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빛의 말씀]
광수공양廣修供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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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19 년 11 월 [통권 제79호] / / 작성일20-06-28 16:44 / 조회58,748회 / 댓글0건본문
성철 스님 : 대한불교조계종 제6·7대 종정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장삼을 빌려 입고
부처님을 팔아 자꾸 죄만 짓는가.
云何賊人 假我衣服 裨販如來 造種種業.”
누구든지 머리를 깎고 부처님 의복인 가사장삼을 빌려 입고 승려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놈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사장삼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우쳐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자기의 생활 도구로 먹고사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전체가 다 도적놈이라고 『능엄경楞嚴經』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승려가 되어 절에서 살면서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실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가까이는 가봐야 하고 근처에는 가봐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는 못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人身難得 佛法難逢].”
다행히 사람 몸 받고 승려가 되었으니 여기서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제도는 못 할지언정 도적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부처님을 팔아 먹고사는 그 사람을 도적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이 사는 처소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곳은 절이 아니고 도적의 소굴, 적굴賊窟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이 됩니까? 도적놈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적에게 팔려 있으니 도적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지요.
중생을 이롭게 하는 법공양이 최고
딴 나라는 다 그만두고라도, 우리나라에 절도 많고 승려도 많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의 딱지를 면할 수 있는 승려는 얼마나 되며, 또 도적의 소굴을 면할 수 있는 절은 몇이나 되며, 도적의 앞잡이를 면할 수 있는 부처님은 몇 분이나 되는지, 참으로 곤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승려노릇 잘 못하고 공부를 잘 못해서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할지언정, 천추만고의 우주개벽 이래 가장 거룩하신 부처님을 도적 앞잡이로 만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도적놈 되는 것은 나의 업이라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지옥으로 간다 할지라도 달게 받겠지만 부처님까지 도적놈 앞잡이로 만들어서 어떻게 살겠느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든 우리가 노력해서 이 거룩하신 부처님을 도적의 앞잡이가 안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파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불공佛供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부처님 파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 영험하여 명命도 주고 복福도 주고 하니, 우리 부처님께 와서 불공하여 명도 받고 복도 받아 가시오.” 하면서 승려는 목탁을 칩니다.
목탁이란 본시 법을 전하는 것이 근본 생명입니다. 유교에서도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목탁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바른 법을 전하여 세상 사람이 모두 살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실정에서 목탁이 돈벌이에 이용되지 않는 절은 별로 없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목탁 치면서 명 빌고 복 빌고 하는 것, 그것은 장사입니다. 부처님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그렇듯이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허물을 반성하여 고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허물이 있는 줄 알면서도 반성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더 큰 허물을 빚는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참다운 불공이 되는 것인가? 내가 전부터 자꾸 불공 이야기를 해 오지만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교에서는 『바이블』한 권이면 지침이 되지만 불교에서는 팔만대장경이라 하여 듣기만 하여도 겁이 납니다. 장경각의 그 많은 경판은 엄청납니다. 저 많은 것을 보아서, 언제 어디서 불교의 근본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 호호망망浩浩茫茫합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는 전통적으로 정설이 있습니다.
경전 중에서 부처님 말씀의 근본이며 가장 소중한 경은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으로 이는 경 중에서도 왕이요, 불교의 표준입니다. 그 중에서도 『화엄경』이 『법화경』보다 진리면에서 더 깊고 넓다 합니다. 『화엄경』도 이것이 80권이나 되는데 어떻게 다 보겠습니까. 더구나 모두가 어려운 한문인데.
다행히도 『화엄경』을 요약한 경이 또 한 권 있습니다. 「보현보살행원품」인데 『약略화엄경』이라고도 합니다. 「보현보살행원품」에 불교의 근본진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불교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가가 모두 규정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불공하는 데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보현보살 십대원十大願의 광수공양 편입니다. 물론 다 알겠지만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심을 내어 온 천하의 좋은 물건을 허공계에 가득 차도록 다 모으고, 또 여러 촛등을 켜되 그 촛불 심지는 수미산 같고 기름은 큰 바닷물같이 하여 두고서 수많은 미진수微塵數 부처님께 한없이 절을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공 중에는 가장 큰 불공으로 그 공덕 또한 많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법공양法供養이란 것이 있습니다. 일곱 가지의 법공양 중에 특히 “중생을 이롭게 하라”는 것이 그 골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많은 물자를 당신 앞에 갖다 놓고 예불하고 공을 들이고 하는 것보다도 잠시라도 중생을 도와주고 중생에게 이익되게 하는 것이 몇 천만 배 비유할 수 없이 더 낫다고 단정하셨습니다.
