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일상에서 화두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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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16 년 4 월 [통권 제36호] / / 작성일20-08-10 12:22 / 조회7,147회 / 댓글0건본문
일상에서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가?
참선하는 사람도 반드시 일상생활을 합니다. 선원에서 안거 정진하는 스님들도 대중생활을 하고 재가자들도 선방이나 가정과 직장에서 일상생활에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이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일상생활 할 때 어떻게 마음을 쓰며, 어떻게 화두참구를 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지금도 중요하지만, 옛사람들도 고민이었던 모양입니다. 대혜 스님의 『서장』에 보면 주세영이라는 거사가 운암진정(1025~1102) 화상에게 이에 대하여 문답한 기록이 나옵니다.
“불법이 지극히 오묘하니, 일상에 어떻게 마음을 쓰며 어떻게 참구해야 합니까?”
“불법은 지극히 오묘하여 둘이 없다. 다만 오묘한 데에 이르지 않으면 서로 장단(長短)이 있겠지만, 진실로 오묘한 데에 이르면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스스로의 마음이 여실히 구경으로 본래부처이며, 여실이 자재하며, 여실히 안락하며, 여실히 해탈하며, 여실히 청정함을 알아서 일상에 오직 자기마음을 쓰며, 자기 마음의 변화를 잡아 쓸지언정 옳고 그름을 묻지 말라. 마음을 분별하여 생각하면 마땅히 옳지 않다.
마음이 분별하지 않으면 낱낱이 천진하며, 낱낱이 밝고 오묘하다. 낱낱이 연꽃에 물이 묻지 않는 것과 같아서 마음이 청정하여 시비를 초월한다. 자기 마음이 미혹한 까닭에 중생이 되고, 자기 마음을 깨달은 까닭에 부처가 되니, 중생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미혹과 깨달음 때문에 이것과 저것이 있다.”
참선인이 생활하는 마음은 항상 나-너, 옳고-그름이라는 분별을 떠나야 합니다. 분별하는 마음으로 양변에 집착하면 마음이 시끄럽고 복잡해져 화두 집중이 어렵습니다. 생계를 꾸려가는 재가자의 입장에서는 이해 득실을 따지고 치열히 경쟁해야 하는데 분별을 떠나라 하면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보면 불법은 세속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불법의 중도를 알면 나-너, 선-악, 시-비 분별에 집착을 떠난 정견으로 보면 항시 지혜가 나와서 남을 돕고 잘되게 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면 다 잘 풀리게 됩니다. 특히 자기 마음이 중도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스스로 당당하게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중도 정견을 가지면 자기가 본래 부처이고, 자기 마음이 본래 청정하며, 자기에게 본래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다 가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일상생활을 활기차게 실천해 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직장과 가정,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중도 정견이 선 사람도 가끔은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특히, 큰 경계를 만났을 때가 그렇습니다. 가령, 말도 안되는 황당한 일을 겪거나 절이나 스님, 또는 도반에게 크나큰 실망을 할 수도 있지요. 또 실직이나 좌천, 그리고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대체로 불법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조차 흔들리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이럴 때조차 그 상황을 분별의 양변을 떠나 정견으로 보아야 합니다. 대체로 이런 경우는 양변에서 자기가 옳다는 견해에 집착하니 더더욱 참지 못하고 분노가 끓어 오릅니다. 분별심이든 분노든 자기가 있다는 양변의 집착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의 분노가 정당하다 하더라도 불법은 옳은 것, 정법, 불법에 대한 집착도 삿된 견해라 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보면 “부처가 부처가 아니라 그 이름이 부처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이름이 중생이다” 하는 말을 계속 합니다. 분별망상이나 삿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처와 불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불법이라는 겁니다. 선문(禪門)에서는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을 씁니다. 참선하는 데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도 비우고, 조사를 만나거든 조사도 비워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철스님은 “옳아도 남에게 질 줄 아는 사람이 천하게 가장 용맹한 사람이다”는 말을 하셨어요. 다 같은 뜻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오직 불법을 믿고 자기 마음이 그대로 본래 부처고, 본래 청정하고, 본래 지혜와 자비를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탄탄할수록 헛된 분별망상과 집착에서 벗어나기가 쉽고 지혜로운 일상생황이 되면서 화두 공부도 빠르게 됩니다.
