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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불교 『장캬교의론』 ] 3. 경부행중관자속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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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활  /  2020 년 7 월 [통권 제87호]  /     /  작성일20-07-20 15:29  /   조회85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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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 장꺄롤뻬돌제 지음 

                                                   [한  국] 조   병   활  옮김

 

  ‘교의敎義’는 티베트어 grub mtha’를 번역한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학설강요學說綱要’로, 중국학자들은 ‘종의宗義’로 대개 옮긴다. 종의는 ‘어떤 종파宗派의 교의敎義’라는 의미다. 종파宗派라는 말은 중국불교에서 주로 사용하며 인도불교에 대해서는 통상 ‘학파學派’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중관파·유식파라고 부르지 중관종·유식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티베트불교 교의론은 인도의 설일체유부·경량부·유식파·중관파 등 4대 학파의 교의체계를 설명하고 있기에 종의 보다는 ‘교의’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그래서 역자譯者는 grub mtha’를 ‘교의’로 옮긴다. grub mtha’에는 학파學派, 교파敎派, 종취宗趣, 교의敎義 등 다양한 의미가 있다. ‘어떤 학파나 교파의 확정된 학설學說’이라는 뜻을 가진 산스끄리트어 siddhānta[한역漢譯은 실단悉檀 혹은 실단다悉檀多]를 티베트어로 옮긴 말이다. grub mtha’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성취grub의 극한mtha’이다. 교리와 경전 그리고 불교 이론에 근거해 확립한 자기 교파의 주장이 이 보다 더 뛰어넘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 그래서 자기 교파가 성취한 이론의 극한極限이자, 다른 교리 앞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확립된 ‘교의’가 grub mtha’다. 불교와 외도의 각 교파가 정립한 이론체계, 즉 견見·수修·과果에 대한 견해가 grub mtha’다. 번역에 사용된 『장꺄교의론』의 저본은 Grub mtha’ thub bstan lhun po’i mdzes rgyan, pe cin:krung go’i bod kyi shes rig dpe skrun khang, 1989이다. ‘중관파 부분’ 가운데 극히 일부만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한편, 티베트어 표기법은 ‘와일리 시스템’을 따랐고 책 제목이나 인물의 경우 첫 음절의 주요 발음을 대문자로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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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관자속파[자립파]의 체계를 설명함에 [1]정의, [2]분류, [3]주장 등 세 가지가 있다.

  [1] 정의. 『감로장甘露藏』에 “자속自續[의 의미]은 자주自主와 주권主權”이라고 말한 것처럼, 자속과 자주自主 그리고 자성自性[본성] 등의 의미는 같다. 『근본중송(중론)』 제13품을 해설한 『반야등론般若燈論』에서 청변은 “지금 비판에 답변하고 자주적으로 비량比量하는 힘으로 모든 행위의 방식에서 무자성無自性을 드러내기 위해 제13품을 짓는다.”고 밝혔다. 따라서 대론자[논적論敵]가 승인하는 것과 관계없이 시설처施設處[가립假立기반, 명명처命名處]의 견지에서, 외경外境의 공성空性의 역량으로 입론자와 대론자[논적]의 틀림없는 지각知覺에 명제의 주어主語가 동일하게 나타나고, 그 명제의 주어가 성립되는 상황이 이치에 맞는 이유로 확실하게 증명되고 나면, 증명 대상을 깨닫는 바른 추론이 생긴다는 것이 자속파의 함의[含意, 의미]이다. 이처럼 확립[안립]을 합리적으로 인정하는 중관사中觀師를 중관자속파라고 부른다. 

 

  한편, 자속파의 이론체계에 무해無害한 근식根識은 개념의 현현경顯現境에서 틀림이 없다. 틀림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현현[顯現, 인식된 어떤 사물과 그 개념]이 무해한 근식들에서 [물질적 존재인] 색色 등을 자성으로 성립시키고, 색色 등도 자성으로 성립된다고 승인하는 바로 그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해 쫑카빠(1357-1419)는 『람림첸모Lam rim chen mo』에서 “[중관파들이] 자속自續의 논거論據(상相·표시標示)를 자기의 이론체계(자종自宗)에서 인정하는 까닭 또한 개념상(언어상, 일반적 사실에서) 자체적(자성自性)으로 성립되는 자상自相이 있다는 이것이므로 자속自續의 논거(상相·표시標示)를 자기의 이론체계에 정립하고 안 하고는 매우 미세한 이 ‘부정 대상’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무자성無自性의 논거(상相·표시)인 삼상三相이 스스로[자기 측면에서] 성립됨을 인정하는 중관사가 중관자속파의 정의가 된다.

