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로 세상 읽기]
남에게 속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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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 2019 년 7 월 [통권 제75호] / / 작성일20-06-26 12:09 / 조회7,508회 / 댓글0건본문
김군도 | 자유기고가
서암언 화상이 매일 스스로 주인공! 하고 부르고 스스로 예! 대답하면서 이내 말하기를 “깨달 음에 명확히 이르렀는가?” 묻곤 “네!” 답했다. “금일 이후에 절대로 남에게 속지말라.” 하며 스스로 “네! 네!” 답했다.
瑞巖彦和尙, 每日自喚主人公, 復自應喏, 乃云 : “惺惺著.” “喏.” “他時異日, 莫受人瞞.” “喏喏.” (『무문관』 제12칙)\\다른 사람의 속임에 넘어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속임이란 본래 상대를 자신보다 하수에 두고 깔볼 때 이루어지는 일이다. 즉 약점과 허점을 상대에게 보이게 되면 상대방은 언제든 기회 있을 때마다 나를 얕잡아보고 골탕 먹이기 일쑤다. 단순히 상대가 골려먹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일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겠지만 어떠한 큰 이권을 놓고 속임수를 쓴다면 내가 받을 상처는 작지 않을 것이다.
소와 호랑이의 차이
서암언(瑞巖彦 850∼910) 선사는 덕산선감(德山宣監 778~863) 선사의 법손法孫이고 암두전활(巖頭全豁 828~887) 선사의 법사法嗣로 보다 정확한 이름은 서암사언瑞巖師彦이다.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전하는 바로는 천성이 매우 둔하여 스승인 암두전할 선사도 깨달음에 이르긴 어렵다고 보고 잘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수행이 본디 금을 제련製鍊하는 것처럼 수없이 많은 단계의 인고忍苦 과정을 통해 계위階位를 높여 가듯이 서암언 선사는 자신을 철저히 담금질했던 모양이다. 선禪에서는 ‘소’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다. ‘심우도尋牛圖’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소는 천천히 걸어도 천 리 만 리를 갈 수 있으나 호랑이는 빨리 달리는 재주는 출중해도 천 리 만 리를 가지 못한다. 재빠르고 약은 이들은 호랑이처럼 속도감 있게 사냥하는 듯하나 지구력이 떨어져 실패확률이 높다. 그래서 자신의 재주를 과신한 이들이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서암언 화상과 비슷한 예는 부처님 재세在世 당시 ‘주리반특가’라는 제자에게도 찾을 수 있다. 주리반특가는 수행자들 사이에서 ‘멍청이’로 통했다. 아마 지능이 다른 사람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던 모양이다. 이런 주리 반특가는 그래서 번번이 다른 수행자들에게 놀림을 받곤 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놀림을 당하고 있는 주리반특가에게 ‘쓸고 닦아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주리반특가는 마당을 쓸고 신을 닦고 밥을 먹으며 늘 ‘쓸고 닦아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웠다. 그리곤 마침내 주리반특가는 깨달았다. 쓸고 닦는 것이 마음에 있다는 뜻을 알게 된 주리반특가는 그간의 우둔함과 어리석음에서 단박에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당당히 지덕知德과 혜안慧眼을 갖춘 아라한의 경지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선지식으로 자리했다.
서암언 화상도 매일매일 밥을 먹거나 청소하거나 앉으나 서나 스스로 ‘주인공아!’ 하고 부르곤 스스로 ‘네!’ 하고 답했다고 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다. 늘 점검하고 챙겨야 할 대상이다. 언젠가 부처가 돼야할 미완의 여래다. 이 주인공 화두는 서암언 화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서암언 화상은 대중들을 제접提接할 때도 항상 이 주인공 화두를 들어 가르침을 폈다. 그 출처는 『선문염송설화』 제988칙에 나온다.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선사가 어느 날 한 스님과 법거량을 주고 받는다.
“요즈음 어디에서 떠나왔는고?” “서암瑞巖에서 떠나왔습니다.”
“서암이 무슨 말을 하던고?”
“늘, 주인공아! 하고 불러놓고 스스로 ‘예’ 하고 답합니다. 그리곤 ‘정신 차려라. 절대로 남에게 속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거기에 있지 않고 나왔는고?”
