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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거사와 배우는 유식]
말나식은 깊은 잠에 들거나 기절해도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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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2019 년 7 월 [통권 제75호]  /     /  작성일20-06-26 11:55  /   조회7,72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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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불교학자 ‧ 유식 

 

지난 3회[72호, 73호, 74호]에 걸쳐 말나식의 작용과 기능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유식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표층의 마음인 의식뿐만 아니라 심층의 마음인 말나식과 아뢰야식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런 심층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이번에는 이런 마음은 어떻게 하면 사라지게 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나를 괴롭히는 말나식을 멈추게 하는 수행단계를 발견하여, 그것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에 대해 유식 수행자는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래서 이번호에서는 유식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제시한 말나식이 사라지는 수행단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말나식은 아라한 단계에서 사라진다

 

말나식은 깊은 잠에 빠져도 심지어 기절해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말나식은 어떤 수행 단계에서 사라지는 마음일까요? 세친 보살이 저작한 『유식삼십송』의 관련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아라한멸정阿羅漢滅定 출세도무유出世道無有

<말나식은> 아라한, 멸<진>정 및 출세도의 <수행단계에서는> 사라진다.

이 구절은 언제나 집요하게 자신에게 집착하는 마음인 말나식이 사라지는 단계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말나식은 ‘아라한’의 수행단계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아뢰야식을 설명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아라한의 단계에서는 아뢰야식도 사라집니다. 아라한의 단계는 ‘삼승무학과三乘無學果’의 단계라고도 합니다. 이른바 삼승[성문, 연각, 보살]의 무학과無學果에 도달하여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단계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수행의 단계[향向=위位]와 그 결과[과果]를 사향사과四向四果라고 하는데, 이른바 예류향預流向 · 예류과預流果, 일래향一來向 · 일래과一來果, 불환향不還向 · 불환과不還果, 아라한향阿羅漢向까지의 단계는 아직 배움이 필요한 유학有學의 단계이지만, 아라한의 수행결과인 아라한과阿羅漢果는 수행을 완성하여 모든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배움이 필요 없는 무학과[=무학도]의 단계[위位]입니다. 그리고 『유식삼십송』의 『성유식론』에서는, 아라한의 단계에서는 종자도 현행도 모두 영원히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영단멸永斷滅’, ‘영원히 단절되고 소멸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럼 먼저 ‘아라한’은 어떤 수행단계인지 살펴봅시다. 아라한은 범어 ‘아르하트(Arhat, 공양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를 음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라한의 단계[아라한위阿羅漢位]’는 초기 불교의 깨달음의 단계인 사향사과四向四果를 얻은 성자를 말한다. 사향사과란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예류향 · 예류과, 일래향 · 일래과, 불환향 · 불환과, 아라한향 · 아라한과를 말합니다. 이것은 현장 스님의 번역에 따른 것입니다. 한편 구마라집 스님은 사향사과를 각각 수다원향須陀洹向 · 수다원과須陀洹果, 사다함향斯陀含向 · 사다함과斯陀含果, 아나함향阿那含向 · 아나함과阿那含果, 아라한향阿羅漢向 · 아라한과阿羅漢果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먼저 예류향이란 견도見道(주1)를 성취하고 사성제를 여실지견如實知見하여 ‘진리의 흐름에 든 자’를 말한다. 예류향은 범어 ‘srota-āpanna’[예류에 든 자]의 번역입니다. 그래서 현장 스님은 ‘예류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예류자란 인간 세상의 번뇌를 끊고 처음으로 성자에 들어간 자이며, 이 단계에서는 유신견, 계금취견(주2), 의혹[의疑](주3)의 번뇌가 소멸한 상태입니다. 이 단계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단계인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초지初地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일래향一來向의 단계입니다. 일래향이란 ‘sakṛdāgāmin’ [한 번 더 돌아오는 자]의 번역입니다. 그래서 현장 스님은 ‘일래자一來者’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일래자는 탐貪과 진瞋의 번뇌가 부분적으로 없어진 성자의 단계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두 번 다시 생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래자는 천인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에 다시 한 번 더 태어난다고 합니다. 만약에 천인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얻으면 인간세계에 다시 한 번 더 태어나고, 다시 천인의 세계에 돌아와 열반에 듭니다. 반면 인간세계에서 깨달음을 얻으면 천인의 세계에 태어나고, 다시 인간세계에 돌아와 열반에 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세계와 천상세계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일왕래一往來 또는 일래一來라고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불환향不還向의 단계입니다. 불환향이란 ‘anāgāmin’[결코 돌아오지 않는 자]의 한역입니다. 그래서 현장 스님은 범어의 의미를 살려 ‘불환자不還者’로 번역하였습니다. 불환자란 욕계의 번뇌[탐·진]를 완전히 끊은 성자를 말합니다. 불환과를 얻은 자는 사후에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지만 다시는 욕계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불환과라고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아라한향입니다. 아라한향에서는 깊은 수행을 반복하여 수혹修惑(주4)도 끊고,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의 혹(惑, 번뇌)을 전부 끊었으며, 무상·무아의 지혜를 체득한 단계입니다.