  [2] 분류. 경부행經部行중관자속파와 유가행瑜伽行중관자속파 둘로 확실히 구분된다.

 

(1) 경부행중관자속파의 이론체계

 

  첫째 ‘경부행經部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근식根識의 특정한 대상[소연연所緣緣]은 극미極微들이 집적된 외경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개념상[언어상] 경부經部의 주장과 일치하는 소연연을 주장하므로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 둘째 ‘유가행瑜伽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적호 논사가 『중관장엄론주中觀莊嚴論注』에서 “다른 것들을 생각할 때, 인因과 과果로 변하더라도, 오직 단지 식識 뿐, 스스로 성립되는 어떤 것도, 식識에 머무는 것이다.”며 “따라서 『대승밀엄경』과 『해심밀경』 등에 나오는 모든 것과 일치한다.”고 말한 것처럼, 개념상(언어상, 일반적 사실에서) 외경外境이 공空하다는 유식唯識의 방식과 일치되는 주장을 하므로 유가행중관자속파라고 한다. 그래서 쫑카빠는 『선설장론』에서 “그러므로 그러한 이론체계(견해)가 조금씩 있었지만 방대한 저서를 지어 개념상(일반적 사실에서) 외경外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리正理의 중관 교의敎義는 적호 논사가 그 전통을 열었다고 한 예셰데 논사의 주장이 맞다.”고 말했다. 

 

  이런 해석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유가행중관자속파에 대한 글자 의미 해석이 맞지 않다. 『똥툰첸모』에 ‘청변 논사와 지장 논사 둘은 언어의 안립(체계)에 있어 경부와 같지 않고, 자증自證을 개념(언어)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등 [경부와] 매우 일치하지 않는 몇 가지가 있기에, 일 부분이 같다고 [이론체계가] 일치한다고 하면 모든 것이 모든 것의 교의와 일치하는 잘못이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고 지적한다면, [이렇게 지적해도 위의 글자 의미 해석은] 잘못이 없다. [『똥툰첸모』에 있는 캐춥게렉뺄상의 이 지적은] 경부經部가 승의제에서 무엇을 주장해도 중관사[경부행자속파]가 이 주장들을 세속제로 주장하는 그런 방식으로 글자 의미를 해석하는 티베트 전대前代 학승들의 방법을 반박하는 설명 정도이지, 일반적으로 경부행중관파의 글자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 경부행중관파와 경부經部의 일부분이 일치하는 태도로 [글자 의미를] 설명해서는 안 됨을 예시하는 것은 아니다. 글자 의미 해석과 [그것의] 적용’jug pa에 모든 정의가 다 갖춰져야 할 필요는 없고, [또] 청변 논사가 경부와 일치하는 근(根, 인식기관)과 경(境, 인식대상)의 안립安立 방식을 실행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월칭 논사가 『사백론주四百論注』에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변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치를 『중관심론주中觀心論注』에서 분명하게 설명했고, 『람림첸모』와 『똥툰첸모』 역시 청변의 주장을 설명할 경우 바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3] 주장. 두 가지가 있다. 1)경부행중관자속파의 주장과 2)유가행중관자속파의 주장이이다. 

  1) (1)실재론자의 이론(타종他宗)을 비판하는 방식과 (2)자기의 이론체계(자종自宗)를 확립하는 두 가지가 있다. (1)에 역시 둘이 있다. ①실재론자의 삼성三性의 원리가 불합리하다고 말하는 것 ②외경外境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 불합리함을 보이는 것 등이다.

 

  ① 첫째. 실재론자의 삼성三性의 원리가 불합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중관심론』에 “여기서 해설하는 붓다의 모든 말, 우리들 바른 지각의 표준이다. 표준이자 성교聖敎이므로, 현자賢者들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의심스런 다른 경전들, 그릇된 지혜를 가진 타인은 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이 증명되게끔 하기 위해서는, 정리正理를 갖춘 방식으로 탐구하도록 하라.”고 나온다. 

