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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선문정로 ] 견성이 바로 성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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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  /  2020 년 8 월 [통권 제88호]  /     /  작성일20-08-28 14:01  /   조회16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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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선문정로』 2 | 제1장 견성즉불見性卽佛

                                                                      [원문] 성철 스님

                                                                      [옮김] 활  인 검

 

 

  편집자 | 【번호】·【평석】·【강설】은 성철 스님이 직접 쓰신 것이다. 【1-1】은 제1장 제1절이라는 의미다. * 표시가 붙은 것은 보다 쉽게 풀이한 것이다.

 

 

【1-1】  ①견성을 하면 즉시에 구경무심경究竟無心境이 현전現前하여 약과 병이 전부 소멸되고 교敎와 관觀을 다 휴식하느니라. ①纔得見性하면 當下에 無心하야 乃藥病이 俱消하고 敎觀을 咸息하느니라. (『宗鏡錄』 1 「標宗章」,  『大正藏』 48, p419c.)

 

*  ‘참다운 본성[空性]을 체득’하면 곧바로 궁극적 경지인 ‘집착 없는 마음’이 나타나므로 약과 병이 모두 사라지고 [인위적인] 경전 공부와 수행도 다 쉬게 된다.

 

【평석】  진여혜일眞如慧日의 무한광명은 항상 법계를 조요照耀하고 있지마는, 3세6추三細六麤의 무명암운無明暗雲이 엄폐掩蔽하여 중생이 이를 보지 못한다. 운소장공雲消長空하면 청천靑天이 현로現露하여 백일白日을 보는 것과 같이, 3세三細의 극미망념極微妄念까지 멸진무여滅盡無餘하면 확철대오하여 진여본성을 통견洞見한다. 이에 일체망념이 단무斷無하므로 이를 무념無念 또는 무심無心이라 부르나니, 이것이 무여열반無餘涅槃인 묘각妙覺이다.

 

  그러므로 『기신론』에서 “견성은 원리미세遠離微細한 구경각”이라 하였으며, 원효元曉·현수賢首도 그들의 『기신론소』에서 “금강이환金剛已還의 일체중생은 미리무명지념未離無明之念”이라 하고 또한 “불지佛地는 무념”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금강 즉 등각等覺 이하의 일체중생은 유념유심有念有心이니 등각도 불타의 성교聖敎와 법약法藥이 필요하며, 약병藥病이 구소俱消하고 교관敎觀을 함식咸息한 무념무심은 무명이 영멸永滅하여 자성을 철견徹見한 묘각뿐이다.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은 위도일체심爲度一切心이라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커니 하수일체법何須一切法이리오.”라고 하였으니, 과연 그렇다. 제불의 일체 법문은 군생群生의 중병衆病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시약處方施藥이다. 무병건강한 자에게는 기사회생起死回生하는 신방묘약神方妙藥도 필요 없는 것과 같이, 범부심凡夫心・외도심外道心・현성심賢聖心・보살심菩薩心 등 무량중생의 본병本病인 일체 심념心念을 단연斷然 초탈한 구경무심지究竟無心地의 대해탈인大解脫人에게는 아무리 심현오묘深玄奧妙한 불조佛祖의 언교言敎와 관행觀行이라도 소용없다. 그리하여 법약法藥과 중병衆病이 구소俱消하고 성교聖敎와 묘관妙觀을 함식咸息한 구경무심지만이 견성이니, 이것이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철증徹證한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의 심경心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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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함없는 참다운 본체[眞如]’가 내뿜는 무한한 지혜의 빛은 항상 모든 곳을 비추고 있지마는, 세 가지 미세한 번뇌와 여섯 가지 비교적 큰 번뇌로 인해 생긴 어리석음의 어두운 구름이 덮고 있어 중생이 이를 보지 못한다. 구름이 사라지면 푸른 하늘이 나타나 밝은 햇빛이 자연히 드러나는 것처럼, 세 가지 미세한 번뇌의 아주 작은 그릇된 생각마저 남김없이 완전히 소멸되면 확 트인 하늘같은 깨달음을 얻어 ‘존재의 변함없는 참다운 본체[眞如本性]’를 뚜렷하게 파악하게 된다. 그러면 모든 그릇된 생각이 단절되고 없어지는데 이를 무념 또는 무심이라 부르나니, 이것이 무여열반인 묘각이다. 그러므로 『대승기신론』에서 “깨달음은 미세한 번뇌가 모두 사라진 궁극의 깨침”이라 하였으며, 원효 스님과 현수 스님도 그들의 『대승기신론소』에서 “금강과 같은 삼매에 들기 이전의 모든 중생은 어리석음의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했고 또 “부처님의 경계는 무념”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보살의 52계위 가운데 등각과 그 이전의 모든 단계에 있는 중생들은 그릇되게 헤아리는 마음과 생각이 있기에 등각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진리의 약이 필요하다. 약과 병이 모두 사라지고 [인위적인] 경전 공부와 수행도 다 쉬게 되는 무념무심은 어리석음이 완전히 소멸되고 존재의 참모습을 체득한 묘각 단계뿐이다. 

 

