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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徹 스님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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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2013 년 10 월 [통권 제6호]  /     /  작성일20-08-12 12:22  /   조회6,27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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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중앙일보 문화부장) 

  

‘가야산 금빛 호랑이’ 성철(性徹) 선사 입적 5주기가 돌아온다.

선사는 지난 1993년 11월 4일 오전 7시 30분 해인총림 방장 열반당인 퇴설당에서 법랍 58세, 세수 82세에 걸친, 치열한 수행을 마쳤다. 초겨울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 해 법구가 안치된 퇴설당의 빈소는 간소했다. 기억컨대 시자승 두어 명, 국화 꽃바구니 둘, 벽에 걸린 낡은 장삼, 그리고 스님이 쓰던 몽당연필, 편지지, 주장자 하나가 그 방에 있는 전부였다. 그것들이 스님이 남긴 법어와 일화와 ‘전설’을 제외한 유품의 모두였다. 그것은 ‘위로는 불법을 닦고 아래로 중생과 한 몸이 된다(上求菩提下化衆生)’는 수행자 최고의 경지에서 가능한 무소유였다.

 

다비식은 화려했다. 가야산 한편을 메운 수만의 추모인파가 시립한 가운데 그의 몸은 18시간동안 밤을 새워 타 올라 재가 됐다. 제자스님들의 ‘부질없는’사리수습을 뒤로하고 그는 지수화풍(地水…火風)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성철 스님은 그의 ‘전설?’이 아닐 듯하다. 스님이 물리학에도 조예가 있다느니 하는 엉뚱한 과공(過恭)은 그 자체가 비례(非禮)였다. 큰스승이 궁핍한 시대에 그는 몇 안 되는 독보(獨步)였고, 불자이든 아니든 그를 떠나보내는 자리가 그토록 거창했던 이유도 정신적 지도자에 대한 시대적 갈망이었다. 그 궁핍의 상황이 여전한 지금 이제 우리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은 그의 엄혹한 실천적 삶의 방식이다.

 

그는 스스로의 말을 실천하기 위해 그 자신을 가장 가파른 수행공간에 가두고 평생을 일관했다. 앉아서 잠을 잤다는 장좌불와(長坐不臥) 8년도 그에겐 다만 한때의 바늘자리에 불과했다. 그는 치열했던 삶의 목표와 깨침의 포효, 그리고 어쩌면 회한에 찬 전(全) 수행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출가송, 오도송(悟道頌), 열반송을 통해 이렇게 표현했다.

 

출가, 오도, 열반송은 한 큰스님의 정신세계의 전모를 엿보게 하는 열쇠다.

스님은 24세 때 기혼의 굴레마저 벗어 던지고 출가하면서 “하늘에 가득한 큰 일도 붉은 화롯불에 한 점 눈송이로다/바다를 뒤덮는 큰 틀도 밝은 햇살 아래 한 방울 이슬이로다/누가 꿈속 같은 세상에 잠깐 나와 꿈만 꾸다 떠나 가랴/만고의 진리를 찾아 나홀로 걸어 가리라”고 했다.

 

‘하늘에 가득한 큰 일도 붉은 화롯불에 한 점 눈송이(彌天大業紅爐雪)’로 여기는 기개를 스님은 반세기가 넘는 수행 뒤 열반하면서 이렇게 바꿔 불렀다.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보다 높구나(彌天罪業過須彌).’ ‘미천 대업’이 ‘미천 죄업’이 된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선지식이 된 스님의 끝없는 자기질타와 구도정신의 이 역설이 바로 그의 가르침의 요체다.

29세 되던 해 스님은 또 대구 팔공산에서 한 소식 크게 듣고 확연대각한 오도송을 읊었다.

 

“황하의 물은 거슬러 흘러 곤륜산을 뒤덮었다/해와 달도 빛을 잃고 대지는 꺼져 내렸도다/문득 크게 한번 웃고 고개를 돌려 서니/푸른 산은 옛 그대로 흰 구름 가운데 치솟아 있네.”

 

우주적 혼란 앞에서도 한번 웃고 ‘진리와 해탈의 그곳’청산을 의연히 바라보는(靑山依舊白雲中) 호랑이의 포효였다. 이제 번뇌도 망상도 분별심도 다 사라지고 평상심만이 내 마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열반의 자리에서 “평생에 걸쳐 남녀의 무리를 속였으니/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보다 높구나/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도 한이 만 갈래나 되네/(그러나) 한덩이 붉은 해는 푸른 산에 걸려 있다”라고 했다.

 

이 ‘한 덩이 붉은 해는 푸른 산에 걸려 있다(一輪吐紅掛碧山)’에서 ‘벽산’이 바로 오도송에 나오는 ‘청산’이다.

스님은 ‘나는 지은 죄를 안고 무간지옥에 떨어져 가지만(사실 그는 지옥을 제도하러 갔다) 내가 바라본 푸른 산은 언제나 그대로 거기 있으니 너희들은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또 다른 역설의 큰 가르침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깨침마저 없던 것으로 돌려 버리는 거대한 깨침에 걸맞게 성철 선사는 스스로 호를 퇴옹(退翁)이라 짓고 이를 즐겼다 한다. ‘뒤로 물러나는 늙은이’라는 이 호에 대해 그는 ‘세상 사람들이 앞뒤도 모르면서 앞으로만 가거든. 그러니 내가 물러서야지’라고 설명했다.

‘실로 높아지려면 내려서라’는 하심(下心)이었다. 엄혹한 수행과 하심의 조화, 이것이 오늘날 성철 선사가 우리에게 주는 화두다.

 

-<중앙일보> 1998년 10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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