 

  이 게송은 ‘중관파의 실수는 바른 지각[인명]이 없는 것’이라며 중관파를 비판하는 유식파에 대해 ‘우리들(중관파)은 바른 지각을 구비하고 있으므로 유식파가 제기하는 모든 문제를 논박論駁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유식파를] 비판하는 방식에 대해 『중관심론』은 “무이無二의 사물은”이라고 하는 등으로 이공二空(주관과 객관이 공하다는 것)의 식識이 실재한다는 것을 비판하고, “외경外境을 부정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변계소집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등으로 삼성三性의 원리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유식파인 당신들이 “‘변계소집성의 자성’이라고 하는 유법有法(제기된 명제의 주어를 가리킨다), 이것의 특성은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므로, 모든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본] 증익增益된 자성이기 때문에. 예를 들면 끈[繩索]을 뱀으로 잘못 아는[가립假立하는] 것처럼”이라고 말하는 것은 [청변 논사가 보기엔] 불합리하다.

 

  “모든 것은 증익된 자성이기 때문에”라는 이유(인因)로, 끈에 가립假立된 뱀처럼, 변계소집성의 자성은 정말 없는 것인가? 그러나 소리[術語]와 분별이 설명하기 때문에, 끈의 자성처럼 변계소집성의 자성의 특성[자상自相]이 있는 것으로 반드시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끈에 대해 또한 [끈의] 자상自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자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것은 세간世間의 누구나 [끈이 자상으로 존재한다고] 인정하므로 [세간의 상식에] 해害를 끼치게[어긋나게] 된다. 세간의 물[水]과 끈[繩索] 그리고 사람의 손이 움직여 꼬는 끈의 자성自性은 있다고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유식파가] 설명하는 것에 대해 『중관심론』에서 [청변 논사는] “변계소집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가립假立됐으므로 뱀과 같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끈이 반드시 실물實物은 아니므로, 혹은 널리 알려졌기에 해를 끼치게 된다.”고 말했다.

 

  한편 비유比喩를 할 경우 잘못 가립된 부분인 ‘뱀[蛇]’과 [뱀으로 잘못 알게 한 근거인] 시설처施設處, 즉 자상自相으로 존재하는 ‘끈’ 등 둘이 있는 것처럼, 의미의 경우에도 가립시키는(능립能立) ‘미혹의 부분’과 시설처, 즉 변계소집성의 ‘미혹되지 않은 자성 부분’ 등 두 부분이 있어야 된다. “그대가 끈을 뱀으로 가립시키 듯이”라고 안립하는 사례事例의 ‘시설처(근거)’와 ‘가립시키는 것’에 대해 미혹과 미혹되지 않은 부분 둘이 있기에 사례와 의미(함의含意)가 반드시 같을 필요가 있다. 이것을 그대는 동의할 수 없는데, 그대가 변계소집성의 자성自性은 자상自相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며, 변계소집성의 자성이 자상으로 성립되지 않으면 변계소집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류誤謬를 생기게끔 하는 자성自性과 특별히 가립된 외경外境 그것의 특성도 무자성無自性이므로 불합리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중관심론』은 “가립된 자성은 미혹된 것이 아니며, 미혹된 부분과 미혹되지 않은 부분 등 여러 부분을 보았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한편, [유식파인] 그대가 변계소집성의 모든 자성(본성)이 미혹됐다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렇다면 세속제의 법chos[法, 존재나 관념]을 말살抹殺하는 것이 되고, 세속제가 없으면 각각 스스로 증득하는 승의제의 자성(본성) 역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관심론』은 “그대는 사물을 말살시켰다, 항상 경境을 부정하기 때문에”라고 [게송에서] 읊었고, 『사택염思擇焰』은 “만약 문자와 의미가 일치하지 않는 자성自性의 사물을 각각 스스로 증득하는 그런 어떤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세속제의 모습을 안립安立하는 것과 모순된다. 경전에서 세속제의 존재[法]가 없다면 승의제를 깨달을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유식파인 그대가 [이렇게] “외경外境이 없어도 이름과 부호符號에 의지해 의미의 기표記標(부호)가 나타나게 된다. 그로부터 항상 모든 분별이 생기므로 변계소집성은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으로 말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한다면, [청변 논사는 말하기를] 이 역시 불합리하다. “이름과 문자, 의미를 품은 구절, 부호符號 등을 모르는 짐승인 새와 야수野獸 들에게도 크나큰 번뇌가 생기는 것을 보게 되기에, 그 번뇌들을 생기게 하는 대상·형상形象 등의 외경은 존재할 따름이다.”고 말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중관심론』은 “이름이 없어도 번뇌가 있고, [외경外境은] 이름에 의미가 생기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소리를 모르는 짐승들도 번뇌가 생기는 것을 보기 때문에”라고 했고, [이어지는] 뒷면의 주석에서 “무엇에라도 의지해 번뇌가 생기게 되므로 형상 등의 외경外境들이 있을 따름임을 알아라!”고 설명했다. 

