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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 이야기]
유루에서 무루로 - 눈물 없는 세상을 위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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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  2019 년 4 월 [통권 제72호]  /     /  작성일20-06-20 14:02  /   조회6,36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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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 성균관대 초빙교수·철학

 

세간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지만, 불교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낱말이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라는 것이다. 유루란 누출이 있다는 말이고, 무엇의 누출인가 하면, 번뇌와 고통의 누출이라고 한다. 간단히 눈물의 유출이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상응해 눈물이 없는 것을 무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눈물을 있게 하는 법을 유루법이라 하고, 눈물을 없게 하는 법을 무루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루법에 해당하는 것은 3성, 곧 선(유루선, 무루선), 악, 무기(유부무기, 무부무기) 중에서 유루선, 악, 유부무기, 무부무기이다. 무기無記란 선이나 악으로 기입될 수 없다는 말이니, 선이나 악으로 분류될 수 없다는 말이다. 유부有覆란 가림이 있다는 말이니, 곧 무분별지를 가린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무부無覆란 무분별지를 가림이 없다는 말이다. 전6식의 성품은 유루선, 악, 유부무기에 통하고, 제7말나식은 유부무기이고, 제8아뢰야식은 무부무기라고 한다.

 

 

인도 산치대탑의 조각 세부

 

 

그렇다면 3성은, 곧 선, 악, 무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 현장玄奘이 편찬한 『성유식론』에서는 두 세계에서 지속될 수 있는 성품을 지녔는가를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6전식은 [3성 중에서] 어떤 성품에 포섭되는가? 말하자면,

선, 불선, 이 둘이 모두 아닌 것[俱非]의 성품에 포섭된다. 둘이 모두 아닌 것이란 무기無記를 말한다. 선도 불선도 아니기 때문에 둘이 모두 아닌 것이라고 부른다. [어떤 법은] 이 세상 및 다른 세상에서 순응되는 이로움[順益]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선이라고 부른다. 인간세상이나 천상에서의 즐거운 과보는 비록 이 세상에서는 순응되는 이로움이 될 수 있을지라도 다른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으므로 [단지 무기의 즐거운 과보라고 부르고] 선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어떤 법은] 이 세상과 다른 세상들에서 거스르는 해로움[違損]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불선不善이라고 부른다. 악취의 고통스러운 과보는 비록 이 세상에서는 능히 거스르는 해로움이 될 수 있지만, 다른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무기의 고통스러운 과보일 뿐이고] 불선이 아니다. 선과 불선의 이로움과 해로움의 의미 중에 기입하여 구별할[記別] 수 없기 때문에 무기라고 부른다.”(주1)

 

처음 말해진 것은 6전식이 선, 불선(악), 무기에 통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 세상 및 다른 세상이라는 두 세상에서 항상 이로운 것(유루의 선, 무루의 유위법, 무루의 무위법)은 선이라고 불리고, 두 세상에서 항상 해로운 것(유루의 악)은 불선이라고 불린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단지 한 세상에서만 이롭거나 해로울 수 있고, 다른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곧 인간세상이나 천상 세상에서의 즐거운 과보, 악취에서의 고통스러운 과보)은 무기라고 불린다고 하였다. “이 세상 및 다른 세상”이라는 말은 전생의 세상과 금생의 세상을 말할 수도 있고, 금생의 세상과 내생의 세상을 말할 수도 있다. 눈에 띄는 의미는 금생의 세상에서 이로운 것이 내생에서 선이 아닐 수 있고, 금생의 세상에서 해로운 것이 내생에서는 악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삶을 대해는 자세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줄 수도 있는 의미를 지닌다.

 

무루법은 유위법이든 무위법이든 모두 무루선無漏善이다. 유루선有漏善이 견도를 증득하지 못한 범부가 행하는 5계, 10선 등의 선善을 말하는 반면에, 무루선은 견도 이상의 성자가 행하는 5계, 10선, 6바라밀 등과 증득하는 열반을 말하는데, 청정선淸淨禪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유루를 넘어 무루로 가는 일은 후천적 수행만으로 가능할까? 아니면 선천적 자질이 갖추어져 있어야 할까? 이 물음이 유식불교에서는 종자론의 맥락에서 논의되었다. 현장은 이 물음에 대한 호월, 난타, 호법의 답변을 차례대로 소개하였다.

