성품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해오解悟는 먼지가 가득 앉았지만 거울 자체의 밝은 성품만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허나 이를 견성이라 할 수는 없다. 선문에서는 먼지를 완전히 닦아내 거울의 밝은 빛이 삼라만상을 자유자재로 두루 비추는 것을 두고 견성이라 했다. 그러니 해오의 견성이야 닦음이 필요하겠지만 선문의 견성, 즉 증오는 다시 닦음이 필요치 않다.

 

【13-6】 ①자성이 본래로 공적空寂하여 불과 다르지 아니함을 돈오하였으나, 이 구습舊習을 졸연히 돈제頓除하기 심난甚難하다. 그런 고로 역경逆境이나 순경順境에 봉착하면 진희瞋喜와 시비가 치연히 기멸起滅하여 객진客塵인 번뇌망상이 전일前日과 다름없다. 만약에 반야지혜로 가공하여 착력著力하지 않으면, 어찌 무명을 대치對治하여 대휴헐지大休歇地를 얻으리오.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비록 불타와 동일함을 돈오하였으나 다생의 습기習氣가 심심甚深하다. 풍세風勢는 정지하나 파도가 오히려 흉용洶湧하고 성리性理는 현전하였어도 망심妄心이 오히려 침입한다. 그런 고로 오후悟後에 장구히 모름지기 반조심찰反照審察하여 망념이 홀연히 생기하거든 전연히 수거隨去하지 말고 손감損減하고 또 손감損減하여 적연무위寂然無爲함에 도달하여야 비로소 구경이니 천하 선지식의 오후悟後 목우행牧牛行이 이것이다. ①頓悟自性이 本來空寂하야 與佛無殊나 而此舊習을 卒難頓除故로 逢順逆境하면 瞋喜是非가 熾然起滅하며 客塵煩惱가 與前無殊하나니 若不以般若로 加工著力하면 焉能對治無明하야 得大休歇之地리오 如云頓悟雖同佛이나 多生習氣深이라 風靜하야도 波尙湧이요 理現하야도 心猶侵이라하니 故로 悟後에 長須照察하야 妄念이 忽起어든 都不隨之하고 損之又損하야 以至於無爲하야사 方始究竟이니 天下善知識의 悟後牧牛行이 是也라. (①『修心訣』, 『大正藏』48, p.1007bc) 

 

  * ①자신의 본성이 텅 비고 없어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문득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몸에 배어 있는 습관과 기질을 일시에 없애기 매우 어렵다. 이 때문에 자기의 마음에 부합하거나 부합하지 않는 대상을 만나면 좋아하거나 화를 내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미음이 불 타오르듯이 일어나거나 사라지는 등 손님 같은 번뇌에 시달리는 것은 옛날과 다르지 않다. 만약 반야지혜로 노력하고 힘을 모으지 않으면 어떻게 무명을 없애 ‘할 일 없는 크나큰 쉼의 경지’에 이르겠는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중생들이) 부처님과 같음을 깨달아도 여러 생을 거치며 쌓인 습관과 기질이 매우 깊게 몸과 마음에 배어, 바람이 없어도 파도가 치듯 참다운 본성의 이치가 드러나도 그릇된 마음이 오히려 (마음에) 침입한다. 따라서 깨달은 뒤 모름지기 스스로에 내재된 참다운 본성을 들여다보아 그릇된 생각이 일어나면 따라가지 말고 줄이고 줄여 그릇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해야 비로소 ‘궁극의 경지[究竟]’이다. 훌륭한 스승들의 수행은 이와 같다. (『수심결』)

 

【평석】 해오解悟는 추중망상麤重妄想을 벗어나지 못한 허환망경虛幻妄境이므로, 객진번뇌가 전일前日과 같이 치연히 기멸起滅하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오후悟後의 점수다. 선문에서는 추중망상麤重妄想은 말할 것도 없고, 제8의 미세까지 영단永斷한 구경무심의 대휴헐처大休歇處가 돈오이며 견성이므로 망멸증진妄滅證眞한 무심 무념 무위 무사의 금강대정金剛大定을 보임하는 것이 장양성태長養聖胎이다. 그러므로 증證과 해解의 상반된 내용을 견성이라고 혼동함은 일대 착오이다. 물론 교가에서는 객진번뇌가 여전한 해오를 돈오라고 주장한 이상, 번뇌 망상을 제거하여 대휴헐지大休歇地에 도달하여야 하므로 점수문漸修門이 필요하다. 그러나 선문정전禪門正傳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망멸증진妄滅證眞한 대휴헐처大休歇處가 돈오이며 견성이므로, “재득견성纔得見性하면 당하무심當下無心하여 약병藥病이 구소俱消하고 교관敎觀을 함식咸息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따라서 해오의 점수는 필요 없다. 그러니 내용이 상반된 선문원증禪門圓證의 오悟와 교가해오敎家解悟의 돈오를 혼동해 수도정로修道正路를 파괴함은 불조정전佛祖正傳의 대죄과大罪過이다. 

 

  * ‘이해적 깨달음’은 거칠고 거친 그릇된 생각조차 벗어버리지 못한 ‘허망하고 환상 같은 그릇된 대상[虛幻妄境]’이므로, 객진번뇌가 예전처럼 불 타오르듯이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점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깨달음 이후 닦는 것[悟後漸修]’이다. 선문에서는 거칠고 거친 그릇된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제8 아뢰야식의 미세한 번뇌까지 영원히 끊어야 궁극의 그릇된 생각 없는 크나큰 휴식처에 도달한 것이 되며, 이것이 바로 몰록 깨닫는 것이자,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다. ‘그릇됨을 소멸시키고 참다움을 증득한[妄滅證眞]’ 잡념 없는 마음[無心], 미혹한 생각이 없는 마음[無念], 작위적으로 하는 것이 없는 마음[無爲], 분별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마음[無事]의 금강석처럼 단단한 선정을 보임하는 것이 ‘성스러운 깨달음의 토대[聖胎]’를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득[證]’과 ‘이해[解]’의 서로 다른 내용을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라고 혼동함은 중대한 착오이다. 물론 교가에서는 객진번뇌가 여전한 해오를 돈오라고 주장한 이상, 번뇌 망상을 제거하여 ‘할 일 없는 크나큰 쉼의 경지[大休歇地]’에 도달하여야 하므로 점수문이 필요하다. 그러나 선문의 올바른 전통[禪門正傳]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그릇됨을 소멸시키고 참다움을 증득한 ‘할 일 없는 크나큰 쉼의 경지[大休歇地]’가  몰록 깨침의 경지이고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므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면 곧바로 그릇된 생각이 없는 마음이 되어 약과 병이 모두 사라지고 교와 관이 모두 소멸된다.”고 단언한 것이다. 따라서 해오의 점수는 필요 없다. 그러니 ‘결함 없는 깨달음[圓證]’을 말하는 선문과 ‘이해적 깨달음[解悟]’을 말하는 교가의 돈오를 혼동해 수행하는 올바른 길을 파괴하면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올바로 전한 것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다.  

 

【강설】 거울의 본성인 밝음은 먼지가 있고 없음과 상관없듯 중생의 본성인 진여자성은 번뇌가 있고 없음과 상관없다. 보조 스님은 이를 돈오 견성이라 하였고, 먼지를 제거하듯 망상을 제거하는 것을 일러 오후목우행悟後牧牛行이라 했다. 그러나 종문의 목우행은 그렇지 않다. 보임무심保任無心, 먼지를 완전히 닦아 삼라만상을 자유자재로 비추는 맑은 거울을 잘 보존하는 것을 일러 보임과 목우행이라 했다. 결코 망상을 끊고 습기를 제거하는 것을 목우행이라 하지 않았다. 그러니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선문의 정안종사들과 보조 스님의 견해는 분명 다르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할 일도 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마조 스님은 견성하고 돈오하면 병도 약도 다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규봉 스님은 깨달았어도 교와 관, 정과 혜를 익혀야 한다고 했다. 두 분의 깨달음을 비교해보자면, 마조 스님은 구경각을 성취해 병이니 약이니 일체가 필요 없는 분이었고, 규봉 스님은 깨달았다고는 하나 자기가 병이 여전하니 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눈 어두운 규봉이 어떻게 마조를 바로 볼 수 있었겠는가? 마조의 깨달음도 자기와 같은 정도리라 짐작 했겠지만 그것은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에 불과한 소리다.

