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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  2019 년 5 월 [통권 제73호]  /     /  작성일20-06-20 16:47  /   조회6,95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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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 자유기고가 

 

청량의 대법안 화상께서 재에 가기 전에 스님들의 증오證悟를 확인하고자 법석을 열었다. 법안 화상이 손으로 발[염簾]을 가리켰다. 그때 두 시자가 함께 가서 발을 말아 올렸는데, 법안 화상이 “하나는 얻고 하나는 잃었다.”고 말했다.

淸凉大法眼, 因僧齊前上參. 眼以手指簾, 時有二僧, 同去卷簾. 眼曰: “一得一失.” (『무문관』 제26칙)

 

청량법안(淸凉法眼, 885~958) 선사는 법안종法眼宗의 조사祖師다. 나한계침(羅漢桂琛, 867~928) 선사의 법맥을 이었으며, 법명인 문익文益 선사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래서 대체로 법안문익으로 불린다. 절강성 여항余杭에서 태어났고 속성은 노魯씨다. 나이 20세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출가 초기엔 교학을 깊이 공부했고 유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출가의 본분사를 해결하지 못하자 훗날 선禪에 천착했다. 선문에서 장경혜릉(長慶慧稜, 854~932) 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제방의 대덕들을 두루 참방하고자 행각行脚에 나서 큰 깨달음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선지禪旨와 지덕智德은 단연 돋보였다. 이는 그가 법안종을 개창한 조사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법안 선사가 이 공안에서 말하고자 하려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상참上參’이란 법문을 듣기 위해 만들어진 법석이나 조실 스님에게 자신들의 증오證悟를 확인받기 위한 자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상참에 들기 전 법안 선사는 시자들에게 발을 가리키며 걷으라고 지시한다. 이에 둘이 똑같이 발을 걷었는데 “하나는 얻었고 하나는 잃었다.”니 이 무슨 언밸런스Unbalance한 지적이며 평가인가? 또 법안 선사가 말하는 득과 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는 얻고 하나는 잃었다”

 

추측해 보건대 발을 걷어 올리면 밖의 환한 빛과 공기가 방 안에 넘쳐날 것이다. 이 때 한 시자는 이를 상큼하게 받아들였고, 또 다른 시자는 언짢게 반응했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여기서의 ‘발’이란 전호에 소개한 공안의 ‘그물’과도 같은 것으로 이해했을 때 ‘발’이 치워지면 넓디넓은 광활한 세계가 펼쳐진다. 한 시자는 이를 반겼고 다른 시자는 두려워했을 수도 있다. 발을 걷는 두 시자의 움직임은 분명 똑같았지만 발을 걷어 올린 외부의 환경을 받아들이는 두 시자의 반응은 달라보였던 모양이다. 이를 살핀 법안 선사가 즉각 내뱉은 말이 ‘하나는 얻었고 하나는 잃었다’다.

 

이 공안을 통해 생각해보는 게 변화하는, 또는 변화된 세상과의 조화다. 자신에게 어떠한 상황이 주어지든 이에 잘 적응하는가 하면, 섭수하고 포용하는 능력까지 보여준다면 이는 조화를 꾀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반면 주어진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배타적이고 수동적인 반응으로 일관한다면 이는 낙후되거나 옹졸한 존재로 남게 될 것이다. 법안 선사는 두 시자가 함께 발을 걷어 올리는 모습을 보며 이것을 우리에게 일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상황에서든 당황하거나 짜증내는 일이 없어야 조화가 이루어진다. 감정에는 기복起伏이 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경우 가까이 하려는 사람이 적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되도록 자기감정을 잘 조절하고 관리하려 한다. 평소 자기감정을 잘 조절해 온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는다. 반대로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들은 조그만 일에도 화를 내고 갑작스런 상황에서는 민감하게 대응한다.

 

실제로 법안 선사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위축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발전의 동력으로 삼아 전환점을 만든 뒤 마침내 훗날 법안종을 만드는 조사가 된다. 

그가 장경혜릉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내던 어느 날 동료와 함께 행각行脚을 나설 때의 일이다. 행각이란 안거를 마치고 해제기에 선지식을 두루 찾아뵙고 안거 때 향상向上한 자신의 법력을 인가받는 일종의 여행이라 할 수 있다. 행각 도중 법안 선사는 갑자기 퍼붓는 함박눈을 피해 찾아 들어간 곳이 지장원地藏院이라는 조그만 암자였다. 눈이 그치길 기다렸다가 지장원에서 나오며 원주 스님과 작별인사를 했다.