 

  한편, 유식파 당신들이 의타기성은 자상自相이 있다고 우리들(중관자속파)에게 증명해도 의미가 없다. 세속에서 성립되면 이미 증명된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고, 우리들 또한 의타기성은 세속제에서 자상으로 성립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승의제에서 자상이 있다고 증명하는 것은 더욱 불합리하다. 의타기성이 승의제에서 존재한다고 증명하는 인因과 법法 둘을 가진 사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식파] 당신들이 ‘모든 사물은 자성이 없다, 자성自性이 공空하다고 명백하게 말했기 때문에’라고 말할 때 제시한 이유理由는 ‘서로 어긋나는 잘못 자체’로 변한다. 인因이라고 명백하게 말한 ‘자성이 공하다’는 [문장의 주어인] 유법有法의 사물은 승의제에서 존재가 소멸消滅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중관심론』은 “의타기성이 존재함을 이미 말했고, 세속에서 [성립된다고] 이미 증명된 것을 증명하네. 만약 승의제에서 보기[例]도 없고, 이유는 모순되는 것으로 변했다.”고 말했고, 이어지는 주석에서도 분명하게 설명했다. 글자가 많아질 것 같아 [여기서] 인용하지 않는다. 

 

  또한, [유식파] 당신들이 주관과 객관이 공空한 진실성인 원성실성이 승의제에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원성실의 진실성[원성실성]이 승의제에서 존재한다면, 승의제에서 존재하므로 증익변增益邊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승의제에 존재하지 않는 진실성이 승의제에서 존재한다면 감손변減損邊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성실성이 승의제에서 성립된다면 여소유성如所有性을 보는 지혜가 대상을 가지게 되므로 오류이며, 동시에 정등각이 아니게 되는 오류로 변한다고 말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중관심론』은 “유有와 무無의 실유성實有性, 그 자성이 승의성勝義性이면, 증익변과 감손변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대에게 어떻게 있겠는가! 붓다는 무연無緣[무소득無所得, 공성空性]으로 변하지 못하고, 진여성에 반연攀緣되므로. 정등각도 되지 않는데, 서로 다른 진여가 나타나므로.”라고 했고, 뒤이은 주석에서도 “원성실성의 진여라고 하는 것에 대해 대상을 보는 것이 있다면 도사導師인 세존은 소연所緣이 없는 것으로 변하지 못한다. 진여성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따라서 경전에 나오는 ‘붓다는 하늘의 허공 같은 모습, 허공은 모습이 없고, 허공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사례事例로 들 모습도 확실히 없다. 무소연無所緣인 당신께 예경한다’고 말한 것 등과 모순된다. 붓다의 깨달음은 정등각正等覺이 되지 못한다. 왜 그러냐 하면, 원성실성이라는 진여성과 스스로 나타나는 지혜 등 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이 있다면 두 진여성眞如性을 현증現證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떻게 평등성平等性으로 변하겠는가!”라고 했다.      

  깨달음이 평등성[공성空性]으로 변하지 않는 오류를 촉발시키는 이론체계lugs는 원성실성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진여성眞如性에 외경과 내심이 각자 따로 존재하는 것이 함몰되는[사라지는] 방식으로 근본정根本定 단계에서 근본지根本智 자체를 직접 깨닫는 자증분현식自證分現識이 나타난다는 유식파의 주장에 대해서도 해害를 가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한편 유식파 당신들이 각종 경境·근根·식識에 현현顯現하는 것들은 무시이래로 아뢰야식에 안치安置된 각자의 능력 때문에 이뤄진다고 주장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진여를 대상으로 하는 지혜가 범부의 마음에 생기게 된다는 것은 매우 모순된다. 범부들의 마음에는 이전에 진여를 대상으로 한 지혜를 생기게 하는 능력이 아뢰야식에 영원히 저장·안치安置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능력이 없는데 [지혜가] 생긴다면 그대들의 이론체계에는 진여를 대상으로 한 지혜가 원인[因]이 없는 것이 되고, 허공의 꽃을 인식하는 지혜와 같게 된다.  