 

【13-7】 ①규봉圭峰이 선오후수先悟後修하는 의의를 아주 자세히 설명하였다. 결빙結氷된 지당池塘이 전체로 유수流水임을 알아서 양기陽氣를 차용하여 소융銷融시키고, 범부중생이 즉시卽是 불타임을 오해悟解하여 법력法力을 의자依資하여 훈수薰修한다. 빙괴氷塊가 소용銷鎔되면 수류水流가 윤활潤滑하여 바야흐로 관개灌漑와 세척洗滌의 공과功果를 얻고, 망념이 멸진하면 심령心靈이 원통圓通하여 현통玄通한 신광神光의 대용大用이 응현應現한다. ①圭峰이 深明先悟後修之義曰 識氷池而全水하야 借陽氣而銷鎔하고 悟凡夫而卽佛하야 資法力而薰修라 氷消則水流潤하야 方呈漑滌之功하고 妄滅則心靈通하야 應現通光之用이니라. (①『修心訣』, 『大正藏』48, p.1006b) 

 

  * ①규봉이 먼저 깨닫고 이어 수행하는 의미를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얼어붙은 연못 전체가 흐르는 물임을 알아 햇빛과 같은 기운을 빌려 녹이고, 범부중생이 바로 부처님과 같은 존재임을 알아 가르침의 힘에 의지해 수행을 쌓도록 한다. 얼음 덩어리가 녹으면 물 흐름이 원활하여 바야흐로 물을 대고 씻어내는 효과를 얻고, 그릇된 생각이 소멸되면 신령스런 마음이 원만하게 통해 당연히 막힘없는 빛의 크나큰 작용이 나타난다. (『수심결』)  

 

【평석】 견고한 결빙結氷이 전부 소용銷鎔되어 활발活潑한 유수流水로 통용通用하고, 번뇌 망상이 확연소멸廓然消滅하여 무구無垢한 진여를 증득한 것이 견성이며 원증圓證이므로 견성하면 망멸증진妄滅證眞하고 빙융수재氷融水在라 확언하였다. 그러니 빙괴氷塊가 본래 유수流水임을 분명히 알았으나 빙괴氷塊는 여전함과 같이 중생이 원래 불타임을 확실히 해오解悟하였으나 망상이 기멸起滅함을 돈오이며 견성이라 하여 빙괴氷塊를 소용銷鎔하듯이 망상을 제거하는 점수漸修를 선문정전禪門正傳이라고 극력 주장함은, 참으로 선문정전禪門正傳과 상반된 망론억설妄論臆說이다.

 

  * 견고한 얼음이 전부 녹아 부드럽게 움직여 흐르는 물로 변하고, 번뇌 망상이 텅 비게 소멸되어 때[垢]가 없는 ‘진정한 본성[眞如]’를 증득한 것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자 결함 없이 본성을 증득한 것이므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면 ‘그릇됨을 없애고 참다움을 증득[妄滅證眞]’해 얼음이 녹아 물이 있는 것임을 확언하였다. 그러니 얼음 덩어리가 본래 흐르는 물임을 분명히 알았지만 얼음 덩어리는 여전함과 같이, 중생이 원래 부처님임을 확실히 이해해도 그릇된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깨달음이고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라 여겨, 얼음 덩어리 녹이듯 그릇된 생각을 제거하는 점수를 선문에서 올바르게 전해 내려온 가르침이라고 극력 주장함은 참으로 망령되이 억지로 만든 주장이다.

 

【13-8】 ①비유를 들면 혹한인 동절冬節에 유수流水가 응결하여 견빙堅氷이 되었다가, 따뜻한 시기에 이르면 견빙堅氷이 소석消釋 되어 유수流水로 환원함과 같다. 중생이 미혹할 때에는 본성이 응결하여 망심이 되었으나 중생이 정오正悟할 때에는 망심이 소석消釋하여 본성으로 환원한다. ①譬如寒月에 結水爲氷이라가 及至暖時에 釋氷爲水하나니 衆生이 迷時에 結性成心이라가 衆生이 悟時에 釋心成性이니라. (①南陽慧忠, 『傳燈錄』28, 『大正藏』51, p.438a) 

  * ①예를 들면 추운 달에 물이 얼어 얼음이 되었다가 따뜻한 시기가 되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것처럼 중생이 미혹할 때 ‘본성[性]’이 얼어 ‘분별하는 마음[心]’이 되었다가 중생이 깨달으면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고 본성을 회복하는 것과 같다. (『전등록』)

 

【평석】 망심의 견빙堅氷이 완전히 소멸하여 유통자재流通自在한 활수活水가 되어야 돈오이며 견성이니, 견빙堅氷 그대로가 본시 유수流水이며 망심 이대로 원래 진성眞性인 줄 안 것으로써 돈오이며 견성이라 함과는 남북의 차가 있다. 

  * 그릇된 생각의 견고한 얼음이 완전히 녹아 자유롭게 흐르는 살아있는 물이 되어야 돈오이며 견성이다. 견고한 얼음 그대로가 본래 흐르는 물이며 그릇된 생각 이대로가 원래 참다운 본성인 줄 아는 것이 돈오며 견성이라 함과는 큰 차이가 있다. 

 

【13-9】 ①일체 악업과 탐진치인 무명번뇌와 각종의 진로塵勞 등은 다 자성이 없고, 진여본심을 미혹함으로 인하여 망념에 의지하여 있다. 정수淨水가 한기寒氣로 인하여 응결하여 견빙堅氷이 된 것과 같다. 이 진여본심을 정오正悟하면 일체망념이 그 정오正悟를 따라서 소멸하니, 견빙堅氷이 혜일慧日의 조열照熱로 인하여 다시 정수淨水로 귀복歸復함과 같다. 그런데 지금 빙괴氷塊의 처리를 말하는 것은 진실로 미혹한 인간 중에 한층 더 미혹한 인간이다. ①一切惡業과 貪瞋痴인 無明煩惱와 種種塵勞等은 俱無自性이요 皆由迷自心故로 依妄而有니라 如水因寒하야 結而爲氷이니 此心을 旣悟則諸妄이 乘其所悟而消하야 如氷이 因慧日所照하야 復化爲水어늘 今云氷復何處著고하면 此寔迷中迷人이니라. (①『中峰廣錄』 十一之中 「山房夜話」 中, 『頻伽藏經』85, p.273)

 

  * ①모든 악업과 탐·진·치 등 무명과 갖가지 번뇌 등은 모두 ‘변함없는 자성이 없다[無自性]’. 모두 미혹한 자기의 마음 때문에 망령되게 있는 것이다. 마치 물이 겨울에 얼어 얼음이 되는 것처럼. 이 마음을 깨달으면 바로 모든 망령된 생각들이 그 깨달음을 타고 소멸된다. 마치 지혜의 태양이 비추자 다시 물로 변하는 것처럼. 그런데 지금 얼음 덩어리를 어느 곳에 갖다 놓을까를 말하는 것은 미혹한 사람 가운데 미혹한 사람이다. (『중봉광록』) 

 

【평석】 이는 망멸증진妄滅證眞하고 빙소수융氷消水融한 종문정안宗門正眼들의 일관된 통설이다. 그리하여 망진빙소妄盡氷消가 아니면 이는 미몽迷夢이어서 오悟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미중미迷中迷의 망설妄說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 이는 ‘그릇됨을 없애고 참다움을 증득[妄滅證眞]’하며 얼음을 녹여 물로 융화시킨 종문의 올바른 선지식들이 일관되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망령됨이 모두 소멸되고 얼음이 녹지 않으면 이는 미혹한 꿈속에 있는 것으로 깨달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미혹함 중의 미혹함이자 그릇된 설명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강설】 얼음이 완전히 녹아 융통자재한 것이 깨달음이고 견성이다. 얼음을 녹이는 방법을 논하고 더디고 빠름을 논하고 있다면 그것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미혹 중의 일이다. 이는 선문의 정통사상이다. 내가 자주 보조 스님을 비판하고 『수심결』의 오류를 지적하는데 내가 무슨 장한 점이 있다고 사견을 목소리 높여 천명하겠는가? 선문의 정통사상에서 벗어났으니 잘못된 사상을 고치자는 것이다. 중봉 스님은 보조 스님과는 감히 견줄 수조차 없는 고덕이다. 수많은 조사 중에서도 별처럼 빛나는 분이다. 그런 분이 어찌 헛말을 하였겠는가? 깨달았다면서 망상을 제거하는 방법을 논하고 제거함에 따라 얻는 소득을 논하는 사람은 미혹한 사람 가운데서도 많이 미혹한 사람이다. 어찌 중봉 스님만 이런 말씀을 하였겠는가? 이는 역대 조사 스님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이경미 작 

