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책의 향기]
현학玄學과 불학은 무슨 관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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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조병활) / 2019 년 4 월 [통권 제72호] / / 작성일20-06-20 14:11 / 조회6,987회 / 댓글0건본문
화중우火中牛 | 불교학자·자유기고가
초기 중국불교를 이야기 할 때마다 등장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현학玄學’과 ‘격의格義’1)다. 전한 말 후한 초 전래된 불교가 중국이라는 대지에 본격적으로 뿌리는 내린 때가 후한 말에서 위진(魏晉, 220~420) 시기였다. 당시 유행한 학문적 경향이 현학이었다.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저작 가운데 하나인 승조(僧肇. 384∼414)의 『조론』은 - 중국철학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하면 - “위진 현학의 종결終結이자 중국 불교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저작”2)이라고 흔히들 평가한다. 당시 사상계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종합해 ‘현학’에서 ‘불학’으로 물줄기를 돌린 저술이 『조론』이라는 것이다.
현원지학玄遠之學 즉 현학玄學은 - 현재의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 형이상학形而上學3)적인 학문이다. 추상적인 개념과 사변思辨으로 경험세계를 넘어서는 유有·무無와 본本·말末(만물의 근원 즉 본체론本體論), 재능才能과 성질性質(인성人性 탐구), 일一과 다多(사회가 존재하는 근거), 성인聖人의 조건(이상적 인격) 등을 주요한 주제로 다루었기 때문이다.4) ‘현학’이라는 단어는 서진시기(265~316)에 이미 사용됐다. 『진서晉書』 권54 「육운전陸雲傳」에 용례가 있다.
처음, 육운(262~303)은 친구 집에 머물기 위해 길을 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 길을 잃었다. 어느 곳인지 알지 못했다. 풀이 가득 우거진 곳에 불빛이 보였다. 불빛을 찾아가다 한 집에 도착 했다. 그 곳에서 한 소년을 만났다. 용모가 아름답고 거동에서 품격이 풍겨 나왔다. 함께 『노자』에 대해 토론했는데, 그의 말에는 심원한 의미가 들어 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이별하고 십리쯤 걸어가 친구 집에 도착했다. 친구가 근처 십리 이내에 집이 없다고 말했다. 육운은 비로소 느끼는 바가 있었다. 어제 밤 머물렀던 곳을 찾으니 바로 왕필王弼의 무덤이었다. 육운은 본래 현학을 공부하지 않았는데, 그 때부터 『노자』의 내용을 토론함에 대단한 성취가 있었다.”5) (강조는 필자)
인용문에서 보듯이 ‘위진 현학’은 노장철학과 관련이 깊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사조思潮를 ‘현종玄宗’, ‘현허玄虛의 학문’, ‘현원지담玄遠之談’ 등으로 불렀다. 이런 담론談論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명사名士, 명달明達 등으로 지칭했다. 남조 양梁나라 때부터 수隋나라까지 살았던 안지추(顔之推. 531∼591)가 지은 『안씨가훈』 권제3 「면학勉學」편에 현학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노자』·『장자』는 대체로 참[眞]을 온전히 보존하고 근본 성품을 기르며, 외물이 자신을 옭아매는 것을 싫어하는 내용들이다. …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은 이런 현학을 ‘근본적인 가르침[玄宗]’으로 삼아 이어가며 서로 과장하고 숭상했으며, ‘경치에 붙은 형체와 풀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景附草靡]’을 대하듯이 했다. 신농神濃씨와 황제黃帝의 교화가 모두 자신의 몸에 있다고 여겼으며,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버렸다. 그런데 하안은 조상曹爽과 무리를 짓다 (사마의에게) 살해 됐으니 이는 권세의 그물에 걸려 죽은 것이다. 왕필은 남 비웃기를 잘해 사람들이 그를 질시했으니 이는 남 이기기를 좋아하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 남조 양나라 때 이런 풍조가 다시 일어나 『장자』·『노자』·『주역』을 묶어 삼현이라 했다.”6) (강조는 필자)
“이런 현학을 … 서로 과장하고 숭상했으며…”라는 대목에서 안지추가 현학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장자』·『노자』·『주역』을 묶어 삼현이라 했다.”는 기록에서 현학과 노자·장자철학의 관련이 깊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학이 왜 발생했는가?’이다. 현학이 탄생된 원인과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들이 있다. 이 가운데 하나가 ‘말(언어)과 의미(사상)에 대한 논의[言意之辯]’다. 위진 시대 현학의 역사에서 언어와 의미의 관계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현존하는 기록상 순찬(荀粲, 대략 209~238)이다.7) 『세설신어』 「문학文學 제4」에 의하면 순찬은 조조를 보필했던 순욱(荀彧, 163~212)의 다섯 번째 아들(막내)로, 자는 봉천奉倩이며, 내용이 깊고 그윽한 철리哲理를 담은 현원玄遠을 말하는 데 뛰어났다.8) 순찬이 ‘말은 의미를 다 드러낼 수 없다’는 이치를 논했다는 기록이, 『삼국지·위서』 권10 「순욱전」에 배송지裴松之가 하소何劭의 『순찬전』9)을 인용해 붙인 주석注釋에 남아 전한다.