  옛사람은 “부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마음을 구제하기 위해서인데, 나는 마음이 없으니 모든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러 중생들의 뿌리 깊은 병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전이다. 병이 없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죽음에서 되살려 주는 신령스런 처방과 신묘한 약도 필요 없는 것과 같이 범부의 마음, 불교를 믿지 않는 마음, 성인인 척하는 마음, 보살인척 하는 마음 등 무수한 중생들이 갖고 있는 근본 병인 그릇된 마음과 생각을 완전히 끊고 번뇌에서 벗어나 궁극의 무심의 경계에 있는 크나큰 자유인에게는 아무리 깊고 오묘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법도 쓰일 곳이 없다. 그리하여 진리의 약과 여러 병들이 모두 사라지고 부처님 가르침과 영험 있는 수행법을 다 내려놓은 궁극의 무심의 경계만이 참 깨달음이니, 위없는 큰 깨달음을 확실하게 증득해 ‘배울 것 없는 한가로운 수행자’의 마음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강설】  모든 일엔 목표가 있기 마련이다. 불교의 목표는 무엇인가? 불교의 목표는 부처가 되는 성불成佛이다. 그럼 성불이란 무엇인가? 목표의 실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추구한다면 그것은 맹목적 열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성불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성불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성불의 내용에 대한 갖가지 말씀이 여러 경론에 다양하게 설해져 있는데, 가장 근본이 되는 최초의 설법에서 그 연원을 살펴보자.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성취한 뒤에 녹야원鹿野苑으로 다섯 비구를 찾아가 맨 처음 하신 말씀은 “나는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는 중도선언이다. 마음을 깨달았다느니 불성을 깨달았다느니 하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으시고 “나는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최초의 법문이다. 스스로 말씀하시길 “중도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고 하셨으니 중도가 무엇인지 알면 곧 성불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양극단에 떨어지지 않는 중도를 설명하는 데도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불생불멸중도不生不滅中道이다. 생과 멸을 따르지 않는 우주의 근본 이치가 바로 중도이고, 이는 또한 ‘불성佛性’, ‘법성法性’, ‘자성自性’, ‘진여眞如’, ‘법계法界’, ‘마음’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중도란 곧 마음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중도를 깨쳤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자리’, ‘근본자성’을 바로 보았다는 말로서 이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따라서 견성이란 근본 마음자리를 확연히 깨쳐, 즉 중도의 이치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요즘 항간에서 견성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견성의 본뜻과 거리가 먼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자면 유럽을 여행하다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선방을 견학하고 온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많은 유럽인들이 선방에 모여 참선을 하고 있는데, 찬찬히 둘러보니 그 좌석배치가 견성한 사람의 좌석과 견성하지 못한 사람의 좌석으로 나눠져 있더라고 한다. 게다가 견성한 사람이 앉는 좌석에 견성하지 못한 쪽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더라는 것이다. 견성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이 하도 신기해 “당신 정말로 견성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인가받았냐고 되물었더니, 자기는 스승으로부터 점검을 받고 ‘무無’자字 화두話頭를 참구해도 된다고 허락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지금 “무!” 할 줄 안다고 대답하더란다. 그러니 결국 그들이 말하는 견성한 사람과 견성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무!” 할 줄 아는 사람과 “무!” 할 줄 모르는 사람의 차이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사람들이 가르치고 있는 선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들이 현재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전국 선방에 견성 못한 사람이 도리어 드문 것이 현재 한국불교의 실정이고, 이 자리에 앉은 선방 수좌들 역시 나름대로 견성에 대한 견해를 한가지씩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흔히 참선하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그것을 두고 ‘견성했다’거나 ‘한 소식 했다’고들 하는데 정작 만나서 살펴보면 견성하지 못한 사람하고 똑같다. 과연 무엇을 깨쳤나 점검해 보면 제 홀로 망상에 휩싸여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떠드는 것에 불과하다. 견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망설은 자신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선종의 종지宗旨를 흐리고 정맥正脈을 끊는 심각한 병폐이다. 『선문정로』를 편찬하면서 첫머리에 ‘견성이 곧 성불’임을 밝힌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견성하면 곧 부처임은 선종의 명백한 종지이다. “견성해서 부지런히 갈고닦아 부처가 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부산에서 서울 가는 일로 비유를 들자면 저 삼랑진쯤이 견성이고, 거기서 길을 바로 들어 부지런히 달려 서울에 도착하는 것을 성불로 생각한다. “견성한 뒤 닦아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견성의 내용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서울 남대문 안에 두 발을 들이고 나서야 견성이지 그 전에는 견성이 아니다. 견성하면 그대로 부처지, 닦아서 부처된다고 하는 이는 제대로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다.

 

  『종경록』에서 “자성을 보면 당장에 무심경이 된다.”고 하였는데 제6식만 제거되어서는 망심이라 하지 무심경이라 하지 않는다. 무심이란 제6식의 추중망상麤重妄想뿐 아니라 제8 아뢰야식의 미세망상微細妄想까지, 즉 3세6추가 완전히 제거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부처님 팔만대장경은 중생들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약방문이다. 환자야 약방문이 필요하지만 병의 근본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한 이에게 무슨 약방문이 필요한가? 진여자성을 확연히 깨달아 무심경이 된 사람, 즉 성불한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도 어떤 수행도 필요하지 않다. 부처님의 팔만대장경도 조사의 1,700공안도 모두 필요 없는 그런 사람이 견성한 사람이다. 역으로 가르침이 필요하고 수행이 필요하다면 그는 구경무심을 체득하지 못한 사람이고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다. 제8 아뢰야식의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제거되어 구경의 묘각을 성취한 것이 견성이지 그러기 전에는 견성이라 할 수 없다.

 

  이는 나의 억지 주장이 아니다. 부처님의 바른 뜻이 담긴 경전과 만대萬代의 표준이 되는 정론과 종문 정안조사들의 말씀을 근거로 하는 말이다. 이에 『능가경』・『대열반경』・『대승기신론』・『유가론』・『육조단경』・『종경록』・『원오록』 등에서 인용하여 그 전거를 밝혔다. 종파를 초월해 대조사로 추앙받는 마명馬鳴 보살의 『대승기신론』은 대승의 표준이 되는 불교총론으로 공인된 책이다. 『기신론』 에서도 미세한 망상이 완전히 제거된 묘각 즉 구경각究竟覺만이 견성임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원효와 현수 두 스님도 금강유정에 든 등각 보살도 아직 망념이 남아 있는 중생이라 하여 견성하면 곧 부처고 견성하지 못하면 중생임을 그 소에서 각기 밝혔다.

 

  견성했다고 하면서 정을 닦느니 혜를 닦느니 하는 것은 아직 미세망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견성이 아니다. 더 이상 배우고 익힐 것이 없는 한가로운 도인, 해탈한 사람이 되기 전에는 견성이 아니다. 이것이 『선문정로』의 근본사상이다. 요즘 견성했다는 사람이 도처에 있어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 자리에도 혹 견성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게도 그런 이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오곤 하는데 난 그런 이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혹자는 “분명히 견성했는데 저 노장이 고집불통이라 인정하지 않는다.”며 불평하는데, 그것은 견성병見性病이 골수에 사무친 것이지 진짜 견성한 것이 아니다. 

  

내가 괜한 심통을 부려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개인적 체험과 견해를 견줘 우열을 다툴 이유가 없다. 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부처님 대조사 스님들을 재판관으로 삼고 판결을 받아보자는 것이다. 스스로 불자라 자부한다면 부처님 대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표방해야지 소소한 사견을 내세워 불조를 능멸해서야 되겠는가? 그것은 터럭 하나로 허공과 견주려들고 물방울 하나로 바다와 견주려드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니 혹 참선을 하다 나름대로 기특한 견해가 생기고 기이한 체험을 하더라도 그걸 견성으로 여겨 자기와 남을 속이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한 올의 터럭 한 방울의 물이라 여겨 아낌없이 버리기를 간곡히 당부한다.

 

【1-2】  ①『능가경』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제천諸天, 범중승梵衆乘, 성문, 연각, 제불여래승諸佛如來乘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승諸乘들은 유심有心 중의 전변轉變이므로 제승은 구경무심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에 그 각종의 유심이 멸진하면 제승과 그 승乘을 의지할 승자乘者도 없어 승乘이라 하는 명칭조차 건립할 수 없는 대무심지大無心地이다. 나는 최상유일승最上唯一乘을 말하나 중생을 인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나누어 제승을 설한다. ①如楞伽經偈에 云하되 諸天及梵乘과 聲聞緣覺乘과 諸佛如來乘에 我說此諸乘은 乃至有心轉이니 諸乘은 非究竟이라 若彼心滅盡하면 無乘及乘者하야 無有乘建立이니라 我說一乘이나 引導衆生故로 分別說諸乘이니라. (『宗鏡錄』 1 「標宗章」, 『大正藏』 48, p.419c.)

 

*  『능가경』 게송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제천, 범중승. 성문, 연각, 제불여래승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기들의 경계境界는 모두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므로 이들 경계들이 결코 궁극의 집착 없는 마음을 체득한 상태는 아니다. 만약에 그 경계들에 나타나는 여러 종류의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면 여러 경계, 그들이 의지하는 가르침[수레], 가르침에 의지하려는 사람 등이 없어진다. 그래서 가르침[수레]이라는 명칭을 세울 근거조차 없는 크나큰 경계가 드러난다. 나는 ‘최상의 경지인 하나의 수레’를 말하나 중생들을 인도하기 위해 방편적으로 다섯 가지 경계로 나누었을 뿐이다.