 

 

【13-10】 ①규봉이 선오후수先悟後修의 뜻을 총판摠判하여 말하였다. 차성此性이 원래로 번뇌가 없으며 무루無漏한 지성智性이 본연히 구족하여 불타와 더불어 차이가 없음을 돈오하여 이를 의지하여 수습修習하는 사람은 이를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하며 여래청정선이라 명칭한다. 만약에 능히 염념念念에 수습하면 자연히 백천 삼매를 점점 획득하나니, 달마문하達磨門下에서 전전展轉하여 대대로 상전相傳하는 것이 곧 이 선禪이라 하였다. 그런즉 돈오와 점수의 2의二義는 승차乘車의 2륜二輪과 같아서 한 개도 없어서는 안 된다. ①圭峰이 摠判先悟後修之義曰 頓悟此性이 元無煩惱하며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하야 與佛無殊하나니 依此而修者는 是名最上乘禪이며 亦名如來淸淨禪也라 若能念念修習하면 自然漸得百千三昧하나니 達磨門下에 展轉相傳은 是此禪也라 하니 頓悟漸修之義는 如車二輪하야 厥一不可니라. (①『修心訣』, 『大正藏』48, p.1007c) 

 

  * ①규봉이 선오후수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이렇게) 말했다. ‘이 본성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번뇌 없는 지혜로운 본성이 본래 다 갖춰져 있어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이것에 의지해 수행하는 것을 최상승선이라 말하며 또한 여래청정선이라 한다. 만약 생각 생각에 이 점을 닦는다면 자연히 점차 수많은 마음 집중[三昧]를 터득한다. 달마 이래로 전해 내려온 선은 바로 이것이다.’ 돈오와 점수가 의미하는 것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 같아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수심결』)

 

【평석】 달마정전達磨正傳의 선문 거장들은 여출일구如出一口로 무심무념인 구경각의 원증圓證으로써 돈오와 견성이라 하였으며, 10지·등각을 초월하여 미세망념이 멸진한 불지佛地의 무생법인을 정오正悟라 여래청정선이라 하였다. 객진번뇌가 여전히 다름이 없는 해오로써 달마상전達磨相傳의 선종이라 함은 선종을 모욕하는 일대 망언이다. 

 

  * 달마 이래로 그 가르침을 이어온 선문의 거장들은 마치 한 입으로 말하는 것처럼 ‘그릇된 생각 없는 궁극의 경지’를 ‘결함 없이 깨닫는 것’이 ‘돈오’이며 ‘견성’이라고 말했다. 10지와 등각의 경지를 초월해 미세한 번뇌까지 모두 없애고 ‘태어남이 없는 진리[無生法忍]’를 터득한 묘각의 경지를 올바른 깨달음이라 했고 여래청정선이라 했다. ‘손님 같은 번뇌[客塵煩惱]’가 여전히 있는 ‘이해적 깨달음[解悟]’을 달마 이래 전해 내려온 선종이라 함은 선종을 모욕하는 크나큰 망언이다. 

 

【강설】 『돈오입도요문』에 말하길, “돈이란 일체망념을 끊어 없앤 것이요 오란 깨쳤다는 자취마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런 구경의 무심이 바로 돈오이고 견성이다. 무심은 커녕 망상이 치성한 해오를 어찌 돈오라 하고 견성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무념무심의 구경각, 『기신론』에서 마명보살이 말했듯 보살지가 다해 제8 아뢰야식의 미세한 망상까지 완전히 끊어지면 그때서야 심성을 올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조 스님도 “10지 등각을 초월해서 미세망념이 멸진한 불지의 무생법인을 증오라 여래청정선이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마조는 묘각의 증오를 돈오라 하고 보조나 규봉은 10신초의 해오를 돈오라 했으니 과연 누구를 따라야 할까? 선문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마조 같은 분을 추종해야지 중간에 변질된 규봉이나 보조의 견해를 따라서야 되겠는가? 따라서 해오견성解悟見性을 부르짖는다면 그것은 달마정전을 모를 뿐만 아니라 달마 정전을 모독하는 망언이라 하겠다.

 

【13-11】 ①이 돈오점수의 양문兩門은 곧 천성千聖의 궤철軌轍이니, 종상從上의 제성諸聖이 선오先悟하여 후수後修하고 수습함을 인하여 증득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①此頓漸兩門은 是千聖軌轍也니 從上諸聖이 莫不先悟後修하며 因修乃證이니라. (①『修心訣』, 『大正藏』48, p.1006b) 

  * ①이 돈오점수의 돈오와 점수는 모든 성인이 밟고 간 법칙이다. 예로부터 모든 성인이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아 수행으로 인해 깨달음을 증득하지 않는 분이 없다. (『수심결』)

 

【평석】 이는 해오를 근본으로 하는 교가에는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해오를 부정하고 원증圓證에 직입直入하는 선문에는 비상짐독砒霜鴆毒(주2)이다. 만약 이것을 선문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달마정전達磨正傳은 꿈속에서도 견문치 못한 것이다.

 

【강설】 3현 10지의 차제를 밟아 올라가는 것은 교이고, 한 번에 훌쩍 뛰어 여래지로 곧장 들어가는 것은 선이다. 그러니 돈오 후에 점수한다는 주장은 교종에서는 매우 적당하겠지만 선종은 결코 아니다.

 

【13-12】 ①돈오점수는 교리에 심심甚深히 해당하고, 돈오돈수는 종경宗鏡 즉 선종에 진정 적당하니라. 명경이 본래 청정한지라 어찌 진애塵埃)를 불식拂拭할 필요가 있으리오 하였으니, 이는 육조가 본성을 직현直顯하여 그 점수漸修를 타파함이니라. ①頓悟漸修는 深諧敎理요 頓悟頓修는 正當宗鏡이니라. 明鏡이 本來淨이라 何用拂塵埃리오하니 此是六祖가 直顯本性하야 破其漸修니라. (①『宗鏡錄』36, 『大正藏』48, p.626c) 

  * ①돈오점수는 교문에 매우 적합하고 돈오돈수는 바로 선문에 해당된다. 밝은 거울이 본래 깨끗한데 무엇 때문에 먼지를 털겠는가? 육조가 곧바로 참다운 본성을 드러내고 점수를 논파한 것이 이것이다. (『종경록』)   

 

【평석】 이는 금사金沙와 옥석玉石을 선별善別하는 명안明眼의 정론이다. 해오解悟는 교가의 수행점로修行漸路요, 원증圓證은 선문의 오도첩경悟道捷徑이니 이를 혼동하면 자기도 그르치고 남도 그르치게 된다. 

  * 이는 금과 모래, 옥과 돌을 잘 구별한 눈 밝은 선지식들의 올바른 견해이다. ‘이해적 깨달음’은 교가의 점수의 길이며 결함 없이 몰록 깨닫는 것은 선문이 지향하는 지름길이다. 이를 혼동하면 자기도 그르치고 남도 그르치게 된다.   

 

【강설】 “때때로 털고 닦아야 한다.”는 신수神秀(주3)의 주장을 격파한 육조의 말씀이 이를 증명한다.(주4) 그래서 오조 홍인 스님은 닦을 것이 남아 있는 신수에게 법을 전하지 않고, 완전히 깨쳐 닦을 필요가 없는 육조에게 달마의 법을 전한 것이다. 따라서 달마의 법에는 돈頓이 있을 뿐 점漸이란 있을 수 없다. 돈오점수는 선가의 법이 아니라 교가의 법임을 영명 연수 선사가 분명히 밝히신 것이다.

