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음미하는 부처님 말씀]
'욕심' 없이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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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학 / 2018 년 7 월 [통권 제63호] / / 작성일20-07-17 14:23 / 조회6,590회 / 댓글0건본문
“어느 축구 선수의 탐욕”
지난 6월 1일, 2018 러시아 월드컵을 앞두고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과 보스니아 대표팀의 평가전이 끝난 다음, 일부 블로거들이 쓴 글의 제목입니다. 상대 골대 앞 모서리에서 드리블하던 손흥민이 골문 앞에 있던 황희찬에게 패스하지 않고 자신이 슈팅을 해서 골을 넣지못한 것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물론 패스를 했더라도 골을 넣었으리라는 보장 같은 건 없었느니, 손흥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해 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손흥민은 이런 반응에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늘 겪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스포츠 스타로서 그가 가진 부와 명예에 비춰보면 당연히 치러야 할 비용 같은 것이니까요. 기업 활동으로 치자면 A/S 비슷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손흥민을 향한 비난이 온당한 것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꺼낸 까닭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욕심’ 없이 살 수 있을까? 인간의 생존―또는 생계―에서 욕심이 배제된 행위는 가능할까? 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방법으로 생업을 이어가는 행위는 딱히 ‘욕심’이라 할 것이 없는, 마치 꿀벌이 꽃에서 꿀을 따는 것과 같은 자연스런 생명 활동입니다. 누구도 이를 욕심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욕심은 가치중립적 의미로 ‘욕구 충족’이라 해야겠습니다만, 이 말에도 조금 어폐가 있긴 합니다. 충족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현실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든 결핍 상태로 살아갑니다. 항소심에서 풀려나긴 했습니다만,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범죄 혐의로 기소된 것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결핍된 욕구 때문이었겠지요. 기본적 욕구의 충족만으로 이 강고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살 수야 있겠지요. 하루 세끼를 라면으로 때우고도 만족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 시대의 신통묘용神通妙用은?
날마다 하는 일 별달리 없고(日用事無別)
오직 스스로 탈 없이 지낼 뿐(有吾自偶諧)
무엇이든 취하고 버리지 아니하니(頭頭非取捨)
어디서든 어긋남이 없네(處處勿張乖)
붉은 옷 자줏빛 옷 입은 이 그 누구인고(朱紫*誰爲號)
이 산중엔 한 점 티끌도 없네(丘山絶點埃)
무엇이 신통묘용인가(神通幷妙用)
물 긷고 땔감 나르는 일이 바로 그것(運水及搬柴)
(*朱紫:조정으로부터 朱衣나 紫衣를 하사받고, 대사나 선사 같은 칭호를 증정 받는 것을 뜻함.)
방龐 거사(?~808)가 석두石頭 스님(700~790)으로부터 ‘날마다의 일’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에 답한 게송입니다. 이 게송의 의미에 대한 사족 달기는 삼가겠습니다. 누구나 단박에 이해할 줄 압니다. 『법구경』에도 이와 거의 같은 의미의 게송에 나옵니다.
골짜기거나 숲이거나
평지거나 언덕이거나
깨달은 이(아라한)가 사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낙원
숲이야말로 낙원이건만
세상 사람들은 모르네
오로지 탐욕을 떠난 사람들만이
이곳을 즐길 뿐이네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그들만이
(『법구경』 제98, 99게송)
가히 저 같은 세간의 범부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나는, 깨달은 이들의 세계입니다. 『숫타니파타』나 『법구경』 같은 초기불교 경전의 가르침은 쉽고 간명합니다. 하나같이 지고 지당한 말씀입니다. 진솔하고 직절합니다. 용어의 생소함이 이해를 가로막는 건 친절한 주석이 달린 번역서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하지만 실천의 문제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되지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과불법鳥窠佛法’이라고 일컬어져 전해 오는 『선문염송』의 고화古話로 대신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대문장가 백락천(白樂天, 당나라, 772~846)이 조과 도림(鳥窠 道林, 741~824) 선사를 찾아 와 물었습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선사가 대답했습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이에 백락천이 말했습니다.
“세 살짜리 아이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선사가 말했습니다.
