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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부처님같이 존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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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0 년 8 월 [통권 제88호]  /     /  작성일20-08-28 14:04  /   조회7,36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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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

觀彼怨家, 如己父母.”

 

  이것은 『원각경圓覺經』에 있는 말씀입니다. 중생이 성불 못 하고 대도大道를 성취 못 하는 것은 마음속에 수많은 번뇌, 팔만사천 가지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많은 번뇌 가운데서 무엇이 가장 근본 되는 것인가. 그것은 증애심憎愛心,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가禪家의 3조 승찬대사는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증애심만 떨어지면 

통연히 명백하도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이 증애심이 실제로 완전히 떨어지려면 대오大悟해서 대무심大無心 경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무심삼매에 들어가기 전에는 경계에 따라서 계속 증애심이 발동하므로 이 병은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대도를 목표로 하므로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 이것이 생활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가장 크게 죄를 지은 사람을 부모와 같이 섬겨라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입니다.

 


고암 스님과 성철 스님

 

  ‘나쁜 사람을 용서하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또 모르겠지만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라 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나 하실 수 있는 말이지 다른 사람은 감히 이런 말조차 못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불교에서는 ‘용서’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다고 잘못한 사람과 싸우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 그러니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중생의 불성은 꼭 같다[一切衆生, 皆有佛性]’고 주장합니다. 성불해 연화대 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죄를 많이 지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있는 중생이나 자성自性 자리, 실상實相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겉을 보고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한층 더 나아가서 세속말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고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부처님같이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실례로 들어도 그와 같습니다. 부처님을 일생 동안 따라다니면서 애를 먹이고 해치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데바닷타[調達]’입니다.

 

  보통 보면 데바닷타가 무간지옥에 떨어졌느니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느니[生陷地獄] 하는데 그것은 모두 방편입니다. 중생을 경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찌 됐건 그러한 데바닷타가 부처님에게는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부처님은 어떻게 원수를 갚았는가? 성불成佛, 성불로 갚았습니다.

 

“죄와 복을 깊이 통달하여 

시방세계에 두루 비추었다.

深達罪福相, 徧照於十方.”

 

  착한 일 한 것이 시방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혹시 이해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악한 짓을 한 무간지옥의 중생이 큰 광명을 놓아 온 시방법계를 비춘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가장 선한 것을 부처라 하고 가장 악한 것을 마귀라 하여 이 둘은 하늘과 땅 사이[天地懸隔]입니다마는, 사실 알고 보면 마귀와 부처는 몸은 하나인데 이름만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다 해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고, 아무리 성불했다 하여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더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와 부처는 한 몸뚱이이면서 이름만 다를 뿐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비유하자면 겉에 입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데바닷타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지만 그 근본 자성, 본모습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중에 데바닷타가 성불하여 크게 불사佛事를 하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했습니다. 데바닷타가 성불한다고 『법화경』에서 수기授記하였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 행동, 공부하는 근본지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불교에 들어오는 첫째 지침은 ‘모든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같이 섬겨라’입니다. 우리 불교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물론 소나 돼지나 짐승까지도 근본자성은 성불하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교 믿는 사람은 상대방이 떨어진 옷을 입었는지 좋은 옷을 입었는지 그것은 보지 말고 ‘사람’만 보자는 말입니다.

 

  옛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에 큰 잔치가 있어서 전국의 큰스님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 한 분이 검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잔치에 초청되었습니다. 본시의 생활 그대로 낡은 옷에 떨어진 신을 신고 대궐문을 지나려니 문지기가 못 들어가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좋은 옷을 빌려 입고 다시 갔더니 문지기가 굽신굽신 하면서 얼른 윗자리로 모셨지요. 다른 스님들은 잘 차려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이 스님은 음식을 자꾸 옷에 들이붓고 있습니다.

 

  “스님, 왜 이러시오. 왜 음식을 자꾸 옷에다 붓습니까?”

  “아니야, 이것은 날보고 주는 게 아니야. 옷을 보고 주는 것이지!”

  그리고는 전부 옷에다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비유입니까. 허름한 옷 입고 올 때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더니 좋은 옷 입고 오니 이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보고 사는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법문하시면서 큰 짐을 지워 주시네. 그건 부처님이나 하실 수 있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나. 말 한마디만 잘못 해도 당장 주먹이 날아드는데 어쩌란 말인가.” 하고 항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나간 실례를 몇 가지 들겠습니다.

  옛날에 현풍 곽 씨 집안의 한 사람이 장가를 들었는데, 그 부인의 행실이 단정치 못했습니다. 시부모 앞에서도 함부로 행동하고, 의복도 바로 입지 않고, 언행이 전혀 공손치 않아 타이르고, 몽둥이로 때리기까지 하고, 별 수단을 다 해봐도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양반집에서 부인을 내쫓을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이 『맹자孟子』를 펴놓고 읽다가 이런 구절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한 것 없이 착하다.

악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고 간에, 

누구든지 그 본성은 다 착하여 모두가 요순과 똑같다.

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

 

  여기에 이르러 그 사람은 다시금 깨닫고 생각했습니다. ‘본래 요순같이 어진 사람인데 내가 잘못 알았구나. 앞으로 우리 마누라를 참으로 존경하리라’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전에 양반집에서는 아침 일찍 사당에 가서 자기 조상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음날 아침 도포 입고 갓 쓰고 사당에 가서 절을 한 후에는 제일 먼저 자기 부인에게 넙죽 절을 했습니다. 부인이 자기 남편을 보니 미친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를 보고 욕하고 때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정색으로 정장을 하고 절을 하니 말입니다.

