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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일본불교의 국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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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2020 년 6 월 [통권 제86호]  /     /  작성일20-06-22 16:07  /   조회6,53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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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난조분유(南條文雄, 1849-1927, 이하 난조로 표기)의 유학과 귀국을 계기로 새롭게 전개된 불교학의 방법론은 한문불교의 전통적인 이해방식을 바꾸는 중요한 전기轉機다 되었다. 곧 영국유학 중에 심혈을 기울인 산스크리트 불교문헌의 연구는 전통적인 한문불교의 틀에 구애됨이 없이 불교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의 문헌이 역경사譯經師에 따라 시대를 달리해 번역되고 논의되어 왔던 것에 대해 산스크리트 불교문헌은 번역의 정확성 여부는 물론 번역의 차이 등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산스크리트 불전에 대한 연구는 동일한 이름의 경전이라도 역경사에 의해 시대를 달리해 남아있던 다수의 한문경전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불교학적 방법론을 제시해 주었다. 따라서 난조에 의한 산스크리트 불교문헌의 연구는 한문문헌에 의거한 동양불교의 이해방식을 근원에서부터 바꾸는 계기를 만들고, 이러한 새로운 불교학적 방법론은 1885년 난조가 도쿄대학의 범어학 강사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 불교계에 이식移植된다. 

 

하지만 난조의 역할은 국내의 일본불교계에 한정되지 않는 보다 더 큰 국제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난조가 유학 당시 일본의 불교문헌을 서양에 알린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동양의 불교를 영국 등 유럽 세계에 본격 소개했다는 의미에서 일본의 불교를 국제화, 세계화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난조가 유학하던 1880년대는 이미 유럽에서도 제국주의帝國主義가 형성되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던 시대이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정치권력을 주도적으로 발휘한 유럽의 제국은 전 세계의 정치, 사회, 문화 등에 있어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여기에 동아시아의 종교로서 일본불교가 알려지는 계기가 난조를 통해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유럽의 인문종교 분야에서 크게 영향력을 가졌던 막스 뮐러(Max Müller, 1823-1900)의 제자로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난조는 그 자체로서 동양의 종교를 이해하는 데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난조의 역할과 그의 스승인 막스 뮐러의 활약으로 본격적으로 일본불교가 세계무대에 데뷔하는 계기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1893년 9월 미국에서 거행된 시카고 만국종교회의(萬國宗敎會議, The World’s Parliament of Religions, Chicago)이다.

 

만국종교회의(사진 1)에 들어가기 전에 일본에서의 1893년의 시점을 좀 더 분명히 해놓고자 한다. 이 시점에서는 도쿄 대학의 최초의 불교학강사였던 하라 탄잔原坦山이 퇴직하였고(1888년), 그와 함께 강사를 담당한 요시타니 카쿠주吉谷覺壽도 퇴직하였다(1889년), 이 요시타니를 이어 1890년 불교학강사로 임명된 사람이 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로서, 그는 불교학의 또 다른 분야로서 불교역사의 정립에 크게 힘을 기울였고 후대 인도철학이 인도철학과로 독립하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범어학을 담당하였던 난조도 1891년 도쿄대학을 퇴직하였고, 이후 범어학은 1897년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가 새롭게 강의를 담당하기까지 외국인교수가 담당하게 된다.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는 1885년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1890년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저서를 출간해 이름을 높이고 1887년에는 철학관哲學館을 설립하였다. 도쿄 대학도 1886년부터는 제국대학帝國大學으로 명칭을 바꾸었고(1897년까지), 1889년에는 일본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1890년 이노우에 테츠지로井上哲次郞가 유학에서 돌아와 도쿄 대학 교수가 된 뒤 1892-93년 연간에는 ‘교육과 종교의 충돌’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1889년 헌법 공포 이후 일본에서는 국수주의적인 분위기도 생겨나고 불교계도 이전의 폐불훼석의 여파에서 거의 벗어나 불교 독자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는 상황까지 와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 미국의 시카고에서 거행된 만국종교회의에 일본의 불교계가 초청을 받은 것이다. 

 

 

사진1. 시카고 만국종교회의.

 

 