비유하자면 장사와 같습니다. 장사를 할 때 밑천을 많이 들여서 이익이 적은 것을 할 것인가 아니면 밑천을 적게 들여 이익 많은 장사를 할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누구든지 이익이 많은 장사를 하려 할 것입니다.
많은 물자를 올려놓고 불공을 하려면 그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이익중생공양利益衆生供養, 즉 중생을 잠깐 동안이나마 도와주는 것은 큰 힘이 들지 않으므로 밑천이 적게 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의 이익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비용 많이 들여 하는 불공은 중생을 잠깐 도와주는 그 불공에 비교할 것 같으면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 억만 분의 일로도 비유할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누구든지 나에게 돈 갖다 놓고 명과 복을 빌려 하지 말고 너희가 참으로 나를 믿고 따른다면 내 가르침을 실천하라.” 하셨습니다. 중생을 도와주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행원품」의 다른 곳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길가에 병들어 거의 죽어가는 강아지가 배가 고파 울어댈 때 식은 밥 한 덩이를 그 강아지에게 주는 것이 부처님께 만반진수를 차려 놓고 무수, 수천만 번 절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이 크다.”고도 하셨습니다.
이런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불공이요, 이를 행해야만 참으로 내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요즘 학생들에게 불공하라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학생들은 “우리도 용돈을 타 쓰는 형편인데 어떻게 불공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공은 반드시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정신으로, 또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이 모두 불공입니다. 우리가 몸, 마음, 물질 이 세 가지로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세상에 꽉 차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 할 뿐입니다. 이렇게 불공하여야만 마침내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수련대회 때 3천 배 하고 백련암에 올라와 화두 가르쳐 달라고 말하면 “자, 모두 화두 배우기 전에 불공하는 방법 배워 불공부터 시작한 후 화두를 배우자.”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모두 눈이 둥그레집니다. 우리는 돈도 없는데 부처님 앞에 돈 놓고 절하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그런데 나중에 그 내용을 듣고 나서는 “모두 불공합시다.” 하면 힘차게 “네.” 하고 대답하는데, 진정으로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히 주의를 시킵니다. 그것은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자랑하는 그것은 나쁜 일입니다. 애써 불공해 남을 도와주고 나서 자랑하면 모두 자신의 불공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랑과 자기선전을 하기 위해 하는 불공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할 재료를 만드는 것입니다. 입으로 부수어 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남모르게 도와주라!” 이것뿐입니다. 예수님도 “바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학생들에게 이 말이 좋게 들리는가 봅니다. 자주 오는 편지에 “스님께서 말씀하신 남모르게 남을 돕자는 그 말씀을 평생 지키고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6·25사변 이후 마산 근방 성주사라는 절에서 서너 달 머무를 때입니다. 처음 가서 보니 법당 위에 큰 간판이 붙었는데 ‘법당 중창 시주 윤○○’라고 굉장히 크게 씌어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으니 마산에서 한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인데 신심이 있어 법당을 모두 중수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언제 여기 옵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이 오신 줄 알면 내일이라도 곧 올 거라는 겁니다.
그 이튿날 과연 그분이 인사하러 왔다기에, “소문 들으니 당신의 신심이 퍽 깊다고 다들 칭찬하던데, 나도 처음 오자마자 법당 위를 보니 그 표가 얹혀 있어서 당신 신심 있는 것을 알게되었지.”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칭찬을 많이 하니 퍽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간판 붙이는 위치가 잘못된 것 같아. 간판이란 남들 많이 보기 위한 것인데 이 산중에 붙여 두어야 몇 사람이나 와서 보겠어? 그러니 저걸 떼어서 마산역 앞 광장에 갖다 세우자고. 내일이라도 당장 옮겨 보자고.”
“아이구, 스님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겠소? 당신이 참으로 신심에서 돈 낸 것인가? 저 간판 얻으려 돈 낸 것이지.”
