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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거사선]
유리병 속에서 벗어난 대자유인, 육긍대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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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  2014 년 3 월 [통권 제11호]  /     /  작성일20-08-26 09:51  /   조회7,41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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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는 육긍(陸亘: 764~834) 대부의 간단한 전기와 더불어, 대부와 남전(南泉: 749~835) 선사가 문답으로 남긴 유명한 화두인 ‘유리병 속의 거위(陸亘甁鵝)’ 화두에 대해 참구해보았다. 육긍 대부는 이 문답을 통해 유리병이란 에고(ego, 我相)를 부수고 허공을 자유롭게 비상하는 ‘거위 아닌 거위’가 되는 기연을 얻었던 것이다. 남전 선사의 가르침을 통해 심계(心戒)를 받고 유발상좌(有髮上佐: 속가 제자)가 된 육긍 거사는 산사에 은둔하던 선사가 세상에서 법을 펼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며 백천만겁의 은혜를 갚는 불사를 행하게 된다.

 

남전 선사는 정원 11년(795), 지양(池陽) 남전산(南泉山)에 선원을 짓고 30여 년간 하산하지 않고 보임하며 ‘일(번뇌망상) 없는 한가한 도인(無事閑道人)’으로 지내다가, 태화 1년(827), 선주자사 시절의 육긍 거사가 제자의 예를 갖추고 세간에서 법을 설해줄 것을 간청하자, 비로소 하산하게 된다. 육긍 거사가 동분서주하며 스승을 보필한 결과, 몇 년 만에 선사의 문하에는 고관대작과 그 자식들이 수백 명에 이를 정도로 선법(禪法)이 크게 펼쳐지게 된다. 뒷날, 동문인 백장회해 선사의 제자인 황벽 선사가 정승 배휴의 후원아래 법을 크게 펼친 것처럼, 남전보원 선사 역시, 육긍 대부의 전폭적인 후원아래 크게 교화를 펼치고 『전등록』 등에 중요한 공안들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남전 선사와 육긍 대부가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공안인 ‘육긍천지동근(陸亘天地同根)’ 에 대해 참구해보자.

 

어느 날 육긍 거사가 남전 선사께 말했다.

“승조 법사가 ‘천지와 나는 한 뿌리, 만물과 나는 일체’(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라고 한 말은 알기 어렵지만 참으로 훌륭합니다.”

 

남전 선사가 뜰에 있는 한 그루의 꽃나무를 가리키며 “대부!” 하고 부른 뒤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꽃을 마치 꿈을 꾼 것과 같이 보고 있다.”

 

육긍 거사는 “천지와 나는 동근이요, 만물과 나는 일체”라고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대단한 듯이 말했지만, 아직 교학으로 이해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 그것을 철저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남전 선사는 눈앞에 있는 꽃을 가리키며 “대부!”라고 부르며, 천지와 뿌리가 같고 만물과 일체인 참나(我: 여기서는 大我이자 眞我를 가리킴)를 스스로 깨닫도록 부르고 있다. 분별을 부수는 방(棒)과 망상을 물리치는 할(喝)처럼, 갑자기 부르는 이름을 듣게 되면 순간적으로 온갖 분별망상이 사라지고 참마음(眞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육긍거사에게 꽃을 가리키며 천지동근을 깨닫게 하는 남전지화도

 

“세상 사람들이 이 꽃을 마치 꿈과 같이 보고 있다”는 말은 세인들을 빗대어 육긍 거사를 경책하는 말이다. ‘만물이 나와 일체임을 깨달았다면, 왜 이 꽃을 실상(實相)으로 보지 못하는가?’ 하는 가르침의 말씀이다. 일체의 모든 유위법은 꿈ㆍ환영ㆍ거품ㆍ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하지만 환상인 줄 깨달아서 상(相)을 취하지 않고 벗어나 여여부동할 수 있다(不取於相 如如不動)면, 있는 그대로가 실상이 된다. 즉, 영가현각 대사가 『증도가』에서 설한, “무명(無明)의 참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無明實性 卽佛性),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라(幻化空身 卽法身)”는 경지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육긍 거사처럼, 꿈속에서 꿈을 깨지 못할 때는 진정한 꽃을 볼 수가 없다. 미망에서 깨어나 환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꽃의 진면목(眞面目)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일체의 망상과 집착을 벗어던지고 무아ㆍ무심으로 천지만물을 관조할 때에만 사물의 진실상이 자연스레 드러나고 어느 순간, 자기와 천지만물이 일체ㆍ일여(一如)가 될 수 있다는 법문이다.