“(순찬은) 항상 ‘선생님(공자)이 성性이나 천도天道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했다.’10)는 자공의 말에 근거해, 비록 유교의 여섯 경전[육적六籍]이 지금 전하고 있지만 진실로 성인이 남긴 핵심이 아닌 껍데기[비강粃糠]일 따름이라고 여겼다. 이에 대해 둘째 형인 순오荀俣11)가 ‘『주역』에서 공자가 이르기를 「성인이 괘상卦象을 세워 생각을 나타내고, 말[繫辭]을 붙여 자기의 할 말씀을 다했다」12)고 했는데, 깊은 의미가 담긴 말씀[미언微言]을 어찌 들을 수 없다는 것인가?’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순찬이 ‘무릇 이치의 현묘함은 사물의 모습으로 드러낼 수 없다. 지금 「괘상을 세워 생각을 나타냈다」는 말은 괘상 밖에 있는 의미까지 통달했다는 것은 아니며, 「말[繫辭]을 붙여 자기의 할 말씀을 다했다」는 말은 계사 밖에 있는 말까지 다 했다는 것은 아니다. 괘상 밖의 의미[의意]와 계사 이외의 말[언言]은 진실로 감춰져 있어 드러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당시 말을 잘하는 사람도 철리哲理를 논할 때 순찬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13) (강조는 필자)
말로써 성인의 뜻을 나타낼 수 없다면 무엇으로 성인의 가르침을 드러낼 것인가? (순찬이) 말했는데 기록이 전하지 않는지는 모르지만, 순찬은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위나라 정시正始(240~249) 시기에 조조의 사위인 하안(何晏, 190~249)과 더불어 현학의 문을 연 대표자로 지목되는 왕필(王弼, 226~249)은 ‘의미를 얻으면 말을 잊는다[득의망언得意忘言]’는 표어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순찬의 ‘언부진의론言不盡意論’이 현학 사조思潮를 개창한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현학과 불학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주목되는 학설을 제창한 사람은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불교학자 가운데 한 명인 뤼청(吕澄, 1896~1989)이다. 그는 『중국불학원류약강中國佛學源流略講』14)에서 반야사상이 현학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중요하므로, 길지만 자세하게 그의 주장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한나라·위나라 교체시기에 대규모 농민 반란15)이 일어남에 따라 사회경제제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이에 상응해 상부구조인 의식형태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학술이론상에서는, 통치적인 지위를 가졌던 이전의 (유교) 경학經學의 지위는 점점 약해지고, 현학이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안과 왕필이 먼저 주창한 현학은 도가의 사상으로 유가의 『주역』·『논어』 등을 해석한 것인데, 새로운 의견들을 많이 내놓았다. 그들의 사상을 대표하는 유명한 명제는 왕필이 제창한 ‘괘상을 얻었으면 말을 잊어야 한다[득상재망언得象在忘言]’ ‘의미를 이해했으면 괘상을 잊어야 한다[득의재망상得意在忘象]’16) 등이다. 이것은 『장자』 「외물」편에서 얻은 ‘의미를 이해했으면 말을 잊어야 한다[득의망언得意忘言]’는 구절에 『주역』에 나오는 ‘말은 의미를 다 드러낼 수 없다[언부진의言不盡意]’와 ‘괘상을 세워 의미를 다 드러냈다[입상진의立象盡意]’는 구절 등을 덧붙여 의미를 확대하고 파생시킨 것이다. 얼핏 보기에, 반야이론이 말하는 소위 무상無相·방편方便은 망상忘象·망언忘言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 관계는 특히 지겸이 다시 번역한 『대명도경大明度經』17)과 연관되어 있다. 『대명도경』 제1권에 ‘붓다가 가르친 의미를 체득해 증명한다[득법의이위증得法意以爲證].’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에 대해 지겸은 ‘말로 증명했기에 당연히 본무로 돌아가야 한다[유언증이由言證已, 당환본무當還本無].’라고 주석注釋을 붙였다. 이것은 ‘괘상을 얻었으면 말을 잊어야 한다[득상재망언得象在忘言]’ ‘의미를 이해했으면 괘상을 잊어야 한다[득의재망상得意在忘象]’는 견해와 매우 비슷하다.