어떤 사람들은 시주를 할 때 미리 조건을 내세웁니다. 비석을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석을 먼저 세워 줍니다. 그러면 돈은 내지 않고 비만 떼어먹기도 합니다.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고? 몰라서 그런 것이야 허물이 있나? 고치면 되지. 그러면 이왕 잘못된 것을 어찌 하려는가?”
그랬더니 자기 손으로 그 간판을 떼어 내려서 탕탕 부수어 부엌 아궁이에 넣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남모르게 돕는다’는 이 불공을 비밀히 시작한 지가 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또 단체로, 의무적으로 시켰습니다. 만약 내가 시키는 대로 불공할 수 없는 사람은 내게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불공하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예를 들었더니 어떤 학생이 이렇게 질문해 왔습니다.
“스님은 불공 안 하시면서 어째서 우리만 불공하라고 하십니까?”
“나도 지금 불공하고 있지 않은가. 불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이것도 불공 아닌가.”
남을 돕는 것이 참다운 불공
불공하는 예를 또 하나 들겠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 변두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나아졌지만, 어떤 분이 그런 동네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고 싶은데 어떤 방법으로 하면 소문도 안 나고 실천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우선 두어 사람이 그 동네에 가서 배고픈 사람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하고 명단을 만든 후, 또 다른 몇 사람이 그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쌀집에서 쌀을 사고 쌀표를 만들게. 쌀을 지고 다니면 소문만 금방 나 버리니, 한 말이든 두 말이든 표시한 쌀표를 가져가면 바로 쌀을 주도록 준비해 두지. 또 다른 사람이 명단을 가져가서 그 쌀표를 나누어주면, 사람이 자꾸 바뀌니 어떤 사람이 쌀을 나누어주는지 모르게 되지. 또 누가 물어도 ‘우리는 심부름하는 사람이다’고만 답변하는 거야.”
처음에는 쌀표를 주며 쌀집에 가보라 하니 잘 믿지 않더니, 쌀집이 별로 멀지 않으니 한번 가보기나 하라고 자꾸 권했더니, 가서 쌀을 받아오더라는 겁니다.
그 후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하는 말이 “요새 우리 동네에 이상한 일이 생겼어. 어디서 온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이 쌀표를 주어서 곤란을 면했어.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그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왔겠지?” 하더랍니다.
또 마산의 어느 신도가 추석이 되어 쌀을 트럭에 싣고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숨어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신문에서 그걸 알고 그 사람을 찾아내어 대서특필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왔기에 “신문에 낼 자료 장만했지? 다시는 오지 말게.” 했더니 아무리 숨어도 신문에 발목이 잡혔다고 해명했습니다.
“글쎄, 아무리 기자가 와서 캐물어도 발목 잡히지 않게 불공해야지. 불공은 남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부자 노인이 불공을 잘하므로 이웃 청년이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참 거룩하십니다. 재산 많은 것도 복인데, 그토록 남을 잘 도와주시니 그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 고약한 놈! 내가 언제 남을 도왔어? 남을 돕는 것은 귀울림과 같은 거야. 자기 귀 우는 것을 남이 알 수 있어? 네가 알았는데 좋은 일은 무슨 좋은 일인가? 그런 소리하려거든 다시는 오지 말어.”
이것이 실지로 불공하는 정신입니다. 남 돕기 어렵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남 돕기는 쉬운데 소문 안 내기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꾸 예를 들어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미국의 보이스라는 사람이 영국의 런던에 가서 어느 집을 찾는데 안개가 심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이곳저곳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열두어 살 되는 소년이 나타나 물었습니다.
“선생님, 누굴 찾으십니까?”
“어느 집을 찾는데 못 찾고 있단다.”
“저는 이 동네에 사는데 혹시 제가 알지도 모르니 주소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신사는 주소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집은 마침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소년이 인도하여 안내해 준 집에 도착하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하도 고마워서 사례금을 주었더니 그 소년은 사양하고 결코 받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선생님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소년단원 회원인데 우리 회원은 하루 한 가지씩 남을 도와주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었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드리겠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서 소년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신사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에 와 보니 어린이도 남을 돕는 정신이 가득하여 돈도 받지 않고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남을 도우면서 오히려 일과를 할 수 있게 되어 고맙다고 하니, 이런 정신을 배워야겠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에서도 소년단을 시작하였습니다. 온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이 정신은 뻗어나가 우리나라에도 보이스카웃, 소년단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 소년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찾지 못하고, 소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이름 모를 소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그 마을에 큰 들소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에 이렇게 새겼습니다.