 

아라한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3가지를 갖춘 사람[응공, 살적, 무생]을 말합니다. 

첫째, 응공應供이란 응수공양應受供養의 줄인 말로, ‘마땅히[응應] 공양[供養] 받을[수受]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끊기 어려운 아애(我愛,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의 번뇌를 수행을 통해 영원히 끊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살적殺賊이란 ‘번뇌의 적賊을 영원히 살해했다[살殺]’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의 번뇌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끊기 어려운 것이 자기에게 끊임없이 집착하는 아집[아애]이다. 이것을 영원히 끊은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합니다. 셋째, 무생無生이란 ‘영원히 다시 새로운 생生을 받지 않는다[무無]’는 의미입니다. 즉 아라한은 ‘윤회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첫 제자인 5비구를 인가해주고 난 뒤에 “여기에 6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5명이 아니고 6명인 이유는 부처님, 당신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즉 제자와 부처님의 깨달음 내용은 같지만, 단지 차이가 나는 것은 부처님이 먼저 아라한이 되었고, 5비구는 나중에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 즉 부처’라는 말은 성립 가능한 것입니다. 이 부처님의 선언이 바로 불교의 출발점이자, 서양의 유일신을 믿는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이것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있는 불교의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이처럼 아라한이 되어야 심층의 마음인 아뢰야식과 말나식의 작용이 멈춘다고 합니다.

 

말나식은 멸진정과 출세도에서 소멸된다

 

『유식삼십송』에서 “말나식은 멸진정의 단계[위位], 출세도의 단계에서도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먼저 멸진정(滅盡定, nirodha-samāpatti)이란 최고의 선정을 닦아 마음의 편안함에 대한 기쁨도 떠나 있고, 더 이상 미혹의 세계에 되돌아오는 것이 없는 경지에 들어 간 성자聖者, 즉 불환과(不環果, anāgāmin)의 단계입니다. 멸진정의 글자적인 의미는 마음과 마음작용[심소]이 멸진滅盡한 선정상태[정定]를 말합니다. 유식에서는 멸진정에 이르면 팔식 중에서 전오식, 제6 의식, 말나식의 작용은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라한의 단계처럼 영원히 말나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유식론』에서는 말나식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것을 잠복멸(暫伏滅, 잠시 동안 활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깊은 선정의 단계에는 무상정無想定(주5)과 멸진정의 단계가 있습니다. 이 두 단계를 일반적으로 ‘이무심정二無心定’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둘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무상정은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의 6식이 사라지지만, 멸진정은 6식뿐만 아니고 말나식까지 사라지는 단계입니다. 또한 멸진정을 멸수상정(滅受想定, 수와 상을 멸한 정)이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심소[마음작용] 중의 고락苦樂을 감수하는 작용인 수受와 외부로부터 들어온 센스데이터를 분석하여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을 구성하는 마음작용인 상想을 멸했기 때문입니다.

 

말나식이 잠시 동안 사라지는 또 다른 단계는 출세도이다. 출세도란 ‘인간의 본질은 무아라는 진리를 직관하여 세간적 존재를 초월한 수행도를 말하는데, 즉 유식의 진리를 초월하여 보살의 십지[열 가지의 수행단계] 중에서 초지[환희지](주6)에 도달한 견도見道에서 수도修道(주7), 구경도(究竟道, 부처님의 경지)의 단계에서는 말나식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 때에는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라는 두 개의 무루지가 활동합니다. 근본지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청정한 지혜이고, 후득지는 그 청정한 지혜가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지혜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아라한의 단계에서는 아뢰야식, 말나식, 의식의 모든 마음이 사라집니다. 멸진정의 단계에서는 의식과 말나식이 사라집니다. 무상정의 단계에서는 의식이 사라집니다. 지면관계로 설명이 부족하지만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면 수행단계에 대해서는 한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제7 말나식에 대한 해설은 마치고, 다음호에서는 제8 아뢰야식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namaste

 

주)

(주1)견도란 오도(五道, 자량도, 가행도, 견도, 수도, 구경도) 중의 하나입니다. 진리[사성제]를 보는 단계로, 중생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을 말합니다. 『유식삼십송』에서는 통달위通達位라고 합니다.