한편, 왕필이 반야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지겸은 한나라 말기 낙양에 거주했는데, 지참(지루가참)의 제자인 지량支亮에게서 배우다 전란을 피해 강남으로 내려갔다. 지겸이 『대명도경』을 번역한 것은 강남으로 간 이후의 일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대명도경』의 번역은 오나라 손권의 황무黃武에서 건흥建興에 이르는 연간(222~252)에 이뤄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적오赤烏 4년(241) 당시 이미 산속에 은거했기에, 그가 활동한 것이나 『대명도경』을 다시 번역한 것은 당연히 은거 전에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번역한 시간은 마땅히 222년에서 241년 사이이다. 이 시기보다 약간 뒤가 바로 하안과 왕필이 현학을 제창한 때이다. 하안과 왕필 두 사람은 모두 정시 10년(249)에 죽었는데, 정시正始는 조비가 세운 위나라의 연호이며, 240부터 249년까지이다. 그들의 학풍을 흔히들 ‘정시의 학풍[정시지풍正始之風]’이라 부른다. 지겸이 번역한 『대명도경』이 비록 강남에서 이뤄졌지만, 낙양 일대에서도 강의하고 배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야사상과 현학사상이 교류하고, 현학이 반야사상의 영향을 받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교류나 영향이 있었다는) 이 점을 우리는 현학사상 자체에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18)
뤼청의 이런 주장과 달리 현대 중국의 대표하는 불교학자인 탕용통은 『조론』을 현학으로 분류한다. 펑유란 또한 승조를 현학자로 파악한다. 승조의 교학이 현학이라는 주장은 1938년에 초판이 출간된 『한위양진남북조불교사漢魏兩晉南北朝佛敎史』에서 탕용통(湯用彤, 1893~1964)이 제기했고, 펑유란(馮友蘭, 1895~1990)도 1947년 출판한 『신원도新原道』에서 주장했다.
[1] “승조의 학설은 『반야경』·『유마경』 등 여러 경전과 『중론』·『백론』 등 여러 논서를 융합해 중국식의 논문쓰기로 요점을 정리한 것이다. … 대개 순수한 중국식 문체, 즉 뜻을 중시하고 글자를 멀리했다. 자연히 『노자』·『장자』 같은 현학의 책에서 취한 것이 많다. 따라서 승조의 『조론』은 현학 계통에 속한다.”19)
[2] “당시 일부 불교인들 중에는 불학을 논하면서 유有와 무無, 동動과 정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등 관념을 사용했다. 따라서 그들이 비록 불학을 강의했지만 그들이 강의한 불학은 현학의 한 일파라고 말할 수도 있다. 승조는 이들 가운데 가장 걸출한 사람이다.”20)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한국의 학자도 있다.21) 다시 말해 현학이 중국불학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는 얼른 판단하기 힘들다. 그러나 연구할 가치는 있어 보인다. 그런데 『조론』 주석서로 가장 권위 있는 당나라 원강이 쓴 『조론소』에 이런 구절이 있다.