“세 살짜리 아이도 말할 수는 있으나, 80세 노인도 행하기 어려우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간단히, ‘착하게 살아라’는 말씀인데, 불법의 대의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이보다 어렵고 무거운 말은 없을 것입니다. 무시무시합니다. 솔직히, 저는 자신 없습니다. 설상가상 또 다른 난제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우리말 독해력만 있으면 '불교개론서'만으로도 누구나 ‘무아-연기-공’이라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마치 깨달음을 얻은 듯한 통쾌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지적, 철학적 ‘구름 타기’에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80세 노인도 행하기 어려운 실천의 문제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부처님도 우리의 이런 고충을 알았나 봅니다.
출가자의 생활은 곤란하여 즐거움이 없다
재가자의 삶도 어렵고 괴롭다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려 사는 것도 어렵다
멀리 떠나도 괴로운 일을 만난다
멀리 떠나지 마라
또 괴로운 일을 만나지 마라
(『법구경』 제302게송)
당장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넘어지고, 깨지고,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삶일지라도, 눈앞의 문제를 두고 도망치지 말고 어떻게든 발 닫고 선 곳에서 살아보라는 부처님의 격려로 들려서 말입니다.
위 게송은 사성제四聖諦의 다른 표현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고苦―집集―멸滅―도道. 누구나 아는 가르침일 텐데, 주제넘게 첨언을 하자면 그 구조가 ‘결과[苦]―원인[集], 결과[滅]―원인[道]’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보면 고苦―집集―멸滅―도道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고통이 집착에서 비롯되는 건 진리이지만, 고통스럽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난의 고통이 돈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집착의 원인인 돈 욕심이 반드시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수전노와 도둑을 만들기도 하지만 검소와 절약으로 보시를 가능하게도 합니다. 멸滅―도道는 시점의 분리가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욕심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길게는 300만 년 전(오스트랄로피테쿠스), 짧게는 15만 년 전(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부터 욕심, 의심, 불안은 생존의 무기였고 진화의 동력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때의 욕심은 생존 차원의 소박한 형태로 오늘의 욕심과는 차원이 달랐겠지만 말입니다.
힐링 열풍에 이어 워라밸(Work-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수입품 신종 ‘마음 마사지’ 사업이 등장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업 감각입니다. 힐링을 불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명백한 ‘삶과 실천(道)’의 분리입니다. 워라밸은 더 고가로, 삶으로부터 마음을 분리시키는 상품입니다. 워라밸 붐 덕분에 캠핑카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는 국민 행복 증진이라는 생색내기에 내수 진작이라는 내심도 굳이 감추지 않습니다. 워라밸 소비라는 스트레스 항목이 하나 더 늘게 생겼습니다.
무엇이 이 시대의 신통묘용神通妙用일까요, 불교에서 ‘독’으로 여기는 ‘탐진치’를 무한 승인, 무한 증장시키는 소비 자본주의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는 주체적 삶을 살겠다는 욕심이 아닐까요. 멀리 떠나도 괴로운 일을 만난다. 멀리 떠나지 마라. 또 괴로운 일을 만나지 마라. 『법구경』의 진리를 지금 여기서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현전하는 윤회(소비-고갈-과욕-스트레스)로부터의 해탈일 것입니다.
‘나’, 궁극의 스승
이 글이 독자들에게 다가갈 즈음엔 월드컵이 한창이겠지요. 저마다 ‘안방의 히딩크’로서 경기 지휘 잘 하십시오. 무능한 감독은 경기장에서 구경꾼 노릇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 세상에서, 스포츠 산업의 스타 종사자로서 ‘손흥민의 탐욕’은 허물이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구조를 공고히 한 우리 모두의 공업 소산이니까요. “대~한민국”을 외칠 때, 마음속으로 다음 게송도 읊어 보면 좋겠습니다.
나(부처님)는 모든 것을 이겼다
모든 것을 알았다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갈애로부터 해방되었다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했으니
누구를 일러 스승이라 할 것인가
(『법구경』 제353 게송)
※ 이 글에 인용한 『법구경』의 게송은 이원섭 시인(1924~2007)이 번역 해설한 『법구경의 진리』(1980년, 기린원)를 바탕으로 삼아 행을 나누고 어조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근심 없는 세상에 계실 것이므로 너그러이 봐 주실 것이라고 믿고, 어리광 같은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이점 고려하시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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