‘날마다 꼭 착한 일을 함으로써 소년단이라는 것을 미국에 알려준 이름 모르는 소년에게 이 동상을 바치노라.’
간디 자서전을 보면, 그는 영국에 유학 가서 예수교를 배웠는데 예수교에서는 사람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그 후 불교에서는 진리에 눈떴는데 일체 생명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불교는 사람만이 대상이 아닙니다. 일체중생이 그 대상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미물이고 할 것 없이 일체중생이 모두 다 불공의 대상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중생을 돕는 것이 불공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고 또 몸소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놈 소리를 좀 면할지 모르겠습니다.
6·25사변 전 문경 봉암사에 있을 때,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향곡스님 청으로 부산사람들 앞에서 법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불공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공이란 남을 도와주는 것이지 절에서 목탁 두드리는 것이 아니며, 결국 절이란 불공 가르치는 곳이라고. 불공은 밖에 나가서 해야 하며 남을 돕는 것이 불공이라고. 그리고 「행원품」이야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법문을 마치며 봉암사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에 부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때는 각 도道마다 종무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경남 종무원에서 긴급회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절에서 하는 것은 불공이 아니고, 절은 불공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라 하고,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이라 했으니 결국 이것은 절에 돈 갖다 주지 말라는 말인데, 그러면 우리 중들은 모두 굶어죽으라는 소리냐. 그 말을 한 중을 어디로 쫓아 버려야 한다고 야단들이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니 서울에서도 누가 내려왔습니다. 서울의 총무원에서 똑같은 내용의 회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말할까? 당신들 뜻대로 하자면 부처님께서 영험하고 도력 있으니 누구든지 돈 많이 갖다 놓으면 갖다 놓을수록 복 많이 온다고, 절에 돈벌이 많이 되는 말만 해서 자꾸 절 선전할까? 당신도 천년, 만년 살 것 같나? 언제 죽어도 죽는 건 꼭 같애. 부처님 말씀 전하다 설사 맞아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원통할까? 그건 영광이지! 천하의 어떤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해도 나는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전한 것뿐 딴소리는 할 수 없으니, 그런 걱정하지 말고 당신이나 잘 하시오!”
우리 대중 가운데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까?
“방장스님은 법문 해달라고 했더니 결국 우리 먹고살지도 못하게 만드는구나. 절에 불공 안 하면 우리는 뭘 먹고살란 말인가?”
걱정 좀 되죠? 나도 걱정이 조금 됩니다.
물론 우리 해인사 대중뿐 아니고 다른 곳에서도 이런 생각 할 사람이 있겠습니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를 믿든지 예수교를 믿든지 자기의 신념대로 하는데, 예수교를 믿으려면 예수를 믿어야지 신부나 목사 같은 사람을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지 승려를 따라가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천당도 극락도 아닌 지옥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중간에서 소개하는 것이지, 내 말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달을 가리키면 저 달을 보아야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대중도 다 알겠지만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은 불공을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의 대상은 절 밖에 있습니다. 불공 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중생이 다 불공 대상입니다. 이것이 불공 방향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목탁 치고 부처님 앞에서 신도들 명과 복을 빌어 주는 이것이 불공이 아니며, 남을 도와주는 것만이 참 불공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실천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불교에도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남의 종교와 비교, 비판할 것은 아니지만, 예수교와 불교를 비교해봅시다. 진리적으로 볼 때 예수교와 불교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볼 때에도 예수교에서 보면 불교가 아무것도 아니고, 불교측에서 보면 예수교가 별것 아닐 것입니다. 서양의 유명한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도 “예수교와 불교가 서로 싸운다 하면 예수교가 불교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로 보면 그러하지만 실천면에서 보면 거꾸로 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참으로 종교인다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불교인은 예수교인 못 따라갑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인데, 참으로 자비심으로 승려노릇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남 돕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자비’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승려가 봉사 정신이 가장 약하리라 봅니다. 예수교인들은 진실로 봉사 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갈멘수도원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월 초하룻날 모여서 무슨 제비를 뽑는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양로원, 고아원, 교도소 등 어려움을 겪는 각계각층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양로원’ 제비를 뽑으면 1년 365일을 자나깨나 양로원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고아원’에 해당되면 내내 고아원만을, ‘교도소’면 교도소 사람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생활이 기도로 이루어지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 안 합니다. 조금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의 근본정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인입니다. 그들은 먹고사는 것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닭을 기르고 과자를 만들어 내다 팔아 해결한다고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자기들 노력으로 처리하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서만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어찌 합니까? 불교에서도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데, 소승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승은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은 대승이지 소승이 아닙니다. 원리는 이러한데 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쪽 사람들은 내 밥 먹고 남만 위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교를 본받아서가 아니라, 불교는 ‘자비’가 근본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인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 기준을 남을 돕는 데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백련암에 찾아온 한 여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절을 했느냐?”