시카고에서 거행된 만국종교회의(이하 종교회의로 표기)는 콜롬버스의 신대륙발견 400년을 기념하는 시카고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의 한 분과로 1893년 9월11일부터 27일까지 거행된 것이다. 이 종교회의에는 기독교는 물론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유교, 도교 등 전 세계의 종교를 대표하는 종교인이 참석하였고, 불교를 대변하는 입장에서 일본의 불교도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이 종교회의가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서양 제국을 대표하는 종교로서 기독교의 입장을 선양하려는 제국주의적 발상이 전제되어 있었고, 일본불교를 초대한 데는 막스 뮐러의 영향은 물론 시마지 모쿠라이, 난조분유, 이노우에 엔료 등에 의해 불교계의 위상이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데 연유한다. 그리고 일본의 불교계로서도 이 초대에 응해 일본의 불교를 국제적으로 널리 선양하고자 하였다. 일본에서 대표로 결정된 사람은 불교의 각 종파를 대표한 승려로서 샤쿠 소엔(釋宗演, 1860-1919, 임제종, 사진 2), 도키 호류(土宜法龍, 1854-1923, 진언종), 아시즈 지츠젠(蘆津實全, 1850-1921, 천태종), 야츠부치 반류(八淵蟠龍, 1848-1926, 진종본원사파)이었고, 재가자로서는 히라이 긴자(平井金三, 1859-1916, 미국체재)와 노구치 젠지로(野口善四郞, 1864?-?, 통역)가 선발되었다. 비록 이들이 시카고에 가는데 국가의 원조는 받지 않았지만, 각 종단별로 다량의 지원을 받아 시카고의 회의 자리에서도 방대한 일본불교의 자료를 참석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시카고 종교회의에서 일본불교의 대표들은 각 종파를 대표해 기독교 중심의 미국인들에게 불교의 정신을 알렸고, 이를 통해 일본불교의 모습을 통한 대승불교가 서구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대표자 중에 후에 일본의 인도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샤쿠 소엔은 연기緣起로서 인과법因果法에 대해 발표하였다고 한다. 곧 샤쿠 소엔은 이 인과법을 ‘자연의 법칙’ 즉 ‘우주의 발달’을 증명하는 영원히 멈추지 않는 시계로 비유하고, 마치 진화론과 같이 인과의 법은 모든 곳에 적응이 가능하고, 인간의 도덕적 생활도 진화의 논리적 계산과 같이 동등하게 결정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샤쿠 소엔의 발표 당시 발표문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 다름 아닌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로서, 그는 샤쿠 소엔의 재가在家제자로 종교회의에 통역자로서 참석하였다. 이들 일본불교 대표들의 발표는 비록 각 종파를 대표해 발표를 임한 것이지만, 대승불교의 세계를 서양의 세계와 세계 각 종교의 지도자들에게 널리 알린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재가자로서 참석하여 발표에 임한 히라이 긴자는 일본과 미국의 불평등조약이 기독교 우위의 문명국의 입장에서 동양을 야만적으로 경시하는 입장에 서있는 것이라 비판하고, 이러한 경시의 태도는 진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비종교적인 모습이라고 기독교를 비판하였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약의 불평등성은 일본이 ‘비문명국’으로 분류되는 것으로부터 생긴 일이다. 당시의 국무장관은 그 불평등성을 인정하면서도 ‘터키나 페르샤 등 모든 야만적인 인종’과 같은 ‘오리엔트의 나라들과의 조약에서 명기할 때는’ 필요한 사항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오리엔트’와 ‘야만적인’의 의미는 교환이 가능한 언어이다. 조약체결 당시 타운젠트 해리스 등 일본을 아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불평등조약의 문제점은 분명했다. 그러나 1893년이 되어도 일본은 아직도 ‘오리엔탈’과 ‘야만적인’ 상황 속에 있다.”[필자주 : 미일통상조약은 1858년에 조인되어 1899년까지 발효되었다.]

 

 

사진2. 사큐 소엔

 

 

히라이는 일본의 불교와 종교 전체를 대변하는 입장에서 서양의 기독교적 우월감을 간파해 종교적 본질에서 그러한 우월적 태도를 비판하여 상당히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히라이의 발표는 언론을 통해 종교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물론 서구나 유럽 사회에 기독교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알린 것으로 크게 관심을 모았다고 한다. 이 히라이의 발표문 덕을 본 듯도 하지만, 일본불교의 대표들은 서양사회에 불교를 널리 알리고 일본사회에 화려하게 귀국하였다. 특히 샤쿠 소엔과 동행한 스즈키 다이세츠는 이후 샤쿠 소엔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가게 되고 미국과 유럽에서 선禪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사상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다. 스즈키는 후에 귀국하여 오타니大谷 대학 교수를 역임하지만, 그는 선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정신을 ‘일본적 영성靈性’이라 표현하여 일본문화의 기틀로서 불교의 정신을 선양하였다. 

 

불교의 정신이 전 세계로 전해지는 데는 시카고 종교회의에서 일본불교계 발표자들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곧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전해진 동아시아의 불교전통이 세계에 알려져 진리가 동아시아에서도 전승되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만이 진리가 아니라 불교를 포함한 다수의 종교들이 진리로서 각 지역에 전승되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카고 종교회의를 통해 일본불교계의 위상은 한껏 높아졌지만, 그렇게 불교계의 위상이 상승된 데는 근대불교학의 중요한 공헌을 한 난조분유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성공적인 유학의 결실과 스승인 막스 뮐러의 영향 등이 결부되어 시카고 종교회의에 일본불교계가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가 세계로 알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된 일본불교의 시카고 종교회의 참석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면, 일본 불교계에서의 난조 분유의 위상은 국내적으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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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 전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일본 인도학불교학회 이사, 인도철학회 편집이사, <실담자기초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공저, 글익는들, 2004)), <을유불교산책>(정우서적, 2006), <산타라크쉬타의 중관사앙>(불교시대사, 2012)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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