 

【13-13】 ①미혹한 인간은 점점 계합契合하고 오달悟達한 고인高人은 돈연頓然히 수단修斷한다. ②자성으로 자오自悟하여 돈오하고 돈수하여 또한 지위점차地位漸次가 없느니라. ①迷人은 漸契하고 悟人은 頓修하느니라. ②自性自悟하야 頓悟頓修하야 亦無漸니라. (①『壇經』, 『大正藏』48, p.353a. ②『壇經』, 『大正藏』48, p.358c) 

  * ①미혹한 사람은 조금씩 계합하고 깨달은 사람은 단번에 수행해 마친다. (『육조단경』) ②자기의 본성을 스스로 깨닫고 몰록 깨치고 단번에 수행을 마치며 또한 수행의 경지가 차례로 나아가는 것은 없다. (『육조단경』) 

 

【평석】 달마직전達磨直傳인 육조의 정법은 유돈무점唯頓無漸이다. 점문漸門은 미계迷界에서만 있을 뿐이요 오경悟境은 아니므로, 육조는 오직 돈오돈수의 원증圓證인 견성만을 선설宣說하였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를 내용으로 하는 원증圓證만이 육조정전六祖正傳이니 돈수원증頓修圓證이 아니면 오悟가 아니다. 

  * 달마로부터 내려온 육조의 가르침은 오직 돈頓만 있고 점漸은 없다. 점문은 미혹한 경계에서만 있을 뿐이요 깨달은 경지는 아니다. 육조는 오직 돈오돈수의 결함 없는 깨달음인 견성만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를 내용으로 하는 결함 없는 깨달음만이 육조의 올바른 가르침이니 ‘단번에 수행해 마치는 몰록 깨침[頓修圓證]’이 아니면 ‘깨달음[悟]’이 아니다.   

 

【강설】 깨칠 때 일체망상이 다 없어졌으면 참으로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이다. 닦으려야 닦을 수도, 닦을 것도 없으니 3현 10성의 지위점차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점수를 말하고 지위점차를 논하는 이는 달마의 후손이라 할 수 없다. 자성을 바로 알고 바로 깨친다면 돈오할 때 일체가 다 끊어지므로 부처도 서지 못하고 조사도 서지 못한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견성이란 말 또한 서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점수를 논하겠는가? 돈오돈수법을 전함을 이처럼 육조 스님께서 청천백일처럼 밝혀놓으셨다. 선문의 종조라 할 달마와 육조의 말씀을 표방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굴 표방하겠다는 말인가? 육조 스님의 말씀처럼 점문은 미혹한 이들의 경계이지 깨달은 이의 경계는 아니다. 만일 점수를 논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미혹의 세계에서 헤매는 자이며 육조의 후손이 아니다.

 

【13-14】 ①돈오돈수라 함은 이는 상상지上上智를 설함이니, 근성根性과 낙욕樂欲이 전부 수승하여 일문一聞하면 천오千悟하여 대총지大摠持(주5)를 증득하여서 일념도 불생하여 전후제前後際가 돈단頓斷한다. 장혹障惑을 단제斷除함은 일려사一綟絲를 참단斬斷하는 것과 같아서 만조萬條를 일시에 돈단頓斷하며, 성덕聖德을 원수圓修함은 일려사一綟絲를 염색, 만조萬條를 일시에 돈색頓色한다. 이 사람의 3업三業은 유독 명료하여 타인은 엿보지 못하나니, 또한 사적상事跡上에서 논하면 우두융 대사牛頭融大師의 유類다. ①頓悟頓修는 此說上上智니 根性欲欲이 俱勝하야 一聞千悟하야 得大摠持하야 一念不生하야 前後際斷하느니라 斷障은 如斬一綟絲하야 萬條를 頓斷하며 修德은 如染一綟絲하야 萬條를 頓染也라 此人三業은 唯獨自明了하야 餘人所不見이니 且就事跡而言컨대 如牛頭融大師之類也니라. (①『都序』, 『大正藏』48, pp.407c-408a)

 

  * ①돈오돈수는 근기가 높고 높은 사람을 위해 말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뛰어난 자질과 덕성을 갖추어 하나를 들으면 천개를 깨닫고 ‘가르침을 잘 기억[大摠持]’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를 모두 끊는다[前後際斷]. 장애를 제거함이 마치 한 올의 실을 자르는 것처럼 수많은 가닥을 일시에 끊는 것과 같고, 덕성을 닦음이 마치 한 올의 실을 염색하듯 단박에 수많은 실을 물들이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의 삼업은 오직 자신만이 알며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며, 이런 사람의 사적은 우두 법융 선사 같은 부류가 해당된다 할 수 있다. (『도서』)

 

【평석】 돈오돈수는 일념불생 전후제단前後際斷을 내용으로 한다. 달마상전達磨相傳의 견성은 망멸증진妄滅證眞에 있으므로, 달마문손達磨門孫의 정안종사 중에 일념불생의 무심삼매無心三昧를 실증하지 않은 자 없다. 그뿐만 아니라 설사 일념불생이 되어도 일념불생의 정나라처淨裸裸處에 주착住著하면 대사불활大死不活의 승묘경계勝妙境界로서 이를 배제하나니 일념불생의 깊은 굴을 뛰쳐나온 일념불생의 구경무심이 정안인 것이다. 그리하여 달마선은 일념불생의 돈수에 있거늘, 기멸부정起滅不停하는 해오의 점수를 달마선이라 주장함은 천고千古의 대과오이다. 그리고 또한 돈수는 우두牛頭같은 걸출에만 속하고 달마상전達磨相傳은 전부 점수라 하니, 달마문하達磨門下는 전부 우두보다 하열하다는 결론이 되니 가 일층 가소로운 일이다. 달마정전達磨正傳 중에 우두보다 하열한 자는 없을 뿐 아니라, 황벽은 말하기를, “우두가 횡설수설하나 향상일규向上一竅는 꿈에도 보지 못한다.”고 지탄하였다. 이로써 달마선이 점수에 있다 함은 억설임을 알 것이다. 

 

  * 돈오돈수는 한 생각도 나지 않고[一念不生] 과거와 미래를 끊는 것[前後際斷]을 내용으로 한다. 달마가 전한 ‘참다운 본성을 체득[見性]’한다는 것은 ‘그릇됨을 없애고 참다움을 증득함[妄滅證眞]’에 있으므로, 달마의 제자로 올바른 안목을 가진 선지식들 가운데 한 생각도 나지 않고 ‘그릇된 생각 없는 지극한 그 경지[無心三昧]’를 깨닫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설사 일념불생이 되어도 일념불생의 ‘바로 그 경지[淨裸裸處]’에 머물면 크게 ‘죽었다 다시 살아나지 않는 경계[大死不活=勝妙境界]’라 여겨 이를 배제한다. 일념불생의 깊은 굴을 뛰쳐나온, ‘그릇된 생각이 없는 궁극의 마음[究竟無心]’이 바로 올바른 경지이다. 그리하여 달마선은 일면불생의 돈수에 있거늘 잡념이 끝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起滅不停] ‘이해적 깨달음[解悟]’을 추구하는 점수를 달마선이라 주장함은 크나큰 잘못이다. 그리고 또한 돈수는 우두 같은 걸출에만 속하고 달마가 전한 가르침은 전부 점수라 하는데 만약 이렇다면 달마 문하는 전부 우두 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되는데 이는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달마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계승한 수행자 가운데 우두 보다 못한 사람은 없을 뿐 아니라, 황벽은 “우두가 횡설수설하나 ‘궁극의 이치[向上一竅]’를 꿈에도 보지 못한다.”고 지탄했다. 이로써 달마선이 점수에 있다 함은 규봉이 마음대로 ‘지어낸 이야기[臆說]’임을 알 수 있다.  

 

【강설】 규봉이나 보조의 견해에 따른다면 돈오점수가 선종의 정석인 것처럼 되는데 이는 큰 착오다. 달마 문하 5가7종의 대종사치고 ‘일념불생一念不生 전후제단前後際斷’의 무심경계를 거치지 않고 견성한 이는 한 분도 없다. 또한 승묘경계인 ‘일념불생 전후제단’의 무심경계마저 제8 마계라 하여 다시 그 자리에서 크게 깨치고 크게 살아나야 정안종사라 하였다.