 

  이에 대해 『중관심론』은 “진여를 대상으로 하는 지혜, 능력은 안치되지 않았는데 어디서 나타나나? 허공의 꽃을 인식하는 지혜,  안치되지 않은 능력에서 나타나는 것은 불합리한 것처럼”라고 했고, 뒤 이은 주석에서도 “이전에 영원히 아뢰야식에 안치되지 않은 능력이 뒤에 놓인다는 것은 불합리한데, 허공의 꽃을 인식하는 지혜가 생긴다는 것이 불합리한 것처럼”이라고 설명했다. [유식파의] 이 이론체계는 외경外境은 존재하지 않고, 내부의 아뢰야식의 능력에 의해서만 경境이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아뢰야식의 능력 역시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기에 개념에서는[관습상·세속에서는] 오류가 없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능력이 [이전에] 한 번도 안립安立되지 않았고 후에도 안치安置된 적이 없으므로, 이치상 [능력을 아뢰야식에게] 드리는[봉헌하는] 것인가?[라고 (장꺄가 보기에) 청변은 생각한다] 『사택염』에서 “[중관심론] 본문의 이 단락 앞에서, 항상 말한 적이 없었다.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그 같은 자성은 승의제에 연결된다.”라고 했고, 『중관심론』 역시 “자성이 승의제이다”라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유식파의 삼성三性의 원리를 비판하는 방식·방법을 『중관심론』 본송本頌과 주석서에서 상세하게 설명했는데, 이런 것들을 이전의 그 누구도 분명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이는 중관자속파를] 개창한 논사의 이로理路rig pa가 담긴 매우 세밀한 요점이므로 지혜를 갖춘 사람들이 그 전적典籍을 보는 인연(조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장꺄]는 지혜가 적은 사람이라 단지 추리에 의해 쓰므로 상세한 내용은 그 전적들 자체를 보도록 하라. 청변 논사는 자신이 쓴 『중론』 주석서인 『반야등론般若燈論』에서도 유식파의 삼성의 원리를 비판하는 방식을 개략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쫑카빠가 『선설장론』에서 감사하게도 [청변이 비판하는 방식을] 설명해놓았는데, 다른 곳에서 [쫑카빠의 설명을] 해석할 생각이다.

 

  ② 둘째. 외경外境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 불합리함을 보이는 것이다. 『중관심론』에 “만약 외경外境을 분명하게 본 것을 인정하기에, 색色을 본 인식이 정확하지 않으면, 이유·원인이 잘못되어 버리고, [제기한] 명제도 어긋나 버린다.”고 했고, [이 게송] 바로 앞의 주석에서 “외경과 의식(심식)의 분별에서 벗어난 어떤 지혜도 진실하다면, 외경은 있는 그대로 진실하다. 색 등에 대한 인식은 무분별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외경을 알아차리기[感覺] 때문에. ‘두 개로 나타난 달을 보는 지혜처럼’이라고 한다면”이라고 말했다. 이 의미는 유식파가 수립한 이유[因]는 ‘청남색靑藍色에서 다른 본질本質bdag nyid을 분명하게 직접 본 안식靑藍眼識[유법有法], 어떻게 보아도 착오錯誤 아님이 아니다. 다른 경境에서 본 지각知覺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 개의 달을 본 근식根識처럼.’[과 같다는 것이다.] ‘비록 무분별無分別에 포함되지만’이라고 해서 ‘직접 지각한 유법有法임’이 성립되지만, ‘진실이 아니다’고 했기에 분명하게 본 것에 대해 착오라는 ‘소립所立’과 ‘경境에서 본 지각이기 때문’이므로 라고 해 이유를 표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청변이 지적한] 오류는 그것은 올바른 이유[因]가 아니며, 유법有法인 ‘색을 지각한 인식’과 이유理由인 ‘외경外境을 분명하게 보았다’는 둘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유의 의미意味가 성립한다면 유법의 본질(자성)이 거꾸로 성립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뒤이은 주석注釋에서 “이처럼 색을 분명하게 본 인식은 외경을 본 것 이외 별도로 자성이 없기에, 외경을 본 그 자체에서 정확한 추리[比量]로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유법有法의 자성[본질]이 거꾸로 성립되므로 모순이다.”고 해석했다.

