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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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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7 년 2 월 [통권 제46호]  /     /  작성일20-07-27 11:06  /   조회7,35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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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종립특별선원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을 찾았다. 봉암사 결사 70주년을 맞아 그 의의에 관해 들으러 가던 길이었다. 전설적인 선지식 임제의현 선사가 던진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의미도 물었다. ‘어디서든 주인 된 자세로 살면 어디든 진리의 경지’라는데 과연 그게 가능하겠는가. 아무리 봐도 만만한 곳이 없고 어디를 가도 을(乙)의 처지인데. 당신은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사랑하는 게 수처작주”라고 했다. 나의 몸뚱이나 느낌이나 생각 또는 신분 말고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바로. 

 


문경 봉암사 대적광전

 

나는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절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소리를 오랫동안 음미했다 :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나다. 내게로 다가오는 모든 것이 나다. 나와 인연 맺은 모든 것이 나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이 나다. 그리하여 그들과의 원만한 관계가 결국은 나를 먹여 살린다. 나만 돋우려니까 밟히고 나만 밝히니까 어두워진다. 원수를 구워삶을 줄 알아야 내게도 숨통이 트이는 법이다. 어쨌든 죽음이듯, 개똥도 약에 쓰듯, 수용하고 이용하자.

 

제75칙 서암의 항상한 이치(瑞巖常理, 서암상리)

 

서암사언(瑞巖師彦)이 암두전활(巖頭全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근본답게 항상(恒常)한 이치입니까?”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근본답게 항상한 이치를 보지 못했느냐?”

이해하지 못한 서암이 생각에 잠겼다. 암두가 말했다.

“긍정하면 근진(根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부정하면 생사를 면치 못할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들으면 으레 우리는 진리를 ‘떠올린다’ 고귀하고 신성한 어떤 것을 궁구하면서 성상(聖像)이나 고론(高論)에 대입한다. 그러나 도(道)라는 생각이 도는 아니다. ‘도가 있다’라고 긍정한다면 ‘도가 있다’는 생각에 얽매인 것이다. 근진(根塵)이란 6근이란 감각기관과 6진이란 감각대상의 총합이다. 사람은 자기가 본 만큼만 안다. 안다고 믿고 안다고 떠든다. 

 

그렇다고 도가 없다고 부정해버리면 인간의 저속화를 야기한다. 모두가 개처럼 벌면서 헐떡이는 세상은 아무리 빌딩숲이 드높고 첨단기술이 날뛴다손, 개판이고 야만이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리라”는 선언은 그나마 이승을 인간의 세상으로 버티게 하는 힘이다. 차라리 안다고 믿는 자들의 오만이, 아예 모르기로 한 자들의 방탕보다는 낫다. 최소한 범죄율은 떨어질 것이다. 

 

여하튼 도가 ‘있다’고 하면 망상이고 도가 ‘없다’고 하면 악행인 이 상황을 어찌할 것인가. 어쩌긴. 누가 몇 모금 퍼마셨다고 오줌 좀 눴다고 어떻게 될 강물이던가. 정 아쉽다면, 생각을 멈추면 되고, 군말 없이 죽어주면 되지.

 

제76칙 수산의 세 구절(首山三句, 수산삼구)

 

수산(首山)이 대중에게 일렀다.

“제1구에서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될 만하고 제2구에서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될 만하다. 제3구에서 깨달으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기 어렵다.”

어떤 승려가 물었다.

“화상께서는 몇 번째 구절에서 깨달으셨습니까?”

수산이 대답했다.

“달이 저물면서 삼경(三更)의 저잣거리를 가로질러 지났느니라.”

 

개인적으로 메이저리그 마니아다. 수많은 규칙과 전술이 있으나 야구는 근본적으로 스트라이크와 볼 사이의 확률게임이다. 통계적으로 초구 스트라이크는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초구가 스트라이크면 평균 타율은 1할 가까이 떨어진다. 더구나 투 스트라이크 노 볼의 상황에선 제아무리 교타자라도 2할 이상을 치기가 버겁다. 

 

반면 투 볼 노 스트라이크나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등 타자 쪽으로 볼카운트가 몰리면 처지는 반대가 된다. 스트라이크를 반드시 넣어야 하는 투수는 웬만하면 변화구보다 컨트롤이 쉬운 직구를 던지게 마련이다. 동시에 타자는 그만큼 구질을 예상하고 때리기가 수월하다. 그래서 초구는 꼭 스트라이크를 넣으라는 게 투수 팀 코치진의 보편적인 주문이다. 

 

야구계의 수순을 선(禪)에 대입할 경우에도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타자 입장에선 초구에 승부를 보는 게 여러모로 깔끔하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그대로 흘려보낼 경우 일단 골치가 아프다. 투수가 다시 스트라이크를 던질까 유인구로 속일까 전전긍긍. 앞서 말한 대로 투 스트라이크면 벼랑에 몰린다. 그러니 번뇌에 허덕이고 싶지 않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트라이크일 가능성이 높은 초구에 자신감 있게 대응하는 게 낫다. 

 

그렇다고 기막히게 공이 잘 맞아도 탈이다. 오히려 타구가 너무 빨라서 주자가 있을 때엔 병살을 당하기 십상이다. 다만 우물쭈물거리다 삼진을 당할 바에야, 호쾌하게 휘두르는 방망이가 더욱 볼 만하다. 신중하게 처신한답시고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뿐. 실제로 초구 타율은 타자들의 평균 타율보다 높은 편이다. 물론 허망하게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타순은 돌아가고 경기는 내일도 열린다.

 

제77칙 앙산의 조금(仰山隨分, 앙산수분)

 

어떤 승려가 앙산에게 물었다.

“화상께서는 글자를 아십니까?”

“조금(隨分).”

승려가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며 물었다.

“이것은 무슨 글자입니까?”

앙산이 땅 위에 十(십)이라고 썼다. 승려가 이번엔 왼쪽으로 한바퀴 돌더니 똑같이 질문했다. 앙산은 ‘十’에 작대기를 그어 卍(만)을 만들었다.

승려가 원상을 그려 마치 아수라가 두 손으로 해를 가리는 시늉을 했다.

“이것은 무슨 글자입니까?”

앙산이 동그라미로 卍을 둘러쌌다. 승려가 다시 누지불(樓至佛)처럼 우는 시늉을 했다. 앙산이 일렀다.

“옳다, 옳다. 그대가 잘 간수해라.”

 

누지불은 천불도(千佛圖)에서 맨 마지막에 위치하는 부처님이다. 그는 자신의 못남에 매우 울었다고 전한다. “나는 왜 이토록 복이 얇아서 꼴찌의 차례를 만났을까?” 그러더니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단다. “내 앞의 999명 부처님의 모든 법을 받들어 장엄하리라.” 앞서간 자들은 떠나간 자들이다. 뒤처진 자는 살아남은 자다. 오직 살아서, 죽여도 살아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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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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