 

【평석】  제천諸天, 범중梵衆, 성문, 연각의 제승諸乘은 말할 것도 없고 제불여래승도 유심전有心轉이어서 구경이 아니니, 제불여래승까지 멸진한 무여열반인 구경무심이 즉 견성이다. 이것은 방편으로 일승一乘이라 호칭하나 이 일승은 삼승 상대의 일승이 아니요 제불여래승까지 초월하여 무승급승자無乘及乘者인 최상승을 표현한 가명假名이니 이는 최종구경의 심심현경深深玄境인 대무심지를 말한 것이다.

 

*  제천, 범중, 성문, 연각의 여러 경계境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불여래의 경계도 미세한 망념이 움직이고 있는 경지이므로 궁극의 상태는 아니다. 제불여래승의 경계까지 완전히 소멸한 남김 없는 열반, 즉 ‘최후의 집착 없는 마음’이 바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경지’이다. 이것을 방편으로 ‘하나의 수레[경계]’라고 부르나 이 하나의 수레는 성문·연각·보살과 비교한 하나의 수레가 아니다. 제불여래의 경계까지 초월한 경지, 즉 수레와 수레에 타는 사람까지 없는 최고의 경계를 표현한 임시적인 이름이니, 이는 궁극의 경지인 ‘깊고 깊은 오묘한 경계’인 ‘크나큰 집착 없는 마음’을 말한다.  

 

【강설】  다음으로 “견성하면 즉시 구경의 무심경계가 현전한다.”고 하였는데 그 구경무심究竟無心에 대해 살펴보자. 영명연수 선사의 저술인 『종경록』은 선종의 만리장성으로 일컬어지는 대역작이다. 그 첫머리 「표종장」에서 연수선사는 『능가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경무심이란 성문승과 연각승은 물론 제불여래승까지 초월한 것임을 밝혔다. 참다운 무심이란 각종의 유심有心이 다 없어져 탈 수레도 탈 사람도 없고, 무심이란 명칭까지도 붙을 자리가 없는 그런 경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요즘 불교를 공부합네 하는 사람치고 무심이란 단어를 들먹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무심이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처럼 그렇게 가볍게 치부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작년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 자기는 정말로 무심을 증득했으니 인가 해달라고 따라 다니며 귀찮게 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은 인가는커녕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도 않는다. 들을 필요도 없다. 그런 것은 무심이 아니라 유심有心이다. 그것도 쉽게 고칠 수 없는 아주 고약한 유심이다. 금덩어리처럼 귀하게 여기며 자신의 소견을 힘주어 피력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고약한 냄새가 펄펄 풍기는 똥 덩어리이다. 그런 사람을 여럿 보았다. 제천승・범중승・성문승・연각승은 물론 제불여래승마저도 유심이지 구경의 무심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지 않았는가? 유심과 무심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 함부로 무심을 거론하지 말라.

 

【1-3】  ①그러므로 선덕先德이 말했다. 일점장예一點障瞖가 안막眼膜을 덮으니 천종환화千種幻華가 요란하게 추락하고, 일진망념一陣妄念이 심중心中에 일어나니 항하사 수數의 생멸이 발동한다. 안예眼瞖를 제거하니 환화가 소진하고, 망념이 영멸永滅하여 진성眞性을 증득하니 천병千病이 쾌차하여 만약萬藥을 제각除却하고, 망념의 빙괴氷塊가 소융消融하여 진성의 담수湛水가 유통流通한다. 신령한 단약丹藥을 구번전단九番轉煅하니 생철을 점하點下하여 진금으로 변성變成하고, 지극한 묘리는 일언편구一言片句로 범부를 전환하여 성자로 성취한다. 광분하는 망심을 휴헐休歇치 못하다가 휴헐하니 즉 무상보리無上菩提요, 현경玄鏡이 청정하여 본심이 명철明徹하니 본래로 대각세존이니라. ①故로 先德이 云하되 一瞖在眼하니 千華亂墜하고 一妄이 在心에 恒沙生滅이라 瞖除華盡하고 妄滅證眞하니 病差藥除하고 氷融水在로다 神丹이 九轉하니 點鐵成金이요 至理一言은 轉凡成聖이라 狂心이 不歇타가 歇卽菩提요 鏡淨心明하니 本來是佛이니라. (『宗鏡錄』 1 「標宗章」, 『大正藏』 48, p.419c. 이상 3단의 원문은 계속된 것임.)

 

*  그러므로 선 수행에 뛰어난 분들이 말했다. 하나의 티끌이 눈을 가리자 수많은 공허한 형상들이 요란하게 떨어지고, 한 가지 그릇된 생각이 마음에 일어나니 갠지즈강 강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삶과 죽음이 나타난다. 눈을 가리는 티끌을 없애니 공허한 형상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릇된 생각이 영원히 소멸되어 참다운 본성을 깨달으니 수많은 병들이 깨끗이 나아 모든 약들이 필요하지 않고, 그릇된 생각이 완전히 녹아 참다운 본성의 맑은 물이 되어 흐른다. 신령스런 약을 아홉 번 삶아 만드니 녹슨 철 덩어리가 순금으로 변한다. 한 마디 반 마디의 지극한 이치가 미혹한 중생들을 성자로 변모시킨다. 날뛰는 마음이 쉬어지지 않다가 쉬니 바로 깨달음이요 거울 같은 맑은 마음이 되니 이것이 본래 부처님이다. 

       

【평석】  3세6추의 일체망념이 돈연頓然 소멸되고 상주불변하는 진여본성을 활연豁然 증득하니, 이것이 곧 망멸증진妄滅證眞한 구경무심인 견성이다. 병차약제病差藥除하여 무사무위無事無爲한 대해탈인으로서 빙소수정氷消水淨한 진성眞性의 대해大海에서 유영자재游泳自在하니, 천상인간天上人間 독존무비獨尊無比한 대각여래며 서천차토西天此土에 등등상속燈燈相續한 정안종사正眼宗師이다. 이로써 견성은 망멸증진하니 약병藥病이 구소俱消하고 교관을 함식咸息하여 제불여래승까지 멸진한 무여열반인 구경대무심지임이 요연명백了然明白하다.

 

  『종경록』의 저자 영명은 불조정전佛祖正傳인 대법안大法眼의 3세 적손이다. 임제정맥인 중봉中峰이 “고금을 통한 천하의 사표師表는 영명을 두고 누구겠는가[古今天下之師는 捨永明하고 其誰歟아; 中峰『山房夜話』 上, 『頻伽藏』 85, p.262]”라고 찬탄하였다. 『종경록』 100권은 종문의 지침으로 용수龍樹 이래의 최대 저술로서 찬앙讚仰된다. 

 

  회당晦堂 역시 임제 정전正傳인 황룡파의 개조 남선사南禪師의 상수제자로 불조의 정맥으로 천하가 추앙한 바이다. 항상 『종경록』을 애중하여, 보각(寶覺, 晦堂) 선사가 연랍年臘이 많으나 오히려 『종경록』을 수중에서 놓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이 책을 늦게 봄을 한恨한다.”라 하고 기중其中에 요처要處를 촬약撮約하여 3권을 만들어 『명추회요冥樞會要』라고 이름 하니 세상에서 성盛히 유전流傳하다.[寶覺禪師가 年臘이 雖高나 手不釋卷曰 吾恨見此書晩矣로다 其中에 因撮其要處하야 爲三卷하고 謂之冥樞會要라하니 世盛傳焉하니라; 『人天寶鑑』 下, 『卍續藏』 148, p.141b] 이렇게 『종경록』 중의 소론所論은 고금을 통하여 그 누구도 이의 할 수 없는 종문의 정론定論으로 되어 있다.