 

  한편, 외경外境이 없고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유식파가 이미 인정한 것과 모순되고, 세간에 널리 알려져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과도 어긋나 [주장에] 손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청변은] 『중관심론』에서 “오직 식만이 대상이고, 색 등을 인식하지 않으면, 이미 승인한 이치와 세간에 널리 알려져 누구나 인정하는 명제에 대해 해를 끼치게 된다.”고 설명했다. “승인한 것과 모순된다.”는 것은 “눈과 색色에 의지해 안식에 나타난다.”는 경전이 승인하는 사실과 어긋나게 된다는 것이다. “세간에 널리 알려져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에 해를 끼친다.”는 것은 세간에서 색 등의 외경이 없으면 그것을 인식하는 안식 등의 식이 생겨나지 않기에, 알려진 것에 해를 끼친다[는 의미다].

 

  또 유식파가 “외경外境이 없어도 식識은 생겨난다. 예를 들면 꿈을 인식하는 식처럼”이라고 말해도 역시 불합리하다[맞지 않다]. 꿈에서도 역시 무시이래로 외경과 인식의 습기에 익숙한 식識을 가진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라면, 꿈의 식識 그것 역시 대상이 있는 것이다. 이전에 본 푸른색을 다시 기억하는 식識 같은 것이다. 따라서 사례事例도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 뿐 아니라 색 등 외경의 사물을 없애기에 대상을 말살하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중관심론』은 “그렇게 보는 것이 생기므로, 꿈에서 색色 등을 인식하는 마음처럼, 색 등의 외경에 없다면, 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무엇 이든 꿈 등의 식은 법法을 대상으로 하기에, 그래서 보기도 없고, 대상을 말살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꿈의 식은 안식眼識이라고 말하지 않고, 주석注釋에서 ‘식識을 가진 눈’이라고 말했기에, 꿈에서 근식根識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꿈속의 색色을 본 식識에 대해 대상[所緣]이 있다고 말했다. 

 

  유식파가 또 말한다: 외경이 있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극미진極微塵 하나가 대상[境]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불합리하고, 극미진 여러 개가 모여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성립된다. 극미진 하나가 근식의 대상은 아니고, 근식의 대상이 되는 사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미묘유색근微妙有色根’처럼. 두 번째는 성립된다. 극미진 여러 개가 모여도 근식의 대상이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달이 두 개로 나타나는 것처럼 이라고 [유식파는] 말했다. 이에 대해 청변은 『중관심론』에서 “하나의 극미진으로 이뤄진 색은, 색을 인식하는 식識의 행동 대상이 아니다. 현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根은 색色의 행동 대상이 아닌 것처럼. 극미진이 여러 개인 색은, 마음의 행동 대상이라고 하지 못한다.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달이 두 개 뜨는 것처럼.”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청변은] 그대들이 극미진極微塵 만으로, 같은 종류의 것들을 모은 것이 아닌 다른 극미진으로 근식의 대상이 아님이 증명한다면 이미 성립된 것을 증명한 것이다. 우리들 [중관파] 역시 그것은 근식의 대상이라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중관심론』은 “여기서 만약 상대방이, 집적하지 않은 색色과 심心의 작용 대상이 아니라고 증명한다면, 그것은 이미 증명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만약 같은 종류의 극미진을 집적한 색은 근식의 작용 대상이 아님을 증명한다면, 실제적으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이유는 우리들에게 성립되지 않는데, 같은 종류의 다른 극미진과 다른 극미진이 서로 결합해 집적되는 것을 우리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적된 대상[境]은 근식의 대상[所緣]이라고 주장하므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인식은 자기의 형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중관심론』은 “다른 색色들을 집적한 것은, 그것에서 보고 깨달은 지혜[覺慧]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연경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이 각혜覺慧의 인因이 되기 때문이다. 탐욕처럼 그것을 위해, 그대의 명제는 비량比量에 의해 해를 입는다.”고 말했다. 그 이유理由에 대해 주석注釋[사택염]에서 “같은 종류의 극미진이 집적된 색이 소연경所緣境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처럼 극미진이 집적된 그것은 집적된 색色 그것을 분명하게 보고 생기는 지혜의 원인原因인 사물로 변하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 각혜覺慧의 인因으로 변한 그것은 집적된 것에 대해 집중한다[소연所緣으로 한다], 예를 들면 탐욕의 대상에 대한 집착의 특징은 여인의 몸 등이 모인 그 자체를 대상으로 애착하는 것처럼. 따라서 [유식파] 그대들이 집적된 색은 대상이 아니라는 그 명제는 비량比量에 의해 해를 입는다.”고 설명했다. 