 

‘천지와 나는 한 뿌리, 만물과 나는 일체’

 

천지만물은 모두 천차만별로 대소장단ㆍ방원곡직(方圓曲直)ㆍ고저 등이 있어서 동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범부는 이 차별상에 집착하여 망상을 일으키고 온갖 시비분별을 일삼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무아ㆍ무심을 닦는 구도자가 이러한 차별적인 현상의 근원을 참구하면 만물이 모두 동일한 근원, 동일한 본체가 되어 여기서 ‘천지와 아(我)는 동근’이며 ‘만물과 아(我)는 일체’라는 자각이 일어난다. 이 객관적인 현상과 주관적인 자아가 일여ㆍ일체의 경지에 도달하면 차별적인 망념은 불식되고 진실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문답에 등장하는 승조(僧肇: 374~414) 법사는 후진(後晉)시대의 고승으로 구마라집(鳩摩羅什) 문하의 4대 철인(四哲)의 한 분이다. 어린 시절 『장자』와 『노자』를 탐독하고 그 뒤에 『유마경』을 사경하다 깨쳤다고 한다. 승조 법사는 『장자』의 대의는 ‘만물이란 본질적으로 똑같다(齊物)’는 것을 논했을 뿐이지만, 그가 주장한 불교의 대의는 “만물의 자성이란 모두 자기에게로 귀결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는 『조론(肇論)』의 ‘열반무명론’에서 “지인(至人)은 텅 비어 아무런 형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그가 만들지 않은 것이 없다. 만물을 모두 자기로 삼는 자가 어찌 성인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승조 법사의 『조론』은 삼론종과 천태종, 화엄종 등 교종에 큰 영향을 끼친 논서인데, 석두희천 선사는 이 책을 읽고 ‘만물을 모두 모아 자기로 삼는다’라는 말에 크게 깨닫고 『참동계(參同契)』라는 저술을 지었을 정도로 유명한 논이다.

 


일본 교토 남선사에 소장된 남전참묘도

 

그렇다면, 승조 법사의 ‘천지여아동근 만물여아일체(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에서 ‘아(我)’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앞에서 이 ‘아(我)’란, 범부의 아(我)가 아니라, 『대반열반경』에서 설한 대아(大我)이자 진아(眞我)임을 밝혔지만, 이 ‘아(我)’를 규명하는 것에 불법의 요체가 들어있기에 좀 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여기서의 ‘아(我)’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설하신 탄생게(誕生偈)인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아(我)’를 가리킨다. 『심등록(心燈錄)』에 따르면 이 ‘아(我)’는 나고 죽음이 없는 참마음 즉 상주진심(常住眞心)이며, 이른 바 팔만사천 다라니의 대총지(大總持)이자, 대불정(大佛頂)이며, 일체법이 나온 근원인 심왕(心王)이다. 무시이래로 이 참나가 천지와 만물을 낳고 부처와 중생을 낳았다는 것이다. 선가에서는 이를 자성(自性), 주인공, 본래면목이라 부르기도 했고, 임제 선사는 ‘설법하는 놈(說法底人)’ㆍ‘법을 듣는 놈(聽法底人)’ㆍ‘차별없는 참사람(無位眞人)’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투철하게 체득한 언행만이 천지를 뒤덮을 수 있어

 

‘천지동근(天地同根)’이란 말을 이론으로만 알았던 육긍 거사의 이 문답은 설봉의존 선사의 오도기연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앎이 투철해져서 마침내 온몸으로 체득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설봉 - 암두 사제의 선화(禪話)를 보면, 육긍 대부를 깨우치게 하려는 남전 선사의 노파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행각 중에 폭설로 발이 묶인 설봉 스님이 사형인 암두 스님에게 점검차 물었다.

“제가 덕산 스님에게 ‘종문(宗門)의 뜻을 저도 알 수 있습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덕산 스님이 몽둥이로 저를 한 번 내리치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물통 밑바닥이 빠진 것 같았습니다.”

 

암두 스님이 할(喝)을 하면서 말했다.

“문밖에서 들어온 것은 자기 집의 보배가 아니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는가? 이후 널리 불법을 펼치려고 하면 일체 언행을 자기 가슴속에서 흘러나오도록 하여 하늘과 땅을 뒤덮어야 하네.”

 

설봉은 이 말에 대오(大悟)하여 연이어 큰 소리로 외쳤다.

“사형! 저는 오늘에야 도를 얻었습니다.”

 

설봉 스님은 이전에는 형식에 매인 수행을 중시하여 밖으로만 구했기에 투철하게 깨닫지 못했다. 암두 스님의 말은 그 자신이 참다운 자기를 찾아야 하며, 완전히 마음을 위주로 삼아 밖에 있는 지식의 견해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을 선양하는 것은 모두 경전의 뜻을 근거로 설법을 하게 마련이지만, 암두 선사는 스스로 자기 주장을 하되 자기가 세상의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유아독존(唯我獨尊)이자, ‘나는 우주와 한 몸’(萬物與我一體)인 경지인 것이다.

 

도(道)는 본래부터 드러나 있는 ‘본래현성(本來現成)’이기에, 구하고 배우는 용심처(用心處)에 있지 않다. 마음을 쓰면 쓸수록 더울 멀어질 뿐이어서, 지금 당장 한 생각을 쉬는 것이 옳다. 지금 한 생각이 쉴 때, 모든 생각이 공(空)하게 된다. 이렇게 모든 생각이 공할 때, 밝고 밝아 공하지 않으면서 모든 생각의 공함을 아는 놈이 있으니, 이것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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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金聖祐

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 경북 안동 생(生).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한 뒤 현대불교신문사에서 취재부 기자 및 차장, 취재부장을 역임. 현재 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와 넷선방 구도역정(http://cafe.daum.net/ kudoyukjung) 운영자로 활동하며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를 통해 법음을 전하고 있다. 저서에『문없는 문, 빗장을 열다』,『선(禪)』,『선답(禪答)』등이 있다. 아호는 창해(蒼海ㆍ푸른바다), 본명은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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