 

*  세 가지 미세한 번뇌와 여섯 가지 비교적 큰 번뇌 등 모든 그릇된 생각들이 문득 사라지고 언제나 변함없는 참다운 본성을 환희 꿰뚫어 체득하니 이것이 바로 그릇된 것을 소멸시키고 참다운 것을 깨달은 궁극의 마음인 견성이다. 병은 쾌차되고 약은 필요 없고, 여러 인연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일 없는 크나큰 해탈인으로 얼음이 녹아 깨끗한 물로 변한 참다운 본성의 큰 바다에서 마음대로 헤엄치고 자유로이 오가니, 하늘세계와 인간세계에 비할 바 없는 부처님 같은 존재이자, 인도에서 이 땅까지 꺼지지 않고 이어진 지혜의 등불을 계승한 ‘올바른 안목을 가진 참다운 스승’이다. 이로써 참다운 깨침은 그릇된 것을 소멸시키고 진실한 것을 체득한 것이기에, 약과 병이 함께 사라지고, 가르침과 인위적인 수행도 동시에 쉬어지고, ‘여러 부처님의 수레’까지 완전히 소멸시킨 ‘궁극의 집착 없는 마음’임이 분명하고 확실하다.  

 

  『종경록』의 저자 영명 선사는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계승한 법안문익 선사의 제3세 법손法孫이다. 중봉명본 선사는 영명 선사에 대해 “옛날과 지금에 천하의 스승으로 영명연수 선사를 제외하고 그 누가 있겠는가!”라고 찬탄했다. 『종경록』 100권은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나침반 같은 것으로, 용수 보살 이래 최대 저술로 인정받는다. 회당조심 선사 역시 임제의 법맥을 바르게 계승한 황룡파의 개조 혜남 선사의 상수제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은 분으로 천하가 추앙하는 수행자이다. 비록 나이가 많았으나 항상 『종경록』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내가 이 책을 늦게 본 것을 한탄한다.”며 『종경록』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을 간추려 3권으로 만들고는 이름을 『명추회요』라고 했는데, 세상에 널리 퍼져 유통되었다. 이렇게 『종경록』이 논의하는 것은 고금을 통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확실한 준칙準則이 되어 있다.   

 

【강설】  견성은 구경의 대무심경계로서 곧 성불을 뜻함을 입증하기 위해 영명연수 선사가 앞서 『능가경』의 말씀을 인용하고, 여기에서는 조사 스님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눈을 가리는 티끌을 제거하듯 일념의 망상을 제거해 변함없고 항상한 진여본성을 확연히 증득하는 것, 이것이 구경무심이고 견성이다. 영명 스님의 논지를 요약해보자. 첫머리에서 견성하면 곧 구경무심으로 병이 없으면 약이 필요 없듯이 일체 방편이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능가경』을 인용해 무심의 참뜻을 밝히고, 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인용해 망멸증진妄滅證眞, 즉 일체 망념이 다 사라지고 진여본성을 증득하여 융통자재하게 된 것이 견성임을 밝혔다. 돈오점수설의 근간이 되는 보조 국사의 『수심결』에서는 얼음의 본성이 본래 물이었음을 알듯 중생이 본래 부처였음을 알면 그것을 견성이라 했다. 그러나 여러 경론과 정안종사들의 말씀을 살펴볼 때, 견성이란 얼음이 완전히 녹아 융통 자재한 것을 견성이라 했지 그러기 전에는 10지 등각이라도 유심으로서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환자와 같다 하였다. 따라서 『수심결』에서 말한 견성은 종문의 정론을 근거로 볼 때 진정한 견성이 아님이 명백하다.

 

【1-4】  ①보살의 종점인 10지가 요진了盡하면 수도의 방편이 원만구족하여 무간도인 일념에 상응한다. 망심의 초기생상初起生相을 각지覺知하여 심지心地에 초상初相이 전무한지라 초기생상의 극미세망념을 원리遠離하므로 자심의 본성을 철견徹見하여 심성이 담연상주湛然常住할새 구경각이라 부른다. ①如菩薩地盡하면 滿足方便하야 一念相應하야 覺心初起하야 念無初相이라 以遠離微細念故로 得見心性하야 心卽常住일새 名究竟覺이니라. (『起信論』, 『大正藏』 32, p.576b.)  

 

*  만약 보살이 10지까지 모두 수행해 마치면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을 빠짐없이 갖추게 된다. 한 생각에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이 상응하여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닫는다. 그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모습도 없음을 깨닫게 되면 마음에 미세한 그릇된 생각까지 모두 사라지므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다. 마음이 항상 집착 없이 머무는 이것을 완전한 깨달음인 구경각이라고 한다.   

 

【평석】  등각의 금강유정에서 근본무명인 극미세망념을 단진斷盡하면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진여본성을 통견하나니 이것이 구경각인 성불이다. 이는 대승불교의 총론인 『기신』에서 견성 즉 구경각이며 성불임을 명증明證한 

 

*  등각 단계에서 금강 같은 삼매에 들어 근본적인 번뇌인 매우 미세한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끊으면 홀연 크게 깨달아 참다운 본성을 꿰뚫어 체득하나니 이것이 완전한 깨달음인 구경각이자 성불成佛이다. 이는 대승불교의 총론인 『대승기신론』에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이 바로 구경각이자 성불임을 분명하게 증명한 것이다. 

 

【강설】  공부하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고 기이한 경계가 나타나면 흔히 견성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데, 마명 보살은 불교의 총론이라 할 『대승기신론』에서 “10지 보살을 지나 등각의 금강유정에서 6추는 물론 3세의 미세한 망념까지 완전히 끊어져야 그때 견성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심성心性이 상주불멸하는 구경각 즉 묘각이 견성이지 그전에는 견성이 아니다. 10지 등각도 견성이 아니라 했는데, 하물며 전에 경험치 못한 기이한 경계와 기특한 소견이 조금 생겼다고 함부로 견성했다고 떠들어서야 되겠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제자라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종문의 표준인 『대승기신론』의 말씀을 저버리지 말라.

 

【1-5】  ①무명업상無明業相이 동념動念하는 것이 망념 중에서 가장 미미하므로 미세망념이라 호칭한다. 이 미세망념이 전부 멸진하여 영원히 그 여적餘跡이 없으므로 영원히 이탈한다고 한다. 이 미세망념을 영영 이탈한 때에는 정확히 불지佛地에 머무르게 된다. 전래의 3위는 심원心源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생상生相이 멸진하지 않아서 심중心中이 아직 생멸무상生滅無常하다가, 차위此位에 이르러서는 영영 멸진하여 일심의 본원에 귀환하여 다시는 기멸동요起滅動搖함이 전무하므로 견성이라 칭언稱言한다. 견성을 하면 진심이 확연상주廓然常住하여 다시는 전진 할 곳이 없으므로 최후인 구경각이라 호명한다. ①業相動念이 念中에 最細일새 名微細念이니라 此相이 都盡하야 永無所餘故로 言永離니 永離之時에 正在佛地니라 前來三位는 未至心源일새 生相이 未盡하야 心猶無常이라가 今至此位하야는 無明이 永盡하야 歸一心源하야 更無起動故로 言得見心性이니 心卽常住하야 更無所進일새 名究竟覺이니라. (元曉, 『起信論疏』, 『大正藏』 44, p.210b.)