 

원주는 문 밖에 있는 큰 바위에까지 전송을 나왔다. 법안 스님이 ‘잘 쉬었다 갑니다’ 하고 돌아서는데 원주가 묻는다. “그대들은 평상시 삼계유심三界唯心이란 말을 알고 있을 터인데 이 바위가 그대들의 마음 밖에 있는가, 마음 안에 있는가?” 이에 법안이 “마음 안에 있습니다.”고 답하자, 원주의 말이 귀를 때리는 데 법안으로선 가히 충격이었다. “멀리 행각하는 그대들이 저렇게 무거운 바위를 품에 안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이 들꼬?” 이 말에 법안은 대꾸할 실력이 없음을 알고 도망치듯 돌아섰다. 법안이 한참 도망치다 생각했다. ‘행각하는 의의가 선지식을 찾고자 함인데, 지장원의 원주 스님은 선지식이 틀림없다. 괜스레 시일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스님의 지도를 받는 것이 옳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법안이 지장원의 문을 두드리자, 원주가 나오며 “아직도 그 무거운 바위를 품에 안고 있는가?” 일갈했다. 법안은 납작 엎드려 큰 절을 올리며 “스님!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법을 청했다.

 

법안은 지장원에 머물며 원주 스님의 지도를 받아 개안開眼의 경지를 터득한다. 이후 선기禪機가 날로 일취월장日就月將하더니 마침내 ‘법안종’을 창설하게 된다. 법안을 이렇게 만든 원주가 바로 나한계침 선사다. 만일 법안이 창피함에 다시 원주 보기를 회피했다면 중국불교의 법계法系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법안은 선지식을 대하는데 있어서 대분발의 힘을 발휘한다. 자신의 허약한 법기法器를 단단히 고치고자 창피함을 무릅쓰고 원주를 다시 찾아 간 것이다. 말하자면 원주의 법거량에서 그가 예사 인물이 아님을 간파했다. 원주는 실제로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의 법맥을 이은 수제자로 당대唐代 복건성 지장원과 나한원에서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인물이다. 나한계침 역시 역방 중 현사사비를 만나 깨침을 증득했다.

 

경계를 허물어야 큰 세계 열려

 

법안과 스승 계침의 공통점은 이처럼 제방을 두루 참방하며 큰 선지식을 만나 깨침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사의 편력을 놓고 봤을 때 발은 경계를 허무는 상징성을 띠게 된다. 발이 무엇인가? 바깥의 빛과 공기와 사물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게 발이다. ‘그물’이 나를 가두는 족쇄라면 ‘발’은 바깥의 경계로부터 나를 차단하는 가림막이다. 법안 선사는 이 발을 내세워 얻고 잃음의 선지를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이다.

 

‘그물’과 ‘발’을 걷어내야만 세상을 두루 편력할 수 있다. 운수납자란 단순히 바람 부는 대로 발길을 옮기는 게 아니다. 더 큰 문명과 더 큰 진리와 더 큰 시대의 아이콘을 찾아 떠나는 수행자다. 

향상일로向上一路를 추구하는 이들은 절대로 안주安住하지 않는다. 한 곳에 안주하게 되면 변화를 읽는 힘이 떨어지고 결국엔 도태된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른 물은 썩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숫타니파타』에서는 “성인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를 유학하고 돌아온 동진 대사(洞眞大師, 869~948)가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머물고 있을 때,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완산주 남쪽 남복선원南福禪院에 주석해 줄 것을 간청한 일이 있었다. 이에 동진 대사가 “새도 머물 나무를 가릴 줄 아는데, 내 어찌 박이나 오이처럼 한 곳에만 매달려 있어야 한단 말이오?”라며 거절했다. 한 곳에 정주定住하는 게 오히려 자신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동진 대사는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분주히 자신을 움직여 새로운 도전을 시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침과 법안이 제방을 돌며 선지식을 찾아 진리를 구했던 그 시간들이야말로 이들을 훗날 선가의 큰 인물로 만든 요인일 터이다. ‘발’을 걷어내는 행위는 자신의 게으름과 나태와 안주를 벗어내는 의미와 직결된다. 그런 연후 광활한 세상과 맞닥뜨리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익혀야 시대를 이끌 수 있고 후학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다. 깨달음의 세계는 그렇게 수많은 인물과 변화들에 맞서 자신을 단련시켜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발을 어떻게 걷어낼 것인가 그 답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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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선시 읽는 법을 소개한 『마음의 밭에 달빛을 채우다』를 펴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오도송에 나타난 네 가지 특징」·「호국불교의 반성적 고찰」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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