 

  경전과 모순된다는 것은 ‘오식五識이 머무는 곳과 소연경所緣境은 집적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경전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만약 유식파 당신들이 말한 대로 극미진極微塵이 모인 것이 근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성립한다면, 우리들[중관파]에게도 오류가 아니다. 우리들 [중관파] 역시 극미진이 모인 것이 근식의 대상이라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의 말들에 대해 『중관심론』은 “모인 것은 소립所立이 아니고, 그것을 비판한 것은 손해損害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 ‘집적集積된 것’과 ‘모인 것’ 둘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같은 종류의 극미진이 ‘하나의 기초’에 의지해 모인 것을 집적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병甁처럼 자신의 구성인소로 변한 같은 종류의 극미진 여러 개가 날개가 화합하는 방식으로 모인 것이 ‘집적’이다. 군대나 삼림森林 혹은 염주처럼 실제로 다른 종류의 극미진이 ‘여러 이질적인 기초’에 의지해 한 곳에 집합한 것을 ‘모인 것’이라고 한다. 한편 진나 논사가 지은 『관소연연론觀所緣緣論』에서 말하는 소연연所緣緣 비판批判, 심心과 심소心所가 실질적으로 같은지 다른지를 관찰하는 방식 등 [집적과 모인 것을 구분하는 방식은] 많지만 여기서는 기술하지 않겠다.  

 

  청변 논사가 자증분을 비판하는 이로理路(사유 방식)는 [다음과 같다]. 유식파가 말한다: 식識이 소연所緣[대상]과 만나면 두 부분의 자성[본질]이 생긴다. 소취경所取境의 형상과 능취유경의 형상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청변은] ‘그것은 불합리하다. 경境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에서 그것과 다른 유경有境의 자신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중관심론』에서 “경境으로 나타나는 것 이외, 마음의 다른 본성은 무엇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이 게송에 대해] 유식파는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식識 자신이 자신의 본체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다른 경境의 모습으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유리의 보석처럼.”이라고 답변했다. [유식파의] 이 의미는 유리 덩어리가 푸른색 등과 같이 놓이면 유리의 본성은 분명해지고, 경境과 가까운 까닭에 푸른 색 등의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예처럼 식識에 경境이 나타날 때 소취所取[외경外境]의 모습과 스스로에 나타나는 능취[의식意識]의 모습 두 가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청변은] “그것은 불합리하다, [유리의] 예와 명제(증명해야 될 대상)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유리 덩어리가 푸른색 등의 경境과 같이 놓이면 경 때문에 유리 자신의 본질이 감추어지지 않기에 완전한 밝음을 드러내어 푸른색 등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지, 밝음을 갖기 바로 직전 유리의 어떤 본성도 푸른색 등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미 [밝음이] 막혔거나 멈췄기 때문이다. 따라서 [밝기] 직전의 유리의 밝음이 경境과 가까이 놓이는 것이 막혔거나 멈췄기에, [밝은] 직후의 유리의 밝음이 푸른색의 모습을 띠는 것이 직전의 유리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중관심론』은 “다른 것처럼 태어나기에 둘로 나타나지만, [그것을] 유리와 같은 것은 아니다. 같이 놓이는 것에서 태어나는, 유리의 [직전의] 찰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직전의 유리] 그것은 막혔고, 다른 것이 나타난 것인데, 그것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마음의 착각이다.”고 설명했다.