 

*  무명업상이라는 번뇌가 움직이는 것이 ‘그릇된 생각’ 가운데 가장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이를 ‘미세한 망념’이라 부른다. 그릇된 미세한 생각이 전부 소멸되어 남은 것이 영원히 하나도 없으므로 완전히 떠났다고 말한다. 완전히 떠난 이 때가 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앞의 3위는 마음의 근원에 이르지 못했기에 모습이 생기는 상태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아 마음에 여전히 태어났다 사라졌다 하다가, 다음 단계에 이르러 영원히 사라져 ‘한 마음의 근원根源’에 돌아가 다시는 그릇된 생각이 생기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이를 견성이라 말한다. 여기서 마음은 항상 텅 빈 채 머물러 다시 더 나아갈 곳이 없으므로 ‘궁극의 깨달음[究竟覺]’이라 부른다. 

 

【1-6】  ①업식業識이 동념動念하는 것이 가장 미세하므로 미세망념이라 호명하나니 생상生相을 말함이다. 이 최초 생상이 전부 멸진하여 영영 그 잔여가 없는 고故로 원리遠離라 하며, 허망환상虛妄幻相을 원리한 고로 진여자성이 곧 현현하나니 고로 견성이라고 한다. 전 3위중에는 최초 생상生相이 멸진하지 않았으므로 견성이라 하지 않는다. ①業識動念이 念中에 最細일새 名微細念이니 謂生相也라 此相이 都盡하야 永無所餘故로 言遠離요 遠離相故로 眞性이 顯現하나니 故로 云見心性也라 前三位中에는 相不盡故로 不見性也라. (賢首, 『義記』 卷中末, 『大正藏』 44, p.258c.) 

 

* 업식業識이 움직이는 것이 가장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미세한 그릇된 생각’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생상生相이다. 이 최초의 생상이 전부 완전히 소멸되어 영원히 남은 것이 없으므로 ‘완전히 떠났다[遠離]’고 말한다. 생상을 완전히 떠났기에 참다운 본성이 드러난다. 그래서 마음의 본성을 체득했다고 말한다. 앞의 3위에서는 생상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기에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지 못했다.  

 

【1-7】  ①불지佛地는 미세념까지 영진永盡한 무념이다. ②佛地는 無念이니라.

(①元曉, 『疏』, 『大正藏』 44, p.210b. ②賢首, 『義記』, 『大正藏』 44, p.258c.) 

 

* ①부처님의 경지는 미세한 그릇된 생각까지 영원히 소멸된 그런 집착 없는 마음의 상태이다. ②부처님의 경지는 그릇된 집착이 전혀 없는 마음의 경계이다. 

【평석】  원효 스님과 현수 스님은 교종의 권위이다. 미세무명인 제8 아뢰야식이 멸진하면 무여열반인 불지 즉 구경각이어서 이것이 무념 즉 무심이며 견성임은 불교의 근본원리이므로, 원효·현수 스님도 이의가 있을 수 없으며 『종경록』의 소론所論과 완전 일치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전 3위’라 함은 불각不覺의 10신十信, 상사각相似覺의 3현三賢, 수분각隨分覺의 10지十地를 말함이니, 3현 10지가 전부 무명업식無明業識의 환몽幻夢 중에 있으므로 견성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대승기신론』 중의 증발심證發心도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어서 진여라고 가명假名하나 업식심業識心이 미세기멸微細起滅하여 무명이 미진未盡하였으므로 견성이 아니다.

 

*  원효 스님과 현수 스님은 교종을 대표하는 수행자들이다. 미세한 망념인 제8 아뢰야식이 완전히 소멸되면 남김 없는 열반인 부처님의 경지, 즉 궁극의 깨달음이어서 이것이 집착 없는 마음인 무심이자 견성임은 불교의 근본진리이므로, 원효 스님과 현수 스님도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종경록』이 논의하는 것과 완전히 일치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전 3위라 함은 ‘깨닫지 못한’ 10신, ‘비슷한 깨달음 단계’인 3현, ‘조금씩 참다운 본성을 증득해가는 단계’인 10지를 말한다. 3현 10지가 전부 무명업식無明業識의 허망한 꿈속에 있음으로 참다운 본성을 철견徹見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증득한 것도 무분별지를 얻어서 참다운 본성이라고 임시로 이름을 붙이나 업식심業識心이 미세하게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등 무명無明이 완전히 다 소멸되지 않았기에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은 아니다. 

 

【강설】  원효 스님과 현수 스님 역시 그 『소疏』에서 구경각 최후의 여래지만이 견성이고 그 이전의 3위는 미세망상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으므로 견성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부처의 지위는 미세망념까지 영원히 없어진 무념無念이니, 무념이 곧 견성이고 성불이다. 10지 보살을 넘은 등각에서 미세망상이 완전히 끊어져 구경각에 이르러야 견성임은 불교의 총론이라 할 『대승기신론』에서 이론을 제기할 수 없게 분명히 밝힌 바이다. 또한 역대 조사 스님들뿐 아니라 원효 스님과 현수 스님 같은 교종의 권위자들 역시 한목소리로 말씀하신 바이다. 그런데 어찌 부처님 법을 함부로 고쳐 마음대로 10신을 돈오라 하고 견성이라 한단 말인가? 보조 스님을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조 스님은 10지는커녕 10신초十信初를 견성이라 하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을 치자면 고불고조께선 남대문을 통과해야 견성이라 하셨는데 보조 스님은 출발점인 부산에서 견성한다 하였으니 불조의 말씀과 너무도 어긋난다. 보조 스님이 훌륭한 분이긴 하나 부처님과 마명 보살 그리고 대조사 스님 들을 능가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보조 스님의 말씀이라고 무조건 추종할 것이 아니라 오류가 있는 부분은 비판하고 수정해야 할 것이다.

 

【1-8】  ①10지의 제현(諸賢, 聖人)들이 설법하기는 여운여우如雲如雨하여도 견성은 나곡羅縠을 장격障隔함과 같으니라. ①十地諸賢(聖人)이 說法은 如雲如雨하여도 見性은 如隔羅縠이니라. (汾州-『傳燈錄』 28, 『大正藏』 51, p.444c. 雲門-『傳燈錄』 19, 『大正藏』 51, p.356c.)

 

*  수행 경지가 제10지에 이른 여러 보살들이 구름이 일어나고 비가 내리듯이 어렵지 않게 가르침을 설명해도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기는 얇은 비단으로 눈을 가려고 본 것과 같은 상태에 있다.