 

  규봉은 돈오돈수는 너무 어려워 우두 법융 선사 같은 분에게만 해당되고 다른 사람은 모두 돈오점수한 이라 여겼다. 그러나 살펴보면 달마 문하 정안종사들은 한 결 같이 돈오돈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가 뚝 끊어진 무심경계마저 뛰어넘은 분들이 종문의 정안종사이다. 그래서 “돈이란 일체망념을 끊어 없앤 것이요, 오란 깨쳤다는 그 자취마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돈오점수를 달마정전이라 한다면 얼마나 큰 착오인가? 달마정전의 견성이란 곧 돈오돈수로서 온갖 병이 다 나아 다시는 약이 필요 없는 자유자재한 사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규봉은 『도서』에서 우두를 높이 쳐 “돈오돈수한 이는 우두와 같은 분에게 한정된다.”고 하였다. 허나 『전등록』을 살펴보면 황벽 선사는 “4조 문하의 우두융 대사가 설법은 종횡무진으로 하였지만 향상일로向上一路의 문빗장은 몰랐다.”며 달마정전의 깊은 뜻은 몰랐다고 일침을 가하였다. 모름지기 이런 안목을 갖추어야만 달마와 육조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우두를 하늘의 별처럼 여기는 사람과 우두를 발가락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사람, 이 둘 중 과연 누가 장한 사람일까? 무심의 신묘한 경계마저 발로 걷어 차버리는 출격대장부가 되어야 한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팔이고 다리고 온전한 구석 한 곳 없으면서 깨쳤느니 도리를 알았느니 떠들고 다닌다면 얼마나 우스운 노릇인가? 정안종사인 황벽은 우두 같은 분도 바로 깨치지 못했다고 일격에 배척했는데 우두보다 못한 이들이야 말해 무엇 하랴?

 

【13-15】 ①각각 반조反照하여 보아서 유병有病하면 치료하여야 하고 무병無病하면 용약用藥할 필요가 없느니라. ①各各反照하야 有病卽治요 無病勿藥이니라. (①『都序』, 『大正藏』48, p.411b) 

  * ①각자가 돌이켜 관찰해 병이 있으면 치료하고 병이 없으면 약도 필요 없다. (『도서』)

 

【평석】 해오는 유망유병有妄有病이므로 점수의 법약法藥이 필요하다. 그러나 견성은 무망무병無妄無病인 원증圓證이므로 용약用藥하지 않는다. 

  * ‘이해적 깨달음[解悟]’은 그릇됨이 있고 병이 있으므로 ‘조금씩 닦아 나가는 수행[漸修]’이 필요하다. 그러나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은 그릇됨도 없고 병도 없는 ‘참다운 증득[圓證]’이므로 약이 필요치 않다.    

 

【강설】 병이 있으면 약을 써 치료해야 한다는 규봉의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허나 병이 여전한 이를 온전한 이로 여기거나 온전한 이를 병든 이로 여긴다면 큰 착오다. 종문에서의 보임이란 자유자재한 대무심삼매大無心三昧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 이는 일체의 번뇌 망상이 끊어져 어떤 가르침도 방편도 필요치 않다. 따라서 “깨달은 뒤에 망상을 하나하나 끊는 것이 보임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병이 여전한 자를 온전한 이로 여기는 과오이다. 또한 종문에서의 견성이란 구경각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견성한 후에도 다시 닦음이 필요하다.” 한다면 이는 병 없는 이를 병자라 하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13-16】 ①마조는 돈오문頓悟門에는 비록 근사하나 적당치 못하고 점수문漸修門에는 착오하여 전연 괴려乖戾되었다. ①彼宗(馬祖)은 於頓悟門엔 雖近而未的이요 於漸修門엔 有誤而全乖니라. (①『承襲圖』, 『卍續藏經』110, p.875b)

  * ①마조는 돈오문에는 비록 가까이 갔으나 정확하게 닿은 것은 아니며 점수문에 대해 잘못 알아 어긋났다. (『승습도』)

 

【평석】 규봉의 돈오는 10신十信인 해오며 마조의 돈오는 불지佛地인 원증圓證이다. 규봉은 병이 있으니 고쳐야 하며 마조는 무병하니 약이 필요 없다. 그리하여 규봉은 객진번뇌가 여전히 다름이 없으므로 점수가 필요하나, 마조는 망념을 돈제頓除하여 무생법인을 철증徹證하였으므로 돈수도 무용無用이다. 해오인 규봉의 천견淺見으로서는 마조의 원증심경圓證深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환자인 규봉이 완쾌한 마조를 용약用藥하지 않는다고 비난 공격함은 소아의 맹희盲戱로 천하가 폭소할 일이다. 달마정전達磨正傳은 망멸증진妄滅證眞하여 병차약제病差藥除하였으므로 환자인 규봉은 상대의 가치도 없다. 

 

  * 규봉이 말하는 돈오는 10신인 ‘이해적 깨달음’ 수준이며 마조의 돈오는 부처님의 경지인 ‘결함 없이 깨친[圓證]’ 경계이다. 규봉은 병이 있으니 고쳐야 하며 마조는 병이 없으니 약이 필요 없다. 그리하여 규봉에게는 ‘손님 같은 번뇌[客塵煩惱]’가 여전히 예전과 다름없이 있기에 점수가 필요하나, 마조는 그릇된 생각을 일시에 없애고 ‘태어남 없는 이치[無生法忍]’를 철저하게 깨달았으므로 돈수도 필요 없다. 이해적 깨달음을 주장하는 규봉의 얕은 견해로 마조의 결함 없이 깨달음 깊은 경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나, 환자인 규봉이 완쾌한 마조에게 약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비난 공격함은 어린 아이의 ‘봉사놀이[盲戱]’ 같아 천하가 크게 웃을 일이다. 달마가 올바르게 전한 가르침은 ‘그릇됨을 없애고 참다움을 증득[妄滅證眞]’해 병이 나아 약이 필요 없으므로 환자인 규봉의 말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 

     

【강설】 마조는 병이 다 나아 약이 더 이상 필요 없는 분이지만 규봉은 병세가 여전한 자이다. 마조의 돈오는 일체망상이 다 끊어진 것이지만 규봉의 돈오는 일체망상이 여전하다. 그러니 규봉이 마조를 제대로 보았을 리가 없다. 갖가지 병으로 온몸이 만신창이인 자가 멀쩡한 사람보고 “너는 왜 약을 먹지 않느냐?”며 되레 이상하게 여긴다면 그게 제정신인 사람이겠는가? 남들도 다 자기와 같은 줄 아는 멍청한 소리이다. 규봉이 마조를 비난하는 것이 꼭 그와 같다. 아픈 사람이 멀쩡한 사람을 욕하는 꼴이다.

 

【13-17】 ①또한 철오徹悟하여 실증實證한 형적形跡도 오히려 심중心中에 용납하지 않거든 하물며 신해信解리오. 순전히 이는 식정망견識情妄見이니 그 지도至道의 본체에 친하려 할수록 더욱 소疎하여지고, 근近하려 할수록 더 원격遠隔하여진다. 그리하여 자신도 대도를 회통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타인으로 하여금 회통케 하리오. ①且悟證之跡도 尙不容於心이어늘 何況信解리오 純是情見이니 其於至道之體에 愈親而愈疎하고 益近而益遠하야 自不能會于道어니 安能使人會道之理哉아. (①『中峰錄』 十一之下, 『頻伽藏經』85, p.280) 

 

  * ①또한 깨달음을 증득했다는 그 자취도 오히려 마음에 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거늘 하물며 ‘믿음’과 ‘이해’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믿음과 이해를 말하는) 이런 것들은 오직 범부의 견해이며, (이런 견해로) 깨달음의 지극한 본체에 가까이하면 할수록 (본체와) 멀어지고 (그것에) 근접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멀어질 뿐이다. 자기 자신이 깨달음을 체득하지 못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들이 진리와 이치를 깨닫도록 하겠는가! (『중봉록』)

 

【평석】 선문의 정통사상은 이것이다. 중봉 국사中峰國師는 임제직전臨濟直傳의 정안으로 선문의 표준이다.

구경무심지를 철증하였어도 그 증득한 형적形跡이라도 있으면 정안이 아니다. 해오는 대도大道에 완전히 배치되니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정안을 장폐障蔽하는 최대 병통病痛이므로 선각先覺들이 극력 배격한 것이다. 

