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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양문회와 『대승기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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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0 년 6 월 [통권 제86호]  /     /  작성일20-06-22 16:10  /   조회6,60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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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고려대 강의교수 

 

근대 중국불교 부흥자

 

근대 중국 신불교 운동이란 중국 근대에 이루어진 불교 혁신 운동 전체를 의미하고, 그런 의미에서는 근대 불교사상가 대부분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불교 혁신 운동에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인물은 아마도 양문회(楊文會, 1837-1911)일 것이다. 양문회(사진 1)는 ‘근대 중국불교 부흥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그의 사상은 의심할 바 없이 혁신적 성향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전통 사상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사진1. 양문회

 

 

양계초가 “청말 심학가들 가운데 불교와 관련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진심으로 불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 양문회에게 귀의하였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당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는 매우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젊은 나이에는 수구파로 분류되는 증국번의 막료가 되어 그를 보좌하였고, 외교관으로 유럽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젊어서는 불경 연구에 심취하였고, 말년에는 남경 금릉각경처를 설립하고 불교 경전 간행에 여생을 바쳤다. 양문회가 간행한 불교 경전들은 1920년대 『대승기신론』 논쟁이 일어난 사회적 배경이 되었고, 이후 1950년대까지 그의 영향력이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승기신론』을 만나다

 

양문회가 불교에 전념하게 된 계기를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안휘성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친은 증국번, 이홍장과 같은 해 진사에 합격하였던 경력으로 당시의 고위층과 밀접한 친분을 맺고 있던 유학자였다. 그래서 양문회 본인이 원한다면 충분히 높은 관직을 얻을 수 있었으나, 그는 관직에 별로 뜻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양문회는 증국번을 도왔고, 이러한 연고로 후에 외교관으로 유럽을 순방하게 되었다. 이처럼 철저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양문회가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 계기는 아주 흥미롭다. 

 

그는 부모가 정해준 약혼녀- 어려서 천연두에 걸려서 다소 미색이 떨어지는 여인-와 결혼하였지만, 태평천국의 난(1851년)으로 항주에 피난한 시점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둘째 부인으로 삼으려는 그의 시도가 집안의 반대로 무산된 이후, 양문회는 모든 일에 의욕을 잃었고 죽고 싶었다. 그는 매일 서호라는 호숫가를 산책하며 마음을 달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호숫가에 있는 한 서점에서 우연히 『대승기신론』 복사본을 발견하고 깊은 인상을 받아, 자신이 비록 유학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불교 연구에 몰두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이는 근대 불교사상가가 될 한 젊은이와 『대승기신론』의 운명적인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난조분유와 교유

 

불교에 대한 오랜 무관심과 불교에 적대적이었던 태평천국의 난으로 사찰이 파괴되는 등 혼란한 상황에서, 양문회는 불교 전적을 구하기 위해 애썼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1866년 남경에 금릉각경처를 창립하고 불경 간행에 힘썼다. 1878년부터 청조의 외교관 자격으로 런던과 파리 등 유럽을 순방하였고, 런던에서 막스 뮐러 교수를 만났다. 그를 통해 중국 대장경의 목록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인 학자 난조분유(南條文雄, 1849-1927)를 알게 되었다. 그는 난조에게 모아놓은 불교 전적들을 일본에서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고, 그 결과 중국 대장경 목록에 들어있지 않은 수백 권의 불교 전적들, 특히 당(唐)대 고덕의 주소들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중에 당대唐代 법장(法藏, 634-712)이 편찬한 『대승기신론의기』, 『별기』가 있었고, 이로 인해 양문회는 『대승기신론』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수집된 문헌들 속에는 현장(玄奘, 602-664)의 『성유식론』에 대한 규기(窺基, 632-682)의 주석인 『성유식론술기』가 포함되어 있었고, 또 둔륜遁倫의 『유가사지론기』, 규기窺基의 『법원의림장』, 그리고 불교논리학에 대한 진나(陳那Dignāga, 480-540)의 저서와 규기의 『인명입정리론서』가 있었다. 이들 문헌들은 중국에서는 오래도록 일실되었던 것으로서, 중국인들이 500년 동안 보지 못했던 문헌들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역수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문헌들로 인해 유식 불교에 대한 연구도 새롭게 일어나게 되고, 근대적 불교학의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1901년 이 전적들을 간행한 뒤, 양문회는 많은 학자들을 모아서 불교 연구에 전념하게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중국불교가 근대적으로 변모되는데, 결정적 작용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불교개혁 운동의 사상적 기반

 

양문회는 『대승기신론』을 만나며 불교에 뜻을 두었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자기 사상의 근본으로 삼아 “대승불교의 기틀은 『기신론』의 저자인 마명에서 열렸다.”고 단언하였고, 만년에는 마명종馬鳴宗을 제창하기까지 하였다. 두 차례 유럽에 건너가 서구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난죠분유를 만나 깊은 친교를 맺었던 양문회는, 서양 기독교와 중국 포교를 시작한 일본 정토진종 등을 의식하면서 『대승기신론』을 근본으로 하는 중국불교를 세계에 펼치려고 생각하였다. 