“① 부처님 가르침은 속제와 진제에 의지한다. 말은 속제에 부합되고, 이치는 진제를 밝힌다. 게다가 전진·후진 사람들은 글을 좋아해 경전을 옮기는 사람들이 유교 경전과 사서史書를 참조했다. 서진·동진 사람들은 이치를 숭상해 글을 짓는 사람들이 『노자』·『장자』에서 말을 빌렸다. 유교 경전과 사서의 말을 참조했지만 부처님과 공자의 기풍氣風이 같은 것은 아니며, 『노자』·『장자』의 말을 사용했지만 불교의 진리와 노담·장주의 가르침이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가는 것은 아니다. 승조 법사는 한 시대를 넘는 뛰어난 수재이고, 천년의 세월 속에 홀로 드러난 사람이기에, (승조 법사는) 위로는 지혜로 높음과 밝음을 귀히 여기고, 아래로는 혼란함을 엄하게 따져 묻는 분이다. (유가·도가의 가르침과 불교를 같이 여기는 것) 이것은 송나라의 도장을 들고 월나라로 가는 것인 데도 어리석은 무리들은 (이를) 무시하고[모르고], (유가·도가의 가르침과 불교를 다르게 여기는 것) 이것은 본래 자기의 보배를 들고 자기 나라로 돌아오는 것인 데도 식견이 없는 무리들은 (이를) 비웃는다. 진실로 슬픈 일이며, 깊이 탄식할 일이로다!
② 최근 일부 식견 없는 무리들이 스스로 무리를 짓거나 혹은 승복을 입은 채 대승의 가르침을 비방하며, 형색은 범부의 모습을 한 무리들이 반대로 작은 가르침을 숭상해 위로는 높은 덕을 헐뜯고, 만일 속된 이름이 조금이라도 널리 퍼지면 아래로는 저속한 무리들을 찬탄하며 (자기들의 말이) 진리의 실제에 부합하는 것이라 외치니, 스스로 얼굴의 두꺼움을 잊은 이들이 어찌 부끄러움을 알겠는가! ‘비유하면 어리석은 도적이 금은보화를 버리고 깨진 기와조각과 벽돌조각을 짊어지고 간다.’라는 말이 경전에 있는데, 이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믿음이 훼손되면 복福이 재앙에 손상된다.’는 진실한 말이 본디 있듯이, 죽음에 임박해 과연 그것이 잘못을 초래해 혀는 일척 정도나 길게 나오고, 호흡은 거칠게 여러 번 내달려 ‘소 울음’ 소리를 내고, 모습은 표범처럼 변해, 틀림없이 무간지옥의 고통을 당할 것이다! 후학들이 앞의 일을 안다[거울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① 如來說法, 皆依二諦, 言則順俗, 理則明真. 且秦人好文, 譯經者言參經史22); 晉朝尚理, 作論者辭涉老莊23). 言參經史, 不可謂佛與丘24)且同風25); 辭涉老莊, 不可謂法與聃周26)齊致27). 肇法師一時挺秀, 千載孤標, 上智貴其高明, 下愚譏其混雜, 是謂資宋章而適越28), 露形之俗見嗤29), 抱荊玉而歸楚30), 無目之徒致哂31), 信可悲也, 深可歎哉! ② 近有無識之徒, 自相朋附, 或身參法侶, 翻謗大乘; 或形廁俗流, 反宗小教, 上誹高德; 苟布負俗之名, 下贊庸流, 將謂契真之實, 自忘顏厚, 豈識羞慚! 經云: “譬如癡賊棄捨金寶, 擔負瓦礫.” 此之謂矣. 然信毀禍福, 素有誠言, 及至臨終, 果招其咎, 舌出長餘一尺, 氣奔經乎數晨, 既出牛聲, 不知豹變, 無間極苦, 夫復何疑? 後之學者, 幸知前事也.]32) (강조는 필자)
아무튼, 현학과 불학의 관계는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다행히 최근 이와 관련된 책들이 여러 권 출간됐다. 운주사에서 출간된 『중국불교사상사』(김진무 지음, 2015)는 불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고찰한 책이다. 현학의 견지에서 논구한 책으로는 예문서원에서 출판된 『위진 현학』(정세근 엮음, 2001)과 『도가철학과 위진 현학』(정세근 지음, 2018) 등이 있다. 중국책을 번역한 『위진현학사(상·하)』(許抗生等著, 김백희 옮김, 세창출판사, 2013)는 중국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될 책으로 보인다. 중국어에 능한 사람은 『위진현학사魏晉玄學史』(余敦康著, 北京大學出版社, 2004)와 『곽상과 위진현학郭象與魏晉玄學(第3版)』(湯一介33)著, 北京大學出版社, 2009)을 직접 읽어보면 현학에 관한 많은 것을 체득할 수 있다.
주)
(주1) 중국불교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현학과 격의 그리고 불교를 함께 다뤄야하지만 편의상 이 글에서는 현학과 불학의 관계만 논의한다. 격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할 예정이다.