 

  * 선문의 정통 사상은 이것이다. 중봉 스님은 임제의 정통 맥脈을 이은 분으로 올바른 선지식이자 선문의 표준이다. ‘그릇된 생각 없는 궁극의 경지[究竟無心地]’를 철저하게 증득했어도 증득했다는 흔적이 있으면 올바른 선지식이 아니다. ‘이해적 깨달음[解悟]’은 진리와 완전히 배치되니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안목[正眼]을 덮는 최대의 장애이다. 그래서 앞서 깨달은 분들이 극력 배격한 것이다.

 

【강설】 백장야호百丈野狐 이야기(주6)에서 보듯 해오를 선이라 견성이라 하며 진정한 깨달음으로 여기는 자들을 선문에서는 아주 고약한 외도와 큰 마구니로 취급했다. 종문의 종사들이 괜한 시빗거리로 싸움을 일으키려고 한 소리가 아니다. 눈을 바로 뜬 이들을 봉사라 하고 봉사를 눈 뜬 이로 여기는 자들을 어찌 그냥 보아 넘기겠는가?

 

【13-18】 ①정해情解한 자는 어언語言이 더욱 공교工巧할수록 본지本旨는 더 암혼暗昏하고, 언어가 더욱 더 기묘할수록 성리性理는 더 혼매昏昧하니라. ①情解之者는 語益工而旨益昏하고 言愈奇而理益昧니라. (①『中峰錄』 十八之上, 『頻伽藏經』85, p.355) 

  * ①범부의 견해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더욱 교묘하게 글을 써나 근본 가르침에는 오히려 더 혼미해지고, 더욱 기묘하게 말하나 이치에는 더욱 어둡다. (『중봉록』) 

 

【평석】 신해信解·오해悟解·정해情解·해오解悟는 동일한 내용이니, 해오가 대도大道에 이렇게 상반되니 참으로 가공할 일이다.

 

【13-19】 ①만약 근본 상으로부터 공부를 하여서 8식八識의 과구窠臼를 타파하고 무명의 굴혈窟穴을 돈번頓飜하면, 일초一超하여서 불지佛地에 직입直入하여 다시는 남은 법이 없나니 이는 상상上上 이근利根의 실증實證한 바이다. 8식의 근본을 미파未破하면 비록 득력得力한 작위作爲가 있어도 이는 전혀 식신識神의 망변사妄邊事이니, 만약에 이로써 진정眞正을 삼는다면 참으로 도적을 오인하여 친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다.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학도學道하는 인사人士가 진眞을 알지 못함은 다만 종전의 식신識神을 오인誤認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량겁래無量劫來의 생사 근본이어늘 우치한 인간은 불러서 본래신本來身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일관一關을 투과透過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 ①若從根本上做工夫하야 打破八識窠臼하고 頓飜無明窟穴하면 一超直入하야 更無剩法하나니 此乃上上利根所證者이라 八識根本을 未破하면 縱有作爲하나 皆識神邊事니 若以此爲眞하면 大似認賊爲子니라 古人이 云 學道之人이 不識眞은 只爲從前認識神이라 無量劫來生死本이어늘 痴人은 喚作本來身이라하니 於此一關을 最爲要透니라. (①憨山, 『夢遊集』2, 『卍續藏經』127, p.225a) 

 

  * ①근본적인 입장에서 수행해 제8식의 소굴을 부수고 무명의 굴혈을 단번에 뒤집으며 곧바로 들어가는 것 이외 다른 가르침은 없다. 이것은 자질이 가장 뛰어난 수행자가 증험한 것이다. 제8식을 근본적으로 파괴하지 않으면 설사 무엇을 해도 모두 범부의 식견으로 일 하는 정도일 따름이다. 이런 일들을 진짜로 여긴다면 도적을 자식으로 여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옛 사람이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진리(참)를 알지 못함은 다만 이전의 정식情識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식은 무수한 세월 동안 윤회의 삶과 죽음을 이어가게 만든 근본이거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를 본래의 몸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이 관문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몽유집』)

 

【평석】 8식의 근본 미세무명을 영단永斷하여 구경을 실증實證하지 않으면 이는 전혀 망식妄識의 환경幻境이요 진오眞悟가 아니니 해오는 참으로 도적을 오인하여 친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은 착각이다.


  * 제8식이라는 미세한 근본 무명을 영원히 끊고 궁극의 경지를 참으로 증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는 모두 범부의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환영 같은 경계[幻鏡]’에 놀아나는 것이며 참다운 깨달음이 아니니 ‘이해적 깨달음[解悟]’은 참으로 도적을 친자식으로 잘못 아는 것과 같은 착각이다.

 

【13-20】 ①정오正悟한 자는 장구한 암흑에서 광명을 만나며 대몽大夢을 홀연히 각성覺惺함과 같아서 일一을 요달了達하매 일체를 요달하여 섬호纖毫도 증애憎愛와 취사하는 정습情習이 흉중胸中에 체류하지 않느니라. ②만약에 조금이라도 정습情習이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 심성心性을 오달悟達함이 원만치 못한 연유이다. 혹 심성을 원만히 오달치 못하면 모름지기 그 원만치 못한 당처當處를 소탕할지니, 특별히 생애를 세워서 확철대오 하여야 한다. 혹자는 심성을 오달하되 미진未盡하였거든 이천수행履踐修行하여 미진함을 궁진窮盡한다 하니, 이는 신초薪草를 안고 화재火災를 소멸하려 함과 같아서 더욱 더 그 불꽃만 더하게 한다. ①正悟者는 如久暗遇明하며 大夢俄覺하야 一了一切了하야 更無纖毫憎愛取捨之習이 滯于胸中이니라. ②若有纖毫라도 情習이 未盡하면 卽是悟心不圓而然也라 或悟心不圓이면 須是掃其未圓之跡이니 別立生涯하야 以期大徹이 可也니라 或謂悟心이 未盡이어든 以履踐盡之라 하니 如抱薪救火하야 益其熾로다. (①『中峰錄』 五之上 「示王居士」, 『頻伽藏經』85, p.225. ②『中峰錄』 十一之中, 『頻伽藏經』85, p.273)

 

  * ①올바르게 깨달은 사람은 마치 오랜 어둠 속에 있다가 밝음을 만난 것처럼 큰 꿈을 순식간에 깨어 하나를 알면 모든 것을 알며, 게다가 터럭만큼의 증오와 애정 그리고 취하고 버리는 습관이 가슴에 걸려 남아 있지 않다. (『중봉록』) ②만약 조금이라도 정에 연연하는 습관이 남아 있으면 깨달음은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 혹은 깨달은 마음이 불완전하면 반드시 불완전한 깨달음의 자취를 쓸어야 하며, 별도의 생애에 크나큰 깨달음을 기약해야 된다. 흔히 ‘깨달은 마음이 미진하면 실천 수행의 미진함을 없애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나, 이는 마치 땔나무를 안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 오히려 불의 기세를 더 키울 뿐이다. (『중봉록』)

 

【평석】 일념불생一念不生 전후제단前後際斷하였어도 그 정나라처淨裸裸處에 주착住著하면, 사료미활死了未活의 불의언구不疑言句가 시위대병是爲大病이라 하여 인가하지 않는 것이 종문의 정안이다. 만약에 해오에서 점수함과 같이 이 미진한 것을 이수履修로써 궁진窮盡하려 하면, 이는 섶을 안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 역효과만 발생하니 해오점수의 해害는 이렇게 극심하다.

 

  * 한 생각도 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졌어도 ‘진실이 완전히 드러난 바로 그 곳[淨裸裸處]’에 집착하면 “죽었다 살아나지 못하고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며 인가하지 않는 것이 종문의 올바른 안목이다. 만약 이해적 깨달음에서 점차적으로 수행해 미진한 것을 순서대로 마쳐 끝내려 하면 이는 섶을 안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은 역효과만 발생한다. ‘이해적으로 먼저 깨닫고 점차 수행한다.’는 해오점수解悟漸修의 폐해는 이렇게나 극심하다.