 

 

 사진2. 양문회와 리차드 티모시가 영어로 옮긴 대승기신론읲지, 1907년

 

 

그리고 불교개혁 운동을 지속해가면 얼마 안가 불교가 반드시 서양의 각 종교에 뒤떨어지지 않는 세계 최고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영국 침례교회 선교사였던 라차드 티모시(Richard Timothy, 1845-1919)에게 『대승기신론』을 선물하였고, 흥미를 느낀 그가 번역할 결심으로 협력을 요청하였을 때 승낙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티모시가 번역한 이 영문 『대승기신론』은 1907년 상해에서 출판되었다(사진 2). 그러나 티모시가 『대승기신론』을 영역한 의도는 서양인들에게 불교를 전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바탕으로 중국의 불교도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함이었다. 티모시는 “대승의 신앙은 불교가 아니라, 조물주와 구세주라는 기독교의 동일한 교의의 아시아적 양태”라며 기독교· 대승불교 일원론의 전제에서 번역하였다. 양문회는 물론 티모시의 영역본이 불교를 기독교로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였지만, 이런 영역 작업의 시도 자체가 그의 사상이 『대승기신론』을 중심으로 서양에 대응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양문회의 『대승기신론』 이해 

 

양문회가 『대승기신론』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는 특히 법장法藏과 그의 주소를 추숭하고, 법장의 소가 대승 불교를 공부하는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대승기신론』의 사상은 성종性宗을 위주로 하되 성상性相 융통을 이끄는 불교 저작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반적으로 『대승기신론』의 3대 주석자로 꼽히는 혜원, 원효, 법장의 이해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 법장은 『대승기신론』을 ‘여래장연기종’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중관 사상과 유식 사상에 대한 여래장 연기종의 독립성과 우월성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일본학자들의 학설로, 『대승기신론』은 이사무애理事無礙 법계에 해당하고, 사사무애事事無碍를 말하는 화엄종이 보다 우월한 종파라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혜원이나 원효가 파악하는 『대승기신론』은 유식 불교적 성격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장은 화엄가로서의 종파적 관심사 때문에, 의도적으로 『대승기신론』과 유식 불교의 차이를 부각시켜 여래장연기종으로 독립시켰던 것이다. 

 

양문회가 혜원이나 원효보다 법장의 해석을 주로 받아들인 것은 『대승기신론』을 화엄종 등 중국 불교와의 연관성 하에서 파악하고 긍정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대승기신론』의 여래장연기, 또는 진여연기는 중국 불교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 사상은 바로 진여의 불변不變의 측면과 수연隨緣의 측면을 융합시킨 것이고, 여기에서 단순한 공空뿐 아니라 ‘묘유妙有’를 강조하는 중국 불교가 발전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양문회는 『대승기신론』이 중관 및 유식 사상과 중국 불교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음을 정확히 이해함과 동시에, 중국 불교를 긍정하는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엄종 등 중국 불교의 가치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대승기신론』을 유식 불교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그와 거리를 두려는 법장의 해석이 더 마음에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대승기신론』으로 전체 불교 사상을 조화시키려는 양문회의 견해는 명대明代의 불교의 경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명대 고승들의 『대승기신론』 주소들을 다수 간행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양문회의 이러한 『대승기신론』 이해는 제자들과 이후의 학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지난 글에서 다루었듯이, 양문회 이후 『대승기신론』을 보는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뉘어졌고, 그들 중 중국불교를 추숭하는 이들은 『대승기신론』을 높이 평가하고 반면에 인도불교 원래의 입장으로 되돌아가려는 이들은 비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도 유식 불교를 진정한 불교철학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중국적 전통을 이은 『대승기신론』을 진정한 불교철학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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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석·박사 졸업.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강의,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초빙교수를 지냈다. 지곡서당 한문연수과정 수료. 조계종 불학연구소 전문연구원 역임. 『웅십력 철학사상 연구』, 『신유식론』,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등 다수의 저서 및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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