 

  한편, 외경外境과 의식意識의 두 가지 형상形相(모습)은 없다. 푸른색 등의 경境을 가까이 하지 않은 때의 유리와 같은 식識 자신이 스스로 드러낸 본질(본성)을 구비한 밝음 이외, 다른 밝음은 영원히 외경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유리 덩어리 가 푸른색 등의 색과 가까이 놓이면 푸른색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가능하지만, 유리 자체가 푸른색 등의 색깔과 같은 본성으로 변하거나, 색깔 자체가 유리의 본성으로 변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유리 덩어리가 색깔이거나 색깔이 유리 덩어리가 되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식識 역시 땅[土] 등의 색色(형체)과 가까워지면 식이 색의 모습으로 태어나는(변하는) 것이지, 식識 자체가 색色의 본성으로 변하거나 색色 자체가 식의 본성으로 변하는 두 가지는 절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땅[土] 등이 마음을 가진 것으로 변하거나 마음이 땅 등처럼 마음이 없어지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들은 [『중관심론』의 주석서인] 『사택염』에 설명되어 있다. [찾아서 고려해야 될] 근거가 많은 것 같아 쓰지는 않는다. 이 구절에 이어 [청변 논사는] ‘구소연俱所緣 결정決定의 특징[기호]’을 비판하는 방식과 ‘유식파의 바른 지각과 과보의 원리’를 비판하는 방식 등을 설명하는데, 상세한 것은 그 책을 보도록 하라.   

    

   유식파는 또 말한다: “[중관파] 그대들이 유식파의 이취理趣를 비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붓다의 말씀이 담긴 경전에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대답한다] “틀리지 않다. [그런데] 그 경전의 의미는 다른 외도外道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들이 가유假有의 온魂 이외 작자作者와 식자食者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붓다가] 그처럼 말씀하신 것이지, 외경外境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그같이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또한 『십지경十地經』에 ‘보살이 제6지에서 연기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을 철저하게 관찰하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무명無明 등 12지 가운데 고온苦蘊만 있고, 작자作者와 수자受者는 나타나지 않는다. 고뇌의 나무는 명백하게 이뤄져 있다고 확신하고 말했다. “불자들이여! 이와 같다.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며, 명백하게 마음으로 이뤄져 있으며, 마음으로 쓰는 것이다. 마음 이외 다른 작자作者와 식자食者는 조금도 없다.”’라고 나온다. 따라서 그 경전의 의미는 외경外境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유식파가 다시 말했다: “외경外境이 공空함은 경전의 밀의密意이다. 『(이만오천송)반야경』 「미륵청문품」에 ‘여기서 법성法性의 색色(형체)은 어떤 것인가? 주관적으로 구상한 색色과 가유假有의 색色 거기에 상무자성성常無自性性[원성실성], 법무아성法無我性, 진실제眞實際[空性] 등 어디 것도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없는 것도 아니다. 가유假有의 외경外境이 공성空性과 식識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이 경전의 말씀의 의미는 증익增益된 외경이 공空으로 나타나는 식識이 성립된다는 것이지 외경이 없는 식이 성립된다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여래가 알 수 있는 법성法性의 색色의 외경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증익된 것이 아닌 외경을 비판한 것이 아니고, 일체의 식 자체 이외 다른 실체實體의 외경은 공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청변 논사는] 『중관심론』에서 “만약 가유假有의 외경이 공이므로 식識이 성립된다면(외경은 없고 식識만 있다는 것이 성립된다면), 가유假有가 아닌 외경은 존재하므로, 경境이 없는 것으로는 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장꺄가 보기에] 따라서 그 의미는 바로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각자 스스로 파악한 법성法性의 색色의 외경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증익되지 않은 사물의 외경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명하는 것은 『중관심론』의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청변 논사가 외경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외경에 ‘실제로 존재한다’[實有]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택염』에서 “법성法性의 색色의 외경外境이 존재하기 때문에”라고 한 것 역시 식識 이외 다른 실체적實體的인 외경이 존재한다는 것이 성립되기 때문이지, 법성法性의 외경이 성립한다든가, 실체적인 외경이 진실임을 주장하는 그 어느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택염』에서 “문자와 의미가 일치하는 자성이 아닌 사물은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존재하기에”라고 말한 것 역시 증익된 자성自性이 공空한 외경이 존재한다는 것이지, 유식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희론戱論을 떠난 사물에 대해 [자성自性을] 파악하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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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활
성철사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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