 

【강설】 중봉 스님의 말씀처럼 해오점수의 해독은 극심하다. 만일 망상과 습기가 남아 있다면 크게 재발심해서 확철대오 해야 한다. 점수한답시고 미진한 것을 억지로 없애려들고 닦고 보완하려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런 짓은 도리어 역효과만 일으켜 번뇌와 습기를 더욱 치성하게 할 뿐이다. 대혜 스님은 한 번 깨쳐 몽중에 일여한 7지 보살의 경지에 들었지만 도리어 원오 스님으로부터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란 꾸지람을 들었다. 적나라한 무심경계에 들었다 해도 실제로는 공안을 모르는 것이다. 10신초인 해오는 차치하고 설령 몽중일여 오매일여의 7지, 8지, 10지, 등각에 이르렀다 해도 바로 깨친 것이 아니고 견성이 아니며 증오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3-21】 ①어언語言으로부터 견해를 작作하여 철오徹悟를 체득하지 못한 자는 무변無邊한 광망견해狂妄見解를 유출流出한다. 차호嗟呼라, 제호醍醐의 상미上味는 세상의 진보珍寶이어늘 여사광해인如斯狂解人을 만나면 반대로 독약이 되는 도다. 참으로 정법이 경퇴傾頹하고 사마邪魔가 치성상속熾盛相續하여 권속들이 세간에 미만彌滿하니, 생사해탈에 유심留心하는 자는 가히 솔선하여 이 허망한 광해狂解의 경계를 파쇄破碎하지 않으리오. ①從語言中作解하야 未得徹悟者는 流出無邊狂解하느니라 嗟呼라 醍醐上味는 爲世所珍이어늘 遇斯等人하야는 反成毒藥이로다 良以正法이 傾頹하고 邪魔가 熾盛相續하야 眷屬이 彌滿世間하니 於生死界에 留心者는 可不先破此虛境也리오. (『博山錄』23, 『卍續藏經』112, p.286a)

 

  * ①말과 글로 견해를 지을 뿐 철저하게 깨닫지 못한 사람이 무수한 미친 견해를 내뱉는다. 아 안타깝도다! 최고의 우유 제품인 제호의 뛰어난 맛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기하게 여기는 보배지만 미친 견해를 내뿜는 사람들을 만나면 오히려 독약이 된다. 진실로 올바른 가르침이 점차 쇠퇴하고 삿된 견해를 가진 마구니 같은 무리들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번성해 계속 이어지고 그런 견해를 따르는 무리들이 세간에 가득 차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에 마음 둔 사람은 먼저 이 거짓의 경지를 논파해야 하지 않겠는가! (『박산록』)

 

【평석】 조동정맥曹洞正脈이며 명말明末 거장인 박산博山은 이렇게 통탄하였다. 실증實證치 못한 해오는 전부 광해狂解에 속한다. 그러므로 자고로 정안종사들은 철증徹證 이외는 모두 마설마속魔說魔屬으로 통척痛斥하였다. 이는 최사현정摧邪顯正하는 대자비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정법은 파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요節要』의 편말編末에서 해오를 의언생해依言生解라고 함은 즉 종어언중작해從語言中作解이다. 『도서都序』에 오후수증悟後修證의 십중차제十重次第를 열거 하였는 바 초일初一은 해오요 종십終十은 심기무념心旣無念하니 명대각존名大覺尊이라 하였는데, 이는 선오후수先悟後修하여 인수내증因修乃證하는 해오점수의 표현이다. 교가의 돈오는 초일初一의 해오요, 선문의 견성은 종십終十의 무념이니 근본적으로 상반된 내용인 해오와 견성을 혼합하려 함은 무모한 시도일 뿐 아니라 천추의 망설妄說이다.

 

  상술詳述하면 선문의 견성은 원증무념圓證無念이요, 교가의 돈오는 해오유망解悟有妄이다. 따라서 견성은 영단삼세永斷三細 해오는 미진육추未盡六麤, 견성은 망멸증진妄滅證眞 해오는 번뇌여전煩惱如前, 견성은 빙소수융氷消水融 해오는 식빙전수識氷全水, 견성은 영겁불매永劫不昧 해오는 일상간단日常間斷, 견성은 묘각후과妙覺後果 해오는 10신초심十信初心, 견성은 돈초지위頓超地位 해오는 점력계급漸歷階級, 견성은 보임무심保任無心 해오는 점제망상漸除妄想, 이렇게 내용이 상반된 선문의 원증견성圓證見性과 교가의 해오돈오解悟頓悟를 동일하다고 주장함은 논리의 자살이다.

 

  그리하여 해오를 근본으로 하는 돈오점수는 교가의 수행방편이요, 선문에서는 통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포신구화抱薪救火 인적위자認賊爲子 광해마속狂解魔屬으로써 통렬히 배제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돈오돈수는 우두牛頭 같은 특출特出한 사람에게만 한하고 달마상전達磨相傳은 돈오점수라고 주장함은 달마선을 전연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된 일대착오이니, 선문을 이탈하고 교가의 대종大宗인 화엄華嚴 징관澄觀(주7)의 법사法嗣가 된 규봉圭峰의 견지見地는 평가 할 필요조차 없다. 참학고류參學高流는 오직 종문宗門의 정전正傳을 준칙準則하여, 기타의 이단잡설異端雜說에 현혹되지 말고 활개정안豁開正眼하여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계승하여 광제미륜廣濟迷淪하여야 할 것이다.

 

  * 조동종의 올바른 가르침을 계승한 명나라 말기의 거장 박산은 이렇게 통탄했다. ‘참답게 증득[實證]’하지 못한 ‘이해적 깨달음[解悟]’은 전부 ‘미친 견해[狂解]’에 속한다. 그러므로 예부터 ‘올바른 안목을 가진 선지식[正眼宗師]’들은 철저한 증득 이외는 모두 마구니 들의 말이고 마구니 권속들이라고 통렬하게 배척했다. 이는 ‘삿된 것을 꺾어 바른 것을 드러내려는[摧邪顯正]’ 크나큰 자비심의 발로인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올바른 가르침이 파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요』 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해적 깨달음을 ‘말에 의지해 견해를 낸다[依言生解]’는 구절이 바로 ‘말과 글로 견해를 짓는 것[從語言中作解]’이다. 『도서』에 ‘깨친 뒤 닦아 증득하는 열 가지 차례’를 열거 하였는바 ”처음은 ‘이해적 깨달음[解悟]’이고 마지막은 ‘마음에 이미 그릇된 생각이 없으니[心旣無心]’ 이를 큰 깨침을 증득한 분[名大覺尊]이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먼저 깨치고 나중에 닦고[先悟後修], 닦음으로 증득한다[因修乃證]’는 해오점수의 표현이다. 교가의 돈오는 처음의 해오요, 선문의 견성은 마지막의 그릇된 생각이 없는 경지이니 근본적으로 상반된 내용인 해오와 견성을 혼합하려 함은 무모한 시도일 뿐 아니라 극단적인[千秋] 거짓[妄說]이다.

 

  상세하게 설명하면 선문의 견성은 ‘완전히 깨달아 그릇된 생각이 없는 것[圓證無念]’이며, 교가의 돈오는 ‘이해적 깨달음으로 망념이 남아 있는 것[解悟有妄]’이다. 견성은 ‘미세한 세 가지 번뇌마저 영원히 끊은 것[永斷三細]’이며 해오는 ‘여섯 가지 거친 번뇌조차 없애지 못한 것[未盡六麤]’이고, 견성은 ‘그릇됨을 없애고 참다움을 증득한 것[妄滅證眞]’이며 해오는 ‘번뇌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煩惱如前]’이고, 견성은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는 것[氷消水融]’이며 해오는 ‘얼음이 전부 물임을 아는 것[識氷全水]’이고, 견성은 ‘영원히 어둡지 않은 것[永劫不昧]’이며 해오는 ‘생활 중에도 흐름이 끊어지는 것[日常間斷]’이고, 견성은 묘각의 다음 과위[妙覺後果]이며 해오는 10신초의 마음[十信初心]이고, 견성은 ‘경계와 경지를 단박에 뛰어넘는 것[頓超地位]’이며 해오는 ‘여러 단계를 차례로 거치는 것[漸歷階級]’이고, 견성은 ‘그릇된 생각이 없는 경지를 보임(견지)하는 것[保任無心]’이며 해오는 ‘점차적으로 그릇된 생각을 없애는 것[漸除妄想]’이다. 이렇게 내용이 상반된 ‘선문의 완전한 깨달음인 견성[圓證見性]’과 교가의 ‘이해적 깨달음[解悟頓悟]’이 같다고 주장함은 논리의 자살이다.