 

첫째 답변은 호월護月의 것인데, 그는 일체 종자에는, 곧 유루종자만이 아니라 무루종자에도 본래의 성품이 있는 것이지 훈습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훈습력에 의해서는 본유의 종자가 다만 증장할 뿐이지 새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종자본유설).

 

둘째 답변은 난타難陀의 것인데, 그는 모든 종자는 모두 훈습 때문에 생성된다고 말한다. 그는 훈습되는 것과 훈습하는 것이 모두 아득한 옛적부터 있기 때문에, (본유설의 주장과 같이) 아득한 옛적부터 성취된다고 말할 뿐이고, 종자는 이미 습기의 다른 이름이므로, (본유설의 주장과는 달리) 반드시 훈습에서 연유하여 있다고 주장한다(종자훈습설).

 

셋째 답변의 호법護法의 것인데, 그는 유루종자와 무루종자에 모두 본유종자와 훈습종자가 있다고 한다. 그는 무루의 본유종자는 본래부터 모든 유정이 갖고 있는 종자인데, 가행위에서 훈습에 의해 증장하도록 하면, 무루의 본유종자로부터 무루법이 일어난다(견도)고 한다. 그리고 무루법이 일어날 때, 다시 훈습하면, 무루의 훈습종자를 생성된다고 한다.

 

호법은 유루종자가 무루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견해를 부정하면서도, 논서에 나타난 이견을 다음과 같이 회통한다:

 

“문훈습[의 종자] 중에서 유루의 성품인 것은 수도위에서 단절되는 것인데, 탁월한 이숙을 [초래하여] 감지하기에([招]感), 출세간법[무루심]에게 탁월한 증상연이 된다. 무루의 성품인 것은 단절될 것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고, 출세간법에게 직접적으로 인연이 된다. 이 직접적 인연은 [아직 현행을 일으키지 않아] 미세하고 은밀하여 알기 어렵다. [그래서] 어떤 곳[『섭대승론』 3권]에서는 거칠고 현저한 것[유루의 문훈습 종자]이 [출세간법에게] 탁월한 증상연이라는 것에 기대서, [그 거칠고 현저한 것을] 방편으로 출세간심의 종자라고 말한다.”(주2)

 

이에 따르면, 문훈습 중에서 유루의 성품인 것은 수도위에서 단멸되는 것이지만, 수도위 이전의 견도위의 출세간법에게 탁월한 증상연이 된다. 물론 이러한 유루의 문훈습 종자는 출세간법에게 직접적인 인연이 되는 무루의 본유종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 직접적인 인연(무루의 본유종자)은 미세하고 은밀한 것이고 알기 어렵기 때문에, 어떤 곳에서는 두드러지고 현저한 것(유루의 문훈습 종자)을 방편으로 출세간심의 종자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바 방편으로 출세간심의 종자로 말해지는 것은 가행위 4선근 중의 하나인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이다. 세제일법위가 증상연이 되어 무루의 본유종자가 현행하고(견도), 이 현행의 훈습에 의해 무루의 훈습종자가 생성된다. 4선근은 유식 수행의 5지위(자량위, 가행위, 통달위 또는 견도위, 수습위, 구경위) 중에서 가행위에 해당하는 선근이다.

 

4선근은 난위(煖位, 온난위), 정위(頂位, 정상위), 인위(忍位, 인순위), 세제일법위를 말하는데, 난위와 정위에서의 관찰은 4심사관尋思觀으로 불리고, 인위와 세제일법위에서의 관찰은 4여실지관如實智觀으로 불린다. 4심사관은 명칭, (명칭이 가리키는) 대상, (명칭과 대상의 고정적 특징으로서의) 자성自性, (명칭들 사이의 또 자성들 사이의) 차별差別이라는 네 가지가 가유假有이고 실유가 아님을 관찰하는 것이다.