 

【평석】  분주汾州와 운문雲門은 3학三學에 해통該通한 절세의 정안正眼이다. 분주汾州·운문雲門뿐 아니라 십지미견성十地未見性은 종문정전宗門正傳의 통칙通則이니 구경각 즉 여래지如來地만이 견성인 연고緣故이며, 종문에서 말하는 10지는 권교십지權敎十地가 아니요 일승십지一乘十地이다. 10지 이후에 뇌야賴耶의 미세를 영단永斷하여야 견성이라 하니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으나, 몽중일여夢中一如가 되면 화엄칠지華嚴七地요 숙면일여熟眠一如가 되면 뇌야미세賴耶微細의 자재 보살위이다. 선문 정안종사 중에 숙면일여위를 투과透過하지 않고 견성이라  호칭한 자는 없다. 이는 구경각을 성취한 소이所以이니 오매일여편에서 상술한다.

 

*  분주무업과 운문문언은 계·정·혜 삼학에 두루 통달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올바른 지혜의 눈을 가진 선사들이다. 제10지의 경지에 이른 보살도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선문에선 누구나 인정하는 준칙準則이다. 궁극의 깨달음인 구경각만이 진정한 여래의 경지境地이기 때문이다. 선문에서 말하는 제10지는 방편적으로 설명하는 제10지가 아니고, ‘하나의 진정한 경지’에 오른 제10지를 말한다. 제10지 이후 근본 무명인 아뢰야식을 영원히 끊어야 참다운 본원을 체득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불가능해 보여도 꿈속에서 화두가 들리면 제7지에 도달한 것이며, 잠이 깊게 든 상태에서 화두가 들리면 아뢰야식이라는 미세한 번뇌만 남아있는 자재自在 보살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선문의 참다운 스승 가운데 잠이 깊게 든 상태에서 화두가 들리지 않는 경지를 거치지 않고 참다운 본성을 체득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는 궁극의 깨달음인 구경각을 성취했기 때문인데 「오매일여」편에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강설】  종문의 정안종사치고 10지 보살이 견성했다고 말한 사람은 한 분도 없다. 여기선 그 많은 정안종사 중 대표로 분주 스님과 운문 스님 두 분을 예로 든 것뿐이다. 구경각 즉 여래지만이 견성이지 10지 보살도 견성한 것이 아니라는 게 모든 조사스님의 정설이다. 견성하려면 10지 등각을 넘어서야 된다고 하면 혹자는 ‘너무 높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물러서는 마음을 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되는 것이다. 몽중일여가 되면 화엄7지 보살이고, 잠이 깊이 든 상태에서도 여여한 숙면일여가 되면 8지 보살이라 하였다. 요즘은 몽중일여는 고사하고 동정일여도 되지 않고서 견성했다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근래에도 어떤 이가 하도 깨쳤다고 떠들어대기에 시자를 시켜 물어보게 한 일이 있었다. 미친 소견이 충천衝天해 부처고 조사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큰소리쳐대지만 실제로는 동정일여도 되지 않은 자였다. 몽중일여는 물론 숙면일여까지 넘어서야 견성인데 동정일여도 되지 않는 그것이 무슨 견성이겠는가? 

 

  견성했으니 인가해달라고 찾아오는 이가 일 년에 수십 명이 넘는데 태반이 견성은커녕 몽중일여도 되지 않은 자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견성이란 동정일여・몽중일여를 넘어 숙면일여가 되고 나서 얻는 것이라고 설명해주면 “아, 견성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습니까?” 하고 순순히 돌아가곤 하는데, 간혹 막무가내로 고함을 치며 법담法談해보자고 달려드는 이들도 있다. 또 자기는 몽중일여·숙면일여를 넘어 완전한 무심경계에 들었다고 억지를 쓰는 이들도 있는데 그것은 완전 거짓말이다. 천하 사람을 다 속인다 해도 자신은 속일 수 없다. 그렇게 거짓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간혹 숙면일여를 지나 묘각을 성취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예전엔 이런 이들을 물리치지 않고 일일이 만나줬지만 아무리 일러 줘 봐야 소용이 없다. 그래서 근간엔 시자를 시켜 만나보게 하는데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 도처에 가득하다.

 

【1-9】  ①명안인明眼人이 경곡輕縠을 장격障隔하고 모든 색상色像을 보는 것과 같아서 구경지 보살도 일체경계에 이와 같으며, 명안인이 장격이 없이 모든 색상을 보는 것과 같아서 여래도 일체경계에 이와 같느니라. 명안인이 미암중微闇中에서 중색衆色을 보는 것과 같아서 구경지 보살도 이와 같으며, 명안인이 일체 혼암昏闇을 떠나 중색을 보는 것과 같아서 여래도 이와 같으니라. ①如明眼人이 隔於輕縠하고 覩色像하야 究竟地菩薩도 於一切境에 亦爾하며 如明眼人이 無所障隔하고 覩衆色像하야 如來도 於一切境에 亦爾니라 如明眼人이 於微闇中에 覩見衆色하야 究竟地菩薩도 亦爾하며 如明眼人이 離一切闇하고 覩見衆色하야 如來도 亦爾니라. (『瑜伽師地論』, 『大正藏』 30, p.574bc.) 

 

*  눈 밝은 사람이 얇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모든 사물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등각의 경지에 오른 구경지 보살도 일체의 대상에 대해 이와 같다. 눈 밝은 사람이 얇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물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여래도 일체의 대상에 대해 이와 같다. 눈 밝은 사람이 조금 어두운 곳에서 여러 사물을 보는 것처럼 구경지 보살도 이와 같으며, 눈 밝은 사람이 일체의 어둠을 벗어나 모든 사물을 보는 것처럼 여래도 이와 같다.

 

【평석】  구경지 보살인 등각等覺은 아뢰야의 미세망념이 잔여殘餘하여 이것이 자성을 장폐障蔽하여 일체 경계에 요연명백了然明白하지 못하여 “여격경곡如隔輕縠하며 여암중도색如闇中覩色”이라 하였으며, 따라서 불성 경계도 이와 같이 명료하지 못하므로 불조佛祖는 10지보살도 견성은 “여격나곡如隔羅縠 여암중견색如闇中見色”이라고 가책呵責하였다. 이 미세망념이 멸진하여 심안心眼이 통개洞開하면 경곡輕縠과 미암微闇을 영리永離한 일승불과一乘佛果를 성취하여 일체경계에 요연명백하므로  『열반경』에서 “여래견성如來見性은 여주견색如晝見色”이라고 하였다. 이는 “보살지진菩薩地盡하여 영리미세永離微細하면 득견심성得見心性이니 명구경각名究竟覺”이라고 한 기신소론起信所論과 동일내용이다. 여격경곡如隔輕縠 여암견색如闇見色은 정견이 아니므로 불조 정전正傳은 견성을 불허不許하였을 뿐 아니라 제8 마계魔界라 하여 극력 배격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구경지 보살도 견성이 아니니 기여其餘는 거론할 필요도 없으므로 불교 만대의 표준인 『대승기신론』과 『유가사지론』의 ‘구경지 보살 미견성’의 원칙하에 일승 불과佛果 이외의 견성설은 단연코 용인할 수 없다. 