(주2) 湯一介著, 『郭象與魏晉玄學』(第三版), 北京:北京大學出版社, 2009, p.31; 張岱年主編, 『中國哲學大辭典』, 上海:上海辭書出版社, 2014, p.155.
(주3) 중국에 현존하는 문헌기록상 『주역·계사 상上』에 형이상학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형체로 나타나기 이전의 상태를 도라 하고, 형체로 나타난 이후의 상태를 기라 한다].”
(주4) 『고경』 제64호(2018년 8월호) pp.40~41.
(주5) [唐]方玄齡等撰, 『晉書』 卷54 「陸雲傳」, 北京:中華書局, 1999, p.983. 『고경』 제64호(2018년 8월호) pp.42~44에서 재인용.
(주6) 顔之推著·王利器撰, 『顔氏家訓集解』, 北京:中華書局, 1993, pp.186∼187. 『고경』 제64호(2018년 8월호) pp.44~45에서 재인용.
(주7) 許抗生等著, 『魏晉玄學史』, 西安:陝西師範大學出版社, 1989, p.224.
(주8) [南朝宋]劉義慶著·張萬起等譯注, 『世說新語譯注』, 北京:中華書局, 1998, p.170.
(주9) 『세설신어』에는 『순찬별전』으로 되어 있다.
(주10) 이 말은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에 나온다.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주11) 순욱은 모두 다섯 아들을 두었다. 순운荀惲, 순오荀俣, 순선荀詵, 순의荀顗, 순찬荀粲이 그들이다.
(주12) 이 말은 『주역』 「계사 상上」에 있다.
(주13) 陳壽撰·裵松之注, 『三國志』(簡體字本前四史), 北京:中華書局, 2007重印, p.240.
(주14) 이 책은 1992년 민족사에서 『중국불교학 강의』(각소 옮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주15) 구체적으로 황건적의 반란 등을 말한다.
(주16) 이 말은 왕필의 저서 『주역약례周易略例』 「명상明象」조에 나온다.
(주17) 『대명도경』은 지루가참이 한역한 『도행반야경』을 다시 번역한 것이다.
(주18) 呂澄著, 『中國佛學源流略講』, 北京:中華書局, 1979, pp.32~33.
(주19) 湯用彤, 『漢魏兩晉南北朝佛敎史』, 北京:北京大學出版社, 1997, p.237.
(주20) 馮友蘭, 『三松堂全集』 第5卷 「新原道」, 鄭州:河南人民出版社, 2001, p.95.
(주21) 정세근 지음, 『도가철학과 위진현학』, 서울:예문서원, 2018, pp.253~257. 정세근 교수는 이 책(p.18)에서 탕용통의 현학연구를 ‘불교적 현학연구’로 규정했다.
(주22) 경사經史는 유학자들이 중시한 유교 경전과 『서경』·『춘추』 등 역사책을 가리킨다.
(주23) 노장老莊은 『노자』와 『장자』를 가리킨다.
(주24) 구丘는 공구孔丘, 즉 공자를 말한다.
(주25) 동풍同風은 비슷한 기풍·태도·방법, 유사한 사상적·예술적 특징을 의미한다.
(주26) 담주聃周는 노담(노자)과 장주(장자)를 말한다.
(주27) 제치齊致는 ①서로 다른 사물이 함께 오는 것 ②같은 목표를 향해 협심해 일치단결 하는 것 등의 뜻이 있다.
(주28) 송장적월宋章適越은 송나라의 도장이 월나라로 가다, 즉 자기 나라의 보배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주29) 치嗤: 명사로 웃음, 동사로 비웃다·깔보다·업신여기다는 뜻.
(주30) 형옥귀초荊玉歸楚 초나라의 보물이 초나라로 돌아가다, 즉 자기 나라의 보물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형옥은 『한비자』 권4에 나오는 ‘화씨和氏의 벽옥璧玉’을 가리킨다.
(주31) 신哂: ①웃다 ②비웃다는 의미. 여기서는 비웃다는 뜻.
(주32) T45-p167b. 번역은 『고경』 제70호(2019년 2월호) pp.146~148에서 재인용.
(주33) 생졸년은 1927~2014. 현대 중국의 유명한 불교학자 가운데 한 명인 탕용통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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