 

  그리하여 이해적 깨달음을 근본으로 하는 돈오점수는 교가의 수행방편이요, 선문에서는 통용될 수 엇을 뿐만 아니라 이를 ‘섶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 든다[抱薪救火]’ ‘도적을 자식으로 안다[認賊爲子]’ ‘미친 견해를 따르는 마구니의 무리들[狂解魔屬]’이라며 통렬히 배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돈오돈수를 우두 같은 특출에만 한하고 달마의 가르침을 이은 것을 돈오점수라고 주장함은 달마선을 전연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된 크나큰 착오이니, 선문을 이탈하고 교가의 큰 종파인 화엄 징관의 가르침을 이은 규봉의 견해는 평가할 필요조차 없다. 수행하는 뜻 높은 납자들은 오직 종문에서 올바르게 이어진 법칙을 준수하고, 기타의 다른 견해나 잡다한 설명에 현혹되지 말고 올바른 안목을 활짝 열어 부처님과 조사들의 지혜의 명맥을 계승하여 미혹에 빠진 중생들을 널리 구제해야 할 것이다.

 

 

산청 겁외사 대웅전과 석탑. 박우현 거사 5월 11일 촬영 

 

【강설】 박산 무이 선사의 말씀을 빌려 총괄적으로 결론지었다. 종문의 정안종사들이 해오를 추종하는 무리를 마구니 외도라 통렬히 비판하고 배격한 것은 싸움을 일삼으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법이 파멸될 것이니 파사현정하여 중생을 이익 되게 하려는 대자비라 하겠다. 육조 스님께서 분명 “나의 종은 무념으로 종을 삼는다.”, “무념이 견성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종문의 견성은 10지를 넘어선 증오의 무념이지 10신초의 해오를 견성이라 할 수 없다. 일찍이 선을 배우다 선을 버리고 화엄종 징관의 법을 이은 규봉은 끝끝내 해오점수를 달마선의 정설로 여겼다. 허나 보조 스님은 다른 면모가 있다. 젊은 시절에 쓴 『수심결』에서는 돈오점수를 달마 문하에서 대대로 이어온 선문의 정설이라 했지만 말년의 저술인 『절요』에서 해오점수는 하택荷澤(주8)의 설로 지해知解종사인 하택은 조계의 적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돈오점수의 가르침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주9) 즉 교가를 위해 한 것이지 경절문徑截門(주10)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달마선은 돈오점수라는 초기의 주장과 돈오점수설의 비조라 할 하택은 지해종사로서 조계의 적자가 아니라고 한 후기의 주장을 살펴볼 때, 그 사상에 변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보조 자신도 말년에 가서 선종의 정설이 아니라고 인정한 주장을 800년이 지난 지금 보조를 추종한답시고 많은 이들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럼 지해종知解宗을 추종하자는 것인가? 선종이 지해종이란 말인가? 이는 스스로 조계의 적자가 아닌 서자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는 꼴이다.

 

【13-22】 ①지금 선의 종지를 착각하여 계승하는 자는 혹은 돈오점수문으로써 정맥正脈을 삼고, 혹은 원돈신해圓頓信解의 교리를 종지로 삼나니, 그 정법을 비방하는 과건過愆은 여余가 어찌 감히 말하리오. ①今錯承禪旨者는 或以頓漸之門으로 爲正脈하고 或以圓頓之敎로 爲宗 乘하나니 其謗法之愆을 余何敢言고. (①『禪敎訣』 「淸虛示惟政」, 『韓國佛敎全書』7, p.657c)

 
  * ①지금 선의 가르침을 잘못 알고 계승한 사람들 가운데 혹자는 돈오점수의 가르침을 올바른 맥으로 여기고 혹자는 원돈신해의 가르침을 종지로 삼는데, 올바른 가르침을 비방하는 그 잘못을 내 어찌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선교결』)

 

【평석】 돈오점수와 원돈신해圓頓信解는 선지禪旨가 아님을 분명히 한 청허淸虛의 명언이다. 청허는 돈오점수와 원돈신해圓頓信解가 선지禪旨 아님을 단언하였을 뿐 아니라, 『선교결禪敎訣』에서 원돈사구圓頓死句로써 학자를 지도함은 “할인안瞎人眼 불소不少요 치광외변주痴狂外邊走”라고 엄훈嚴訓하였다.

 
  * 돈오점수와 원돈신해는 선지가 아님을 분명히 한 서산 대사의 명언이다. 서산 대사는 돈오점수와 원돈신해가 선지라 아님을 단언하셨을 뿐 아니라 『선교결』에서 교법을 믿고 아는 것에 의지해 납자들을 지도하는 원돈사구圓頓死句 방식은 “남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 적지 않고, 밖으로만 치달리는 어리석은 미치광이”라고 엄격하게 경계하며 가르쳤다. 

 

주)
1) 【13-2】를 말하며, 『선문정로』 제4장 「무상정각」에 특히 자세하게 나온다.
2) ‘비상’은 비석砒石에 열을 가하여 승화시켜 얻은 결정체로 거담제와 학질 치료제로 쓰였으나 독성 때문에 현재는 쓰이지 않는다. ‘짐독’은 짐새의 깃에 있는 맹렬한 독.
3) 시호는 대통(大通, ?-706). 50세에 기주蘄州 쌍봉雙峰 동산사에서 5조 홍인弘忍 선사를 뵙고 제자가 됨. 홍인 사후 측천무후의 귀의를 받고 궁중의 내도량內道場에 가서 우대를 받았고 중종의 존경을 받음. 동문同門 혜능慧能이 남방에서 펼친 법을 남종南宗이라 하고, 신수가 전한 것을 북종北宗이라 함.
4) 5조 홍인 대사가 장차 법을 전하려고 대중에게 각기 증득한 바를 게송으로 지어 바치게 하였다. 이에 신수가 “몸이 곧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 때가 끼지 않게 하라.[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는 게송을 벽에 써놓았다. 이를 전해들은 혜능이 다른 사람에게 대신 게송을 쓰게 했다. “보리라는 나무 본래 없고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니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때가 끼겠는가?[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이를 본 5조가 혜능에게 법을 전함.
5) ‘총지’는 산스크리트 ‘dhāranī’의 번역으로 한량없는 뜻을 포함하여 잃어지지 않게 하는 것, 또 선법을 가져 잃지 않고 악법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6) 백장대지 선사가 상당上堂할 때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법을 듣곤 하였다. 하루는 법을 듣고도 가지 않자 백장이 물었다.
   “거기 서 있는 이가 누구냐?”
   “제가 과거 가섭불 때부터 이 산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학인이 ‘대수행大修行하는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하고 묻기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고 대답했다가 5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다. 바라건대 화상께서 일전어一轉語를 내려 여우의 탈을 벗겨주소서”
   “그대가 나에게 물으라.”
   “대수행을 하는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不昧因果].”
   노인이 깨닫고 예배하면서 말하였다.
   “제가 여우의 몸을 벗어 이 산 뒤에 두겠습니다.”
   백장은 유나를 시켜 대중에 말하고 산으로 가 여우를 화장했다고 한다.
7) 법명은 징관(澄觀, ?-839), 법호는 대통청량 국사大統淸凉國師, 자는 대휴大休. 화엄종 제4조. 삼론종・화엄종・천태종의 교학을 비롯한 남종선과 북종선을 두루 섭렵하고 4종법계의 성기설性起說을 대성大成. 선종과의 융화를 꾀하여 교선일치론敎禪一致論의 기초를 마련. 796년(정원 12) 반야 삼장이 40권 『화엄경』을 번역하는 데 참여했다. 저서로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 『화엄현담華嚴玄談』, 『화엄약의(華嚴略義)』, 『삼성원융관三聖圓融觀』 등이 있음. 법을 전한 제자 백여 명 가운데 종밀宗密, 승예僧叡, 보인寶印, 적광寂光 등을 4철哲이라 함.
8) 법명은 신회(神會, 685-760). 6조 조계曹溪 회하에서 다년간 수학. 742년(천보 4) 남북돈점南頓北漸으로 양종兩宗을 구분한 『현종기』를 지음.
9) 교법을 믿고 아는 것에 의지해 완전한 깨달음을 구하려는 가르침.
10) 빠르게 가려는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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