“스님, 저는 저를 위해 절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절했습니다.”
“왜 빙빙 돌기만 하느냐?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직접 ‘일체중생이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절해야지. 이것은 ‘모든 중생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비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는 거와는 다르지.”
아무 생각 없이 절을 하지 말고, 절하는 것부터가 남을 위해 절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내게 항상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배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면 날마다 아침에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도 새벽으로 꼭 108배를 합니다. 그 목적은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발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남을 구함이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같이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我今發心 不爲自求 人天福報
願與法界衆生 一時同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중략) …”
그리고 끝에 가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중생들과 보리도에 회향합니다.
〔廻向衆生及佛道〕.”
일체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했으니 기도한 공덕이 많습니다. 이 모든 공덕이 다, 모두 일체중생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원하노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위없는 진법계에 회향합니다
願將以此勝功德 廻向無上眞法界.”
그래도 혹 남은 것, 빠진 것이 있어서 나한테로 올까봐 다시 한 번 모든 공덕이 온 법계로 돌아가고 나한테는 하나도 오지 말라고 발원합니다.
이것이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신라, 고려에 전해 내려온 참회법입니다. 중국도 공산화 이전에는 총림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절에서 다 ‘참회’해 온 것입니다. 일체중생을 위해서, 일체중생을 대신해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모두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의 근본 자세이며, 사명이며, 본분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내가 배가 고픈데 자꾸 남의 입에만 밥 떠 넣으라니 나는 굶으라는 말인가?”
인과법칙이란 불교뿐만 아니라 우주의 근본 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과보가 오는 것입니다. 병이 났다든지, 생활이 가난하여 어렵다든지 하는 것이 악한 과보입니다. 그러면 과거에 무엇인가 악의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기억에는 없지만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내려오며 지은 온갖 악한 일들이 그 과보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인선과라, 이번에는 착한 일을 자꾸 행합니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남을 자꾸 돕고 남을 위해 자꾸 기도하면, 결국에는 그 선과가 자기에게로 모두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기도가 되며, 남을 해치면 결국 나를 해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면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또다시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남을 내가 도우니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법칙에 의해 그 행복이 내게로 전부 다 오는 것입니다.
생물 생태학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해치면 자기가 먼저 손해를 보게 되고, 농사를 짓는 이치도 그와 같다 하겠습니다. 곡식을 돌보지 않으면 자기부터 배고플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배고파 굶어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같이 불공을 잘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공할 줄 모르고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 문 앞에 서서 보니 지옥 속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 모습이 하도 고통스럽게 보여서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그 모습을 보면 ‘아이고, 무서워라. 나도 저 속에 들어가면 저렇게 될 텐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이런 생각이 들 텐데 이 사람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는 많은 사람의 고통을 잠깐 동안이라도 나 혼자 대신 받고 저 사람들을 쉬게 해줄 수 없을까? 편하게 해줄 수 없을까?’ 하는 착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을 하고 보니 지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 천상에 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착한 생각을 내면 자기부터 먼저 천상에 가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회에서도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 스님들은 산중에 살면서 이런 활동에는 많이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오직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 말씀에 따르는 불공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석으로 부처님께 예불하면서 꼭 한 가지 축원을 합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일체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일체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일체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세 번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해보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좋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절을 한 번 하든 두 번 하든 일체중생을 위해 절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기도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돕는 사람, 일체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앞에서 말한 부처님을 팔아서 사는 ‘도적놈’ 속에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서로 힘써 불공 잘해서 도적놈 속에 들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1981년 1월 20일, 방장 대중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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