 

‘정씨는 사람이다’에서의 ‘정씨’는 명칭이고, 정씨의 ‘실물’은 대상이다. 동시에 ‘정씨’는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니 자성이고, ‘사람’은 나무와 구별되니 차별이다. ‘저것은 나무이다’에서 ‘저것’은 명칭이고, 저것의 ‘실물’은 대상이다. 동시에 ‘저것’은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니 자성이고, ‘나무’는 사람이 아니니 차별이다. 4심사관은 명칭으로서의 정씨가 실유하지 않고, 대상으로서의 정씨가 실유하지 않고, 자성으로서의 정씨가 (명칭에서 보는 대상에서 보든) 실유하지 않고, 차별로서의 사람이 (명칭에서 보든 대상에서보든) 실유하지 않다는 것을 차례대로 관찰하고 인가하는 것이다. 4여실지관은 4심사관에서의 4소취가 공인 것 같이 거기에 상응하는 4능취가 차례대로 공임을 즐겁게 순응하면서 인가하는 것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심사관과 여실지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와 같이 난위와 정위에서는 능취의 식에 의지해서 소취의 공空을 관찰한다. 하품의 인가가 일어날 때는 경계의 공한 모습을 인가한다. 중품의 인가가 전전하는 지위에서는 능취의 식에 대해 대상과 같이 이것이 공임을 즐겁게 순응하며 인가한다. 상품의 인가가 일어나는 지위에서는 능취가 공임을 인가한다. 세제일법에서는 공의 양상을 쌍으로 인가한다. [그런데 심사관과 여실관이] 모두 [현재 앞에 있는 것이 공空이라는] 양상을 휴대하기 때문에, 아직 실제의 성품을 증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보살이 이 네 지위 중에서는 여전히 현재의 앞에 작은 사물을 안립해서 이것이 유식의 진승의제의 성품이라고 [잘못] 이른다고 설명하였다. 저 공과 유라는 두 양상을 아직 제거하지 않고, 그 양상들을 휴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얻는 바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진실한 유식의 도리에 안주함이 아니다. 저 양상이 소멸되고 나서야 비로소 실제로 안주한다.”(주3)

 

인용문에서 논의된 것을 그 이전의 설명들도 참고하여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눈물 없는 세상을 향한 여정은 지난하다. 그러나 그 세상에 도달한 보살들에게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는 구제해야 할 유정들이 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주)

(주1) 玄奘, 『成唯識論』, T1585_.31.0026b10-b16: 此六轉識何性攝耶. 謂善不善倶非性攝. 倶非者謂無記. 非善不善故名倶非. 能爲此世他世順益故名爲善. 人天樂果雖於此世能爲順益非於他世. 故不名善. 能爲此世他世違損. 故名不善. 惡趣苦果雖於此世能爲違損非於他世. 故非不善. 於善不善益損義中不可記別. 故名無記. 참고: 김묘주 역주, 『성유식론 외』, 동국역경원, 2008, 323쪽. 

 

(주2) 玄奘, 『成唯識論』, T1585_.31.0009a17-a21: 聞熏習中有漏性者是修所斷. 感勝異熟. 爲出世法勝増上縁. 無漏性者非所斷攝與出世法正爲因縁. 此正因縁微隱難了. 有寄麁顯勝増上縁方便説爲出世心種. 

 

(주3) 玄奘, 『成唯識論』, T1585_.31.0049b20-b27: 如是煖頂依能取識觀所取空. 下忍起時印境空相. 中忍轉位於能取識如境是空順樂忍可. 上忍起位印能取空. 世第一法雙印空相. 皆帶相故未能證實. 故説菩薩此四位中. 猶於現前安立少物. 謂是唯識眞勝義性. 以彼空有二相未除. 帶相觀心有所得故. 非實安住眞唯識理. 彼相滅已方實安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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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철학박사, 성균관대 철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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