 

(주2) <유신견과 계금취견>

『유식삼십송』에서는 수행을 방해하는 근본번뇌를 다섯 종류로 나누는데, 즉 탐[탐욕], 진[분노], 치[어리석음], 악견[잘못된 견해], 의혹[의疑,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이 중에 악견(惡見, dṛṣṭi)이란 잘못된 견해를 말하는 것으로, 여러 진리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바른 견해를 장애하고, 괴로움을 초래하는 활동을 하는 번뇌 심소입니다. 이른바 연기, 공, 무상無相, 무아, 무상無常 등을 이해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견해입니다. 그리고 악견은 구체적으로 5종류, 즉 유신견[살가야견], 변집견, 사견, 견취견, 계금취견로 구분합니다. 그 중에 본문에서 언급한 ‘유신견’과 ‘계금취견’도 악견, 즉 잘못된 견해입니다.

 

우선 유신견이란 신견身見, 아견我見 등으로 한역하며, 살가야견이라고 음사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간존재, 즉 오온에 대해서 상주불변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존재한다거나 자신이 소유한 것에 애착하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성유식론』에서는 “오취온에 대해서 ‘나’와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견해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작용으로 한다[謂於五取蘊執我我所. 一切見趣所依為業].”라고 하였습니다.

 

계금취견(戒禁取見, śīlavarta-parāmarśa-dṛṣṭidṛṣṭi)은 잘못된 견해에 기초하여 잘못된 계율을 뛰어난 계율이라고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계율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을 정당하다고 여기며, 그것에 의해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유식론』에서는 “여러 견해에 수순하는 계율과 금욕 및 의지처인 5온에 대하여 가장 뛰어나다고 집착해서 능히 청정[깨달음]과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로움이 없이 근고(勤苦, 고행을 권장하는 것)의 의지처[무익한 고행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작용으로 한다[謂於隨順諸見戒禁及所依蘊. 執為最勝能得清淨. 無利勤苦所依為業].”라고 주석합니다. 

 

(주3) 의(疑, vicikitsā)란 근본번뇌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일에도 그 도리를 분명히 판별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마음작용입니다. 그래서 『성유식론』에서는 “모든 진리[제諦]와 도리[이理]에 유예猶豫함을 본질로 하고, 능히 불의선품(不疑善品, 진리를 의심하지 않는 선한 성품)을 장애하는 것을 작용[업業]으로 삼는다[於諸諦理猶豫為性, 能障不疑善品為業].”라고 주석합니다. 여기서 제(諦, 진리)는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이고, 리理는 그리하여 나타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의’란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 공의 진리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작용입니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진리 탐구를 위해 의심하기도 하고, 그 의심이나 의혹을 풀기 위해 질문하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는 누구나 좋은 삶의 방식이라고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번뇌의 의疑는 단순한 의혹이나 의심이 아니고 ‘진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 자체에 대해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어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맹목적인 믿음은 경계해야 하지만, 합리적인 사고를 동반한 믿음은 인간의 삶을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주4) 수도修道의 단계[위位]에서 끊을 수 있는 탐[탐욕], 진(瞋, 분노), 치(癡, 어리석음), 만[아만]의 번뇌를 하는데, 욕계의 탐[탐욕], 진(瞋, 분노), 치(癡, 어리석음), 만[아만]과 그리고 색계와 무색계에서 각각 탐, 치, 만, 즉 10가지를 말합니다. 유식에서는 선천적인 번뇌, 즉 구생기俱生起라고 합니다. 

 

(주5) 무상정(無想定, asaṃjñā-samāpatti)이란 심소 중의 하나인 상想, 즉 대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각작용이 없는[무無] 선정[정定] 상태[6가지 식의 마음작용을 멸한 선정]를 말합니다. 무상천에 태어나는 원인이 됩니다. 

 

(주6) 환희지歡喜地는 처음으로 범부의 성품을 끊고 성자의 성품을 얻어서 아공과 법공의 두 가지 공을 깨달아 자신과 남을 이익 되게[자리와 이타] 하여 큰 기쁨이 생기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극희지極喜地라고도 합니다. 

 

(주7) 수도란 오도(五道 자량도, 가행도, 견도, 수도, 구경도) 중에 4번째 수행단계입니다. 견도에서 더욱 수행을 정진하여 모든 일에 수혹(修斷惑, 수도에서 끊어지는 번뇌)을 점차로 끊는 단계입니다. 십지의 초지[주심住心]에서 제10지의 금강유정의 무간도까지를 말합니다. 수습위修習位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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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불교학자. 유식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마음공부 첫걸음』·『왕초보 반야심경 박사되다』·『범어로 반야심경을 해설하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마음의 비밀』·『유식불교, 유식이십론을 읽다』·『유식으로 읽는 반야심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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