 

  “당신이 참으로 거룩합니다.” 하면서 남편이 또 절을 합니다.

  막 쫓아내는데도 한사코 따라다니며 절을 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란 본시 모두 착한 것이오. 당신도 본래 착한 사람인데 내가 잘못 보고 욕하고 때렸으니 앞으로는 당신의 착한 성품만 보고 존경을 하렵니다.”

  이렇게 하기를 한 달 두 달이 지나다 보니 부인도 자기의 본래 성품이 돌아와서 “왜 자꾸 이러십니까. 이제는 나도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제발 절은 그만 하십시오.”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요순임금과 똑같소. 그런 당신을 보고 내가 어찌 절을 안 할 수 있겠소?” 하며 여전한 남편의 기색에, 결국 부인도 맞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날보고 요순이라고 하는데 진짜 요순은 바로 당신입니다.”하면서 서로가 요순이라고 존경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전 인도에서는 조석朝夕으로 예불시간에 반드시 지송持誦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트르체타’라는 스님이 지은 『150찬불송一百五十讚佛頌』이 그것입니다. 의정義淨 법사의 『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에도 보면, 의정 법사가 인도에 갔을 때 전국 각 사찰에서 150찬불송을 조석으로 외우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베푼 은혜 천지보다 깊어도

그걸 배반하고 깊은 원수 맺는다.

부처님은 그 원수를 가장 큰 은혜로 본다.

恩深過覆載, 背德起深怨. 尊觀怨極境, 猶如極重恩.”

 

  어떤 상대를 부모보다, 부처님보다 더 섬기고 받들고 하는데, 그는 나를 가장 큰 원수로 삼고 자꾸 해롭게 합니다. 이럴 때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그만큼 상대를 더 섬긴다는 말입니다.

 

“원수는 부처님을 해롭게 해도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상대는 부처님 허물만 보는데

부처님은 그를 은혜로 갚는다.

怨於尊轉害, 尊於怨轉親. 彼恒求佛過, 佛以彼爲恩.”

 

  존어원전친尊於怨轉親!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근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잘해 주는데 상대방은 내게 잘해 주는 것은 하나도 없이 다 내버리고 자꾸 나를 해롭게만 합니다. 그런데도 섬기기만 하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상대를 받들고 섬긴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부처님 근본사상이고 불교의 근본입니다.

 

  전에도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만 예수교 믿는 사람 몇이 삼천 배 절하러 왔길래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을 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 반대하고 예수님 제일 욕하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도록 기원하면서 절하시오.” 

  그랬더니 참 좋겠다고 하면서 절 삼 천배를 다 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부처님 제일 욕하고 스님들 제일 공격하는 그 사람이 극락세계에 제일 먼저 가도록 축원하고 절 합시다.”

  이제는 우리 불자들에게도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바로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는 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게 되면 일체 번뇌망상과 일체중생의 병은 다 없어진다고 말입니다. 중생의 모든 병이 다 없어지면, 그것이 부처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을 목표로 하고 사느니 만큼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그때 자기감정에 치우쳐 살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의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교에서는 치고 들어오는데 자꾸 절만 하고 있으면 불교는 어떻게 되나? 상대가 한 번 소리 지르면 우리는 열 번 소리 질러야 겁나서 도망갈 텐데, 가만히 있다가는 불교는 씨도 안 남겠다. 자! 일어나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럴수록 자꾸 절하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원하는, 그런 사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전하고, 그런 사상으로 일상생활을 실천해 보십시오. 불교는 바닷물 밀듯 온 천하를 덮을 것입니다. 그것이 생활화되면 모든 사람이 감동하고 감복하여 ‘불교가 그런 것인가!’ 하여 불교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애는 어느 곳에 있는가? 저쪽에서 소리 지른다고 이쪽에서 같이 소리 지르면 안 됩니다. 저쪽에서 주먹 내민다고 이쪽에서도 같이 주먹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불 지른다고 같이 불을 지르면 함께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쪽에서 아무리 큰 불을 가져오더라도 이쪽에서 자꾸 물을 들이붓는다면 어찌 그 물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은 물을 못 이길 것입니다. 나중의 성불成佛은 그만두고 전술戰術, 이기는 전술로 말하더라도 불에는 물로 막아야지 불로 달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근본은 어디 있느냐 하면, 모든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법문의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천노유에 상관없이 부처님으로 섬긴다.

지극한 죄인을 가장 존중하며

깊은 원한 있는 이를 깊이 애호하라.

實相無垢常淸淨, 貴賤老幼事如佛. 

極重罪人極尊敬, 深怨害者深愛護.”

 

  일체 만법의 참모습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합니다. 유정有情, 무정無情 할 것 없이 전체가 본래성불입니다. 옷은 아무리 떨어졌어도 사람은 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귀한이나 천한이나, 늙은이나 어린이나 전부 다 부처님같이 섬기고, 극히 중한 죄를 지은 죄인까지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동시에 나를 가장 해롭게 하는 사람을 부모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자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근본지침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아 생활하고 행동해야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법당에 들어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은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는 여기에 있느니 만큼 우리 서로서로 노력합시다.  

 

│1982년 음 5월29일, 방장 대중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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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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