 

*  등각의 경지에 도달한 구경지 보살에게는 아뢰야의 미세한 망념이 남아 있다. 이것이 참다운 본성을 가려 구경지 보살도 모든 대상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얇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처럼” “마치 어두운 곳에서 사물을 보는 것처럼”이라고 한 것이다. 참다운 본성인 불성을 대하는 상태도 이와 같이 명료하지 못하므로 부처님은 제10지에 이른 보살도 “마치 얇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처럼” “마치 어두운 곳에서 사물을 보는 것처럼”이라고 질책한 것이다. 이 미세한 망념이 완전히 소멸되어 마음의 눈이 분명하게 열리면 얇은 비단과 약간 어두운 것에서 영원히 벗어나 ‘하나의 최상의 과보’를 얻어 모든 상황에 대해 분명하고 명백하게 체득하게 된다. 『열반경』은 “여래가 참다운 본성을 본 경지는 마치 대낮에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10지 단계의 수행이 끝나면 미세한 번뇌에서 영원히 벗어나 마음의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므로 궁극의 깨달음이라고 한다.”는 『대승기신론』의 논의와 똑 같다. “얇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 같은”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는 것 같은” 것은 제대로 본성을 파악한 것이 아니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은 선사들은 이를 참다운 본성을 제대로 체득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제8 마계라 하여 매우 비판했다. 이와 같이 구경지 보살도 견성이 아니니 나머지는 거론할 필요도 없다. 불교 만대의 표준인 『대승기신론』과 『유가사지론』이 말한 “구경지 보살도 깨달은 것이 아니다.”는 원칙에 따르면 ‘하나의 참다운 깨침’ 이외에는 단연코 깨달음이라고 허용할 수 없다.       

 

【강설】  제10지 보살·등각 보살의 경계마저 미세망념이 남아 있는 제8 마계라 하여 온 힘을 다해 배격하였는데 그 나머지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수행하다 기특한 경계가 나타나고 소견이 생겼다 해서 경솔하지 말라.

 

【1-10】  ①번뇌가 불생不生하는 고로 곧 불성을 정견하며 불성을 정견한 고로 대열반에 안주하나니, 이를 불생이라 하느니라. ①以不生煩惱故로 則見佛性이요 以見佛性故로 則得安住大涅槃이니 是名不生이니라. (『大般涅槃經』 18, 『大正藏』 12, p.723c.) 

 

*  번뇌가 생기지 않으므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며, 참다운 본성을 체득함으로 참다운 열반에 편안하게 머무른다. 이것을 ‘태어남이 없음’이라고 한다.

【평석】  불생은 즉 무생無生이니 미세의 번뇌망상까지 멸진한 대무심지大無心地요, 대열반은 무심지인 무여열반이니 즉 구경각이다. 그리하여 견성은 즉 무심이요 구경각이며 대열반인 것이다.

 

*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태어남이 없다’는 것이다. 이 경지가 미세한 번뇌와 그릇된 생각까지 완전히 소멸된 ‘크나큰 집착 없는 마음의 경지’이다. 크나큰 열반은 바로 ‘집착 없는 마음의 경지’이니 바로 ‘궁극의 깨달음’이다. 그리하여 ‘참다운 본성을 체득함’이 바로 ‘집착 없는 마음의 상태’요 ‘궁극의 깨달음’이자 ‘크나큰 열반’이다.     

 

【1-11】  ①제일의第一義에서 건립建立한 정의는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 중이 진정한 무심위無心位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경계 중에는 아뢰야식이 또한 영원히 소멸한 연고이다. 이 무여의열반 이외의 제위諸位는 전식轉識이 소멸한 고로 무심지라고 가명假名하나 아뢰야식이 영멸永滅치 못한 고로 제일의에서는 무심지가 아니다. ①第一義建立者는 謂無餘依涅槃界中이 是無心位니 何以故오. 於此界中에 阿賴耶識이 亦永滅故니라 所餘諸位는 轉識이 滅故로 名無心地나 阿賴耶識이 未滅盡故로 於第一義에는 非無心地니라. (『瑜伽師地論』 13, 『大正藏』 30, p.345a.) 

 

* ‘최상의 경계’에서 건립한 것은 ‘남김 없는 열반의 경지’에서 말한 것이니 이것이 ‘집착 없는 마음’의 경계이다. 왜 그런가? 바로 이 경계에서 아뢰야식 역시 영원히 소멸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여러 수행의 단계에서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 등이 사라졌기에 집착 없는 마음의 경지라고 임시로 말하나 아뢰야식이 영원히 소멸되지 않았기에 ‘최상의 경계’에서의 ‘집착 없는 마음의 경지’는 아니다.   

 

【평석】  진무심眞無心은 미세무명인 제8아뢰야식이 영멸永滅한 무여열반 즉 불지佛地만이다. 육칠 전식轉識이 멸한 제8 아뢰야의 무기無記를 무심이라 가칭假稱하는 수도 있으나, 제8식의 무기에는 육칠전식의 추중망념麤中妄念은 지식止息되었으나 제8의 미세동념微細動念이 잔여殘餘하여 있으므로 진정한 무심이 아니다. 왕왕往往에 뇌야무기를 무심으로 착인錯認하는 예가 있으나, 견성은 구경각 즉 불지佛地이므로 무여열반의 진여무심眞如無心이다.

 

*  ‘집착 없는 참다운 마음’은 미세한 무명인 아뢰야식을 영원히 소멸시킨 것, 즉 남김 없는 열반인 부처님의 경지만이 그것이다.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 등이 소멸되고 아뢰야식만 있는 상태를 ‘집착 없는 마음’이라고 임시로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아뢰야식에는 거칠고 굵은 망념은 없으나 아뢰야식의 미세한 움직임이 남아 있으므로 ‘집착 없는 참다운 마음’은 아니다. 때때로 선善도 악惡도 아닌 아뢰야식을 ‘집착 없는 참다운 무심’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은 궁극의 깨달음인 부처님의 경지뿐이며, ‘남김 없는 열반’이 ‘집착 없는 참다운 마음의 경계’이다.     

 

【강설】  “견성하면 무심이다.”라고 선언한 첫머리의 논지를 이어 아뢰야식마저 끊어버린 무여열반 구경각만이 참 무심이지 그 이전엔 무심이 아님을 밝혔다.

 

【1-12】  ①오직 무여의열반계 중에서만 모든 망심이 다 소멸하니 무심지無心地라 부른다. 여타의 제위諸位는 모든 전식轉識이 단무斷無한 고로 무심이라 가명假名하나 제8아뢰야식이 아직 멸진치 못하였으므로 유심지有心地라고 이름 한다. ①唯無餘依涅槃界中에 諸心이 皆滅하니 名無心地요 餘位는 由無轉識故로 假名無心이나 由第八識이 未滅盡故로 名有心地니라. (『瑜伽師地釋』, 『大正藏』 30, p.887b.)

 

*  오직 남김 없는 열반의 경계에서만 모든 그릇된 생각들이 다 사라지므로 ‘집착 없는 마음의 경지’라 부른다. 나머지 여러 경계에서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 등이 모두 끊어져 없으므로 집착 없는 마음이라 임시로 말할 수는 있으나 아뢰야식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에 ‘집착이 남아 있는 마음의 경계’라 이름 한다. 

 

【평석】  육칠 전식 즉 6추六麤가 영멸永滅한 멸진정滅盡定도 무심이 아니요 유심이며 10지 등각도 유심이다. “재득견성纔得見性하면 당하當下에 무심”이라고 한 무심은 제불여래승諸佛如來乘도 멸진한 무여열반의 불지무심이니 구경각이 견성인 연고이다. 이에 불교 만세의 표준인 『종경宗鏡』, 『기신起信』, 『열반涅槃』, 『유가瑜伽』 등의 정론으로써, 견성은 망멸증진妄滅證眞한 무심, 원리미세遠離微細한 구경각, 불생번뇌不生煩惱한 대열반이니 이로써 견성이 여래지 즉 성불임이 확연 명백하다. 

