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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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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3 년 7 월 [통권 제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42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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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깨친 사람의 가르침

 

많은 사람들이 불교는 어려운 종교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불교는 지역적으로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로 갈라지고, 교리적으로는 소승과 대승으로 나눠진다. 대승불교 내에서도 8종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종파가 각자의 교판과 교리에 따라 발전했다. 여기에다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경전과 논소까지 더해지면 누구나 어안이 벙벙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오랫동안 불교를 공부한 사람조차도 불교의 핵심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사람에 따라 고통을 여의고 행복을 찾는 종교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악행을 삼가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종교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또는 수행과 평화의 종교 내지는 합리적이고 철학적인 종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불교의 본질은 깨달음’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했다.

 

불교(佛敎)란 말 그대로 ‘부처님[佛]의 가르침[敎]’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을 의미하는 ‘붓다(Buddha)’라는 말도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불교란 만법의 근본 원리를 바로 깨친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며, 그 가르침은 붓다의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런 이유로 성철 스님은 깨달음[覺]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난다면 불교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경전에서는 연기(緣起)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밝히고 있다. 연기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관계 속에서 서로를 규정짓는 우주적 관계성의 법칙을 말한다. 그와 같은 연기법에 의해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본성을 총체적 관점에서 말할 때 ‘법성(法性)’이라고 한다. 반면 각각의 사물이 가진 개별적 본성을 말할 때는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따라서 법성이라고 하면 모든 존재의 보편적 본성을 말하고, 자성이라고 하면 개별 존재의 본성을 말한다. 그러나 근본에서 보면 법성이 곧 자성이고, 자성이 곧 법성이다. 그러므로 보편적 법성을 아는 것이 개별적 자성을 아는 것이고, 반대로 자성을 바로 깨닫는 것이 법성을 바로 깨닫는 것이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선종에서는 자성을 깨닫는 견성(見性)을 성불, 즉 부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본성을 바로 알게 되면 모든 존재에 대한 지혜도 완성되기 때문이다.

 

부처란 바로 이와 같은 존재의 보편적 본성으로서의 법성, 또는 개별적 본성인 자성을 바로 깨친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불교란 바로 그 법성과 자성을 깨친 분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에게 법성을 바로 깨치는 길을 일러주는 것이 핵심을 이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붓다의 깨달음에서 시작된 불교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어떤 종교는 인간의 경험과 지식의 축적을 바탕으로 성립하였고, 어떤 종교는 신의 계시라는 초월적 현상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불교는 선정을 닦아 안으로는 자성을 깨닫고, 밖으로는 모든 존재의 법성을 아는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부처님은 자성을 깨치는 과정과 모습을 직접 보여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역사적 부처님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2500여 년 전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불교는 바로 이 깨달음으로부터 출발한 종교이다.

 

일반적인 종교는 ‘절대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만 불교는 만법의 법성을 바로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일체 만법의 법성, 즉 자기 성품을 바로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인 만큼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는 것이 성철 스님의 지론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도 자기 성품, 자기 마음을 깨달아서 부처를 이루었다. 그 누구도 지식의 습득을 통해서이거나 초월적 신의 계시를 받고 부처를 이룬 분은 없다. 따라서 성철 스님은 깨달음이야말로 “불교의 근본 생명선이며, 영원한 철칙이며 만세의 표준”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불교의 특징이 된다.

 

혹자는 한국불교의 병폐 중에 하나로 깨달음지상주의를 꼽기도 한다. 불자와 출가자들이 깨달음만을 목표로 하고 자비행의 실천이나 보살행의 실천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태도가 사회적 관심과 참여를 등한시하고 깨달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한탕주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지상주의와 깨달음이 불교의 본질이라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깨달음지상주의가 불자의 잘못된 태도에 관한 문제라면 불교의 핵심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불교의 본질적 특징에 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자성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

 

불교의 시작은 붓다의 깨달음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깨달음은 그것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붓다의 과거 경험에 머물지 않고 바로 여기 살아있는 나의 경험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붓다의 가슴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가섭에게 전해졌으며, 가섭에게 전해진 그 마음은 마치 촛불이 전해지는 것처럼 대대로 전승되는 역동성을 뛰고 있다. 지금 내 앞에서 타오르고 있는 그 불빛을 자신의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깨달음이다.

 

우리들이 여래의 지혜를 깨닫겠다는 것은 중생의 한계를 넘어 여래와 같아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붓다와 중생이라는 이원적 차별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중생들에게는 깨달음을 통해 중생이라는 자기 한계를 벗고 여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 있다. 깨달음은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해탈세계로 가는 길이며, 중생의 삶에서 원대한 성인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런 이유로 불자는 초월적 여래를 받드는 신앙이 아니라 여래의 지혜를 체득하여 스스로 중생의 한계를 벗어나는 깨달음의 길을 추구한다. 그 길에서 중생의 한계는 사라지고 인간의 한계는 초극된다.

 

이렇게 볼 때 불교에서 깨달음을 포기하는 것은 중생의 감옥에 갇혀 살겠다는 것이며, 무명의 동굴에서 은둔하겠다는 것이며, 중생의 한계에 안주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불자가 깨달음을 포기한다면 깨달음은 과거 붓다의 깨달음으로 한정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불교 역시 유일하게 깨달은 존재인 부처님을 신격화하고, 중생이라는 차별적 굴레를 쓰고 살게 될 것이다. 그런 불교는 ‘절대신’을 믿는 여타의 종교와 다를 바 없다. 불교는 그와 같은 한계를 넘어서는 길이며, 스스로 붓다가 되어 지혜를 완성하려는 길이다. 깨달음지상주의에 빠져 자비행의 실천을 방관하는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비판이 불교가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로 비약되는 것은 옳지 않다.

 

자비의 실천이 깨달음의 씨앗

 

만약 깨달음에 대한 비판이 자비의 실천과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면 깨달음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자비행을 실천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바른 길이라고 말해야 한다. 보살행이 곧 깨달음의 씨앗을 심는 인행(因行)이라는 태도와 불교는 깨달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깨달음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문제에 해당한다. 하지만 중생을 향한 자비의 손길과 사회적 실천이 곧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태도는 깨달음이라는 이상과 보살행이라는 실천을 통합하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철저한 보살행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곧 깨달음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진정한 보살행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에 대한 통찰과,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의 진리에 대해 깨달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 혹자는 불교가 깨달음이라는 고원한 이상 말고 중생의 행복을 위한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신기루와 같은 깨달음에 집착하지 말고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으로 얼핏 보기에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깨달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번뇌의 완전한 소멸 없이, 자성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을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며, 찰나의 유위법을 영원이라고 속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참다운 보살행과 진정한 행복도 철저한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제불조사의 가르침이다.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 서두에서 깨달음이야말로 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이 말씀은 깨달음이라는 고원한 목표를 통해 중생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마침내 여래가 되어야할 거룩한 존재임을 믿어야 한다는 가슴 벅찬 가르침이기도 하다.

 

사진설명 1 - 선원에서 정진하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
사진설명 2 - 안거 결제를 위해 스님들이 대승사 선원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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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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