생력(省力)처가 득력(得力)처
참선 수행자의 가장 큰 고민이 화두 일념이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누차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두가 잘 안 되는 것은 중도 정견과 신심, 발심의 문제입니다. 화두 자체가 문제가 있거나 간화선 공부가 어렵거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길을 잘 모르고 여행을 가면 목적지까지 가기 어렵듯이 화두공부도 길을 모르고 가면 가기가 어렵지요. 그래서 화두 공부 길을 아는 정견을 갖춰야 합니다. 이 정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참선할 때, 잘 안 되더라도 지속적으로 노력해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공부 힘을 얻을 때가 있으니 바로 힘이 덜림을 아는 때가 공부 힘을 얻는 곳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대혜 스님은 『서장』에서 “생력처(省力處)가 득력처(得力處)”라 했습니다. 즉, 화두 참선을 규칙적으로 생활화해 나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화두가 또렷또렷해지면서도 힘이 가벼워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가 바로 생력처이고 이 자리가 바로 공부 힘을 얻는 득력처라는 것입니다.
가령, 참선할 때 무수한 번뇌망상이 생멸하는 가운데 그 번뇌가 실체가 없고 연기 현상이라 보면 다 허망할 뿐입니다. 이때 가벼운 마음으로 오롯이 화두를 챙겨 나가면 화두에 몰입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번뇌를 가벼이 보면 볼수록 화두 삼매를 체험하기가 쉽습니다. 화두에 물러서지 않고 밀고 나갈 때 어느 날 문득 공부 힘이 덜어지면서 화두가 성성하게 챙겨지게 되는데 바로 이 자리가 공부 힘을 얻는 곳이란 말입니다. 이 생력처가 득력처라는 말은 오직 체험이 되어야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애쓰고 애쓰는 가운데 그런 자리를 체험하게 되면 화두 공부힘이 붙게 된다는 것을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
우스갯소리를 하나 하자면, 인디언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지요.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랍니다. 이와 같이 화두 참선할 때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 단 5분이라도 참선을 포기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생활화하다보면 어느 날 문득 화두가 성성해지면서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고 물러서는 사람에게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익숙한 것을 설게, 설은 것은 익숙하게
초심자들이 참선할 때 익숙한 것은 분별망상입니다. 우리는 늘 망상으로 살아갑니다. 분별망상은 익숙하나 화두는 설지요. 그래서 화두 공부하는 사람은 익숙한 망상은 설게 하고 화두는 익숙하게 해야 합니다. 이 공부 방향은 알겠는데 실제 실천이 쉽지 않습니다. 중도 정견도 모르고 분별망상에 휩싸인 사람은 그 망상이 실체가 없는 착각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니까요. 그래서 망상에 갇혀 살아가면 자기 본성을 모르고 착각 속에 살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참선이 쉽게 성취되길 기약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도를 공부해서 정견을 세우고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은 믿고 우리 마음이 본래 청정하며 지혜와 자비가 항시 빛나고 있을 뿐 분별망상은 착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안목을 갖춘 사람은 지금까지 익숙했던 망상은 설게 하고 낯설던 화두는 익숙하게 만들기가 쉽습니다. 분별망상은 나를 괴롭게 하고 갈등하고 화나게 합니다.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나를 흔들어 놓으니까요. 그래서 항시 내가 본래 부처다. 나는 연기로 존재하니 무아, 공이라는 정견으로 분별망상을 일으키는 자기에 대한 집착을 부단히 비워가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이 바로 양변에 집착하는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래 갖춰진 무한한 지혜가 나오게 됩니다.
운개일출(雲開日出), 먹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옵니다. 이처럼 익숙했던 분별망상을 비우면 본래 갖춰진 청정한 지혜광명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오직 체험해봐야 압니다. 언어와 문자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경지이니 부지런히 정견을 세우고 화두 참선을 해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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