 

*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 즉 여섯 가지 거친 번뇌가 영원히 소멸된 멸진정도 ‘집착 없는 마음의 경지’에 들어선 것은 아니고 ‘집착이 남아 있는 마음의 상태’이며, 제10지와 등각의 경지도 ‘집착이 남아 있는 마음의 경지’이다.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면 즉시 집착 없는 마음의 경지가 된다.”는 무심은 제불여래승까지 소멸된 남김 없는 열반의 경지, 부처님의 경지, 즉 집착 없는 참다운 마음의 경지인데, 이것이 궁극의 깨달음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불교 만세의 표준인 『종경록』 『대승기신론』 『대반열반경』 『유가사지론』 등의 가르침에 의하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경지’는 그릇된 망념이 소멸되고 진실한 본성을 증득한 집착 없는 마음의 경지, 미세한 번뇌를 영원히 단절한 궁극의 깨달음, 번뇌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 크나큰 열반의 경지이다.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견성’은 부처님의 경지이며, 이것이 성불임이 분명하고 확실하다.  

 

【강설】  『대반열반경』과 『유가사지론』의 말씀을 살펴보더라도 성불하지 않으면 견성 아님이 자명하다. 반드시 부처님 말씀과 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야지 중간에 왜곡된 이설이나 사설을 정론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1-13】  ①오조五祖가 육조六祖에게 말하였다. 만약 자심自心을 통식洞識하고 자성을 명견明見하면 곧 천인사불天人師佛이라 이름 하느니라. ①五祖謂六祖曰 若識自心하고 見自本性하면 卽名天人師佛이니라. (『六祖壇經』, 『大正藏』 48, p.349a.) 

 

*  오조 홍인이 육조 혜능에게 말했다. “자기의 마음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참다운 본성을 명확하게 체득體得한 이 경지가 바로 하늘과 사람의 스승인 부처님의 경지이다.” 

 

【평석】  이는 오조가 육조를 인가부법印可付法할 때의 말이니, 구경불과究竟佛果를 성취하지 않으면 견성이 아님은 종문宗門의 철칙이다.

 

*  이것은 홍인 대사가 혜능 스님의 경지를 인정하고 가르침을 잘 전파하라고 당부할 때 하신 말씀이다. ‘궁극의 깨달음’을 증득하지 않으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 아님은 선문의 철칙이다.

 

【강설】  부처님 말씀과 보살들의 논에 이어 선종의 33조사들은 견성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검토해 보자. 견성하면 곧 성불이라고 일러주면 “육조 스님도 16년 동안 보임하셨는데 무슨 가당치 않은 말씀입니까?”하고 반박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단경』을 살펴보면 오조도 육조를 인가할 때, 견성見性하면 곧 천인사불天人師佛이라고 말씀하셨지 견성했으니 더욱 부지런히 갈고 닦아 다음에 성불하라고 말씀하진 않으셨다. 육조 혜능 대사가 오조 홍인 대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16년 동안 숨어 산 일을 두고 “오조 회하에서 견성하고 16년 동안 보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망설이다. 당시 가사와 발우를 전해 받은 혜능을 시기 질투한 무리들은 육조를 시해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들을 피해 법을 펼 적절한 시절이 도래하기를 기다린 것이지 부족한 공부를 무르익게 하려고 숨어 지낸 것이 아니다. 또 혹자는 달마 스님이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면벽한 일까지도 보임한 것이라고 떠들어 댄다. 그럼 달마 스님이 동토로 넘어올 때는 아직 성불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것 역시 때를 만나지 못해 숨어 지낸 것이지 남은 공부가 있어 숨어 지낸 건 아니다. 여러 전적들이 증명하다시피 달마 스님이 동토로 넘어오기 전에 스승으로부터 인가받고 성불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1-14】  ①견성하면 즉시에 여래가 되느니라. ②불성을 명견(明見)한 고로 즉각에 대열반에 현주(現住)하느니라. ③만약에 진성(眞性)을 돈견(頓見)하면 일념에 성불하느니라. ①見性하면 卽成如來니라. ②見佛性故로 卽住大涅槃이니라. ③若頓見眞性하면 一念에 成佛하느니라. (①『宗鏡錄』 44, 『大正藏』 48, p.672c. ②『宗鏡錄』 36, 『大正藏』 48, p.626b. ③『宗鏡錄』 17, 『大正藏』 48, p.504c.) 

 

*  ①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면 즉시 부처님의 경지에 들어선다. ②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체득했기에 크나큰 열반에 지금 머무르고 있다. ③만약 참다운 본성을 곧바로 철견徹見하면 순식간에 깨닫는다.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이 곧 여래가 되는 것이다. 

 

【평석】  견성이 즉시 여래며 대열반이며 성불이니, 이는 견성이 불교의 최후 극과極果임을 증언한 것이다.

 

【강설】  앞에서 여러 경과 논 그리고 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인용해 그 정론을 수립하고, 여기서부터는 그 논지를 총괄 정리해 견성이 곧 궁극의 과위인 성불임을 제시하였다.

 

【1-15】  ①만약에 심성心性을 체관諦觀하면, 즉시 불성을 철견徹見한 것이며 대열반에 현주現住한 것이니 여래와 동일하니라. ①若能諦觀心性하면 卽是見佛性이며 住大涅槃이니 卽同如來니라. (『宗鏡錄』 11, 『大正藏』 48, p.476c.)

 

*  마음의 본성을 자세하게 파악함은 즉시 참다운 본성을 철저하게 체득한 것이며 크나큰 열반에 지금 바로 머무는 것이니 부처님과 같은 경지이다. 

 

【평석】  심성을 체관諦觀함은 견성과 동일한 내용이다.

 

*  마음의 본성을 자세하게 파악함은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1-16】  ①불성을 명견明見하여 대열반에 현주現住하면 즉시 부사의 해탈에 상주하느니라. ①見佛性하야 住大涅槃하면 卽是住不思議解脫也니라. (『宗鏡錄』 24, 『大正藏』 48, p.550a.)

 

*  ‘참다운 본성’을 명백하게 체득하면 크나큰 열반에 지금 바로 머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불가사의한 해탈에 항상 머무는 것이다. 

 

【평석】  견성을 하면 일체의 업결業結을 초탈하므로 부사의 해탈이 아닐 수 없다.

 

*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면 업의 힘 때문에 생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므로 불가사의한 해탈이 아닐 수 없다. 

 

【1-17】  ①다만 법성을 명견明見하면 대열반에 주住하느니라. ②일체 만법에 진심眞心의 자성을 명견明見하면 즉시 여실如實한 구경각이며 즉시 돈연頓然히 성불함이니라. ①但見法性하면 住大涅槃이니라. ②於一切法에 見心自性하면 卽是如實究竟之覺이니 卽是頓成佛義니라. (①『宗鏡錄』 84, 『大正藏』 48, p.879c. ②『宗鏡錄』 26, 『大正藏』 48, p.566a.) 

 

*  ①다만 사물의 참다운 본성을 분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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