“서암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대꾸를 하던고?”
현사 선사의 이 물음에 법거량을 하던 스님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내용은 주인공 서암언 화상이 화두를 독자적으로 특색 있게 썼음을 반증해준다.
남에게 속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자신을 늘 성찰하고 점검하는 일이다. 속임은 내가 갖고 있는 욕구와 비례한다. 어떤 특정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과 연결되면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마음을 투명하고 맑게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고단수의 사기꾼이라도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나아가 어리석음을 깨뜨리는 것도 중요하다. 종말론終末論에 귀가 솔깃하고 점복술占卜術에 쉽게 의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우리 세상에 인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벌어지는 일이란 없다. 모든 것이 연기론적緣起論的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허무맹랑한 주장에 넘어가는 것은 어리석음이 작용해서다. 이런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다이어트 식품에 속아 부작용에 고생하고 만병통치약이라는 한 마디 말에 선뜻 큰돈을 내놓고 뒤에 땅을 치고 후회한다.
사람들이 속고 사는 심리를 반영한 바넘효과[Barnum effect]라는 말이 있다. 바넘효과는 19세기 말 미국의 링링 서커스단을 이끌었던 곡예사 바넘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바넘은 조이스 헤스라는 늙은 흑인 여인의 나이를 161세라고 선전하며 쇼에 출연시켜 관객을 끌어 모으는 데 성공했다. 헤스는 실제 나이가 80살이 되지 않았다. 바넘은 또 원숭이 머리와 물고기 꼬리를 교묘히 이어 붙여 인어라고 사람들을 속였다. 4살짜리 어린애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어른이라고 속이기도 했다. 특히 바넘은 사람들의 성격을 잘 알아맞혔는데 사람들은 그의 얘기를 들으면 한결같이 “맞아, 바로 내 얘기야.”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바넘이 남긴 유명한 얘기도 전해진다. “이 순간에도 속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속이지 못할 사람은 없다. 대중은 속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바넘의 말처럼 왜 속임에 약한 것일까? 바넘효과란 유동적이고 불명확한 자아개념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자아개념이 불명확하다는 것은 서암 화상이 말하는 주인공과도 직결된다. 나를 모르고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주인공이 절대 될 수 없다. 자신과는 다른 상반된 생각과 행위마저 자신의 기억 속에 저장해 놓은 채 불리한 때에는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이용한다. 그래서 점쟁이가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모습에 대한 것이라고 여기곤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넘효과는 뒤에 1940년대말 미국의 심리학자 포러Forer에 의해서 성격진단 실험을 통해 증명된다. 이에 따라 ‘포러효과’로도 부르고 있다.
자기를 정확히 알면 속지 않아
속는 일은 한 마디로 어리석음에 기인한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모르고, 착각과 환상에 집착하면 언제든 속아 넘어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오죽하면 바넘이 “세상에 속이지 못할 사람은 없다.”고 했을까? 우리가 서암화상의 말처럼 남에게 속지 않으려면 자기를 바로 봐야 한다. 자기를 바로 알아야 자아개념을 확립할 수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불안과 욕망 등 부정적 심리요인도 제거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자아존중감을 필요로 하는 시대다. 글로벌화되고 다문화가 혼재되는 복잡성을 띠고 있지만 그럴수록 자아존중감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나 자신의 정체성을 보다 확고히 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속고 속이는 관계 속에서의 자기중심적 행위는 사회를 병들게 한다. 저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생활은 바람직하다. 상생과 배려, 존중의 차원에서 서로의 존재감을 위한다면 분명 우리 사회는 건강한 활력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서암 화상은 이런 점에서 일찍이 주인공 화두를 남겨놓은 것이리라. 서암 화상이 매일 같이 자신을 향해 주인공아! 부르고 나서 스스로 속지 말라 하곤 네! 네! 답하는 것은 자기점검의 일상이라 하겠다. 지혜와 복덕을 갖춰나가려는 자아개념의 확립이 일찍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인간 사회는 복잡다단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심리적으로도 갈수록 심층적이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속고 속이는 구조는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난해한 복잡 구조라 하더라도 자신을 주인공으로 매일매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구로부터의 속임수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늘 깨어있어 야 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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