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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 불방일, 붓다의 마지막 유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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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20 년 9 월 [통권 제89호]  /     /  작성일20-09-21 11:07  /   조회24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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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좁은 국토에 변변한 자원도 없는 최빈국을 선진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원천은 다름 아닌 인적 역량이었다. 우리민족은 공부면 공부, 일이면 일 무엇이든 물불 가리지 않고 열심히 했다. 전후 세대에게 근면과 성실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사회는 과로사회가 되었고,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개미처럼 일만하는 워커홀릭의 세상이 되었다. 

 

워커홀릭과 워라벨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난과 배고픔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겐 일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은 낡은 가치관으로 비쳐졌다. 그래서 요즘은 밤낮 일만하는 삶이 아니라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벨이 사회적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설사 소득이 줄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삶을 즐기는 여유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세기 동안 미친 듯이 달려온 우리사회도 이제 휴식이 중요해졌고, 한번 뿐인 인생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근면과 휴식의 문제는 수행자의 삶에서도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수행자의 중요한 덕목에 중에도 쉼[休]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의 삶은 세속적 욕망과 질주의 멈춤[止]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 맥락에서 ‘쉬고 또 쉬라’는 『벽암록』의 ‘휴거헐거休去歇去’는 선가에서 자주 목격하는 격언이다. 내면에서 타오르는 마음을 쉬고, 욕망의 대상을 쫓아가는 몸짓도 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근면과 성실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쉼은 모든 삶의 행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관성적 삶의 멈춤이며, 욕망의 대상을 향한 질주의 멈춤이다. 따라서 멈춤은 단지 멈추기 위함이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한 한 과정이다. 쉼 역시 나태와 게으른 삶을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의 질주를 멈추고 바른 방향으로의 정진으로 이어져야 한다. 따라서 수행과 정진에서는 여전히 근면과 성실이 중요한 덕목이 된다.

 

불교에서 근면과 성실을 이야기할 때 정진精進과 함께 등장하는 말이 ‘방일하지 말라’는 ‘불방일’이다. ‘방일放逸’이란 마음의 긴장이 풀어져 나태해진 상태를 말한다. 교학적 맥락에서 방일은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선善의 실천을 게을리 하고, 나쁜 쪽으로 흘러가게 하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방일에서 방放은 ‘놓는다’는 뜻이고, 일逸은 ‘달아나다’는 뜻이다. 따라서 방일의 사전적 의미는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거리낌 없이 노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규율과 절제를 잃어버리고 정신 줄 놓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방종放縱이나 방기放棄와 비슷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설일체유부의 논서 『아비달마품류족론』 에 따르면 방일에는 여섯 가지 성질[性]이 있다. 즉, ‘닦지 않는 마음[不修]’, ‘익히지 않는 마음[不習]’, ‘별도로 닦아 익히지 않는 마음[不別修習]’, ‘굳건하게 짓지 않는 마음[不堅作]’, ‘항상 짓지는 않는 마음[不常作]’, ‘부지런히 닦고 익히지 않는 마음[不勤修習]’이 그것이다. 방일이란 단지 긴장이 풀어져 마음이 헤이해진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악법을 끊고 선법을 실천하기 위해 부지런히 닦고 익히고, 마음을 굳건히 하고, 항상 흐트러지지 않고 부지런히 닦고 익히는 것이 수행자의 삶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방일이라는 것이다.

 

악을 막고 선을 실천하는 불방일

 

이상과 같은 방일의 반대 개념이 ‘불방일不放逸’이다. 선심소 중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불방일은 악을 행하지 않도록 막고 부지런히 선을 행하도록 하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방일이 닦지 않고, 익히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마음이라면 불방일은 그 반대로 열심히 닦고 익히고 노력하는 성실한 자세를 말한다.

 

호법의 『성유식론』에 따르면 불방일의 본성[性]과 작용[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선 불방일의 본성은 “근勤과 세 가지 선근[精進三根]으로 하여금, 단멸하고 닦아야 할 것에 대해서 방지하고 닦는 것을 본성으로 삼는다[斷修防修為性].”고 했다. 11가지 선심소 중에서 정진과 더불어 세 가지 선근인 무탐(무집착), 무진(자비), 무치(지혜)라는 심소가 잘 작동해서 끊어야할 악은 끊고, 막아야할 악행을 방지하는 것이 불방일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착한 심소들이 맡은 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관찰하고 끊을 악은 끊고, 막을 악은 막는 것이 불방일의 본성이다.

 

다음으로 불방일의 작용[業]에 대해서는 “방일함을 다스리고[對治放逸]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착한 일[善事]을 원만히 이루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다.”고 했다. 마음이 나태해지는 것을 잘 다스려 세상의 선한 일과 출세간의 선한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원만히 성취되도록 하는 것이 불방일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네 가지 선심소가 “단멸하고 닦아야 할 것[斷修事]에 대해서 능히 방지하고 닦는 것[皆能防修]”이 불방일의 주요 역할이다. 즉 끊어야할 악한 일은 끊게 하고, 막아야할 악행은 막는 작용이 불방일이다. 결국 불방일은 별도의 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 무탐, 무진, 무치라는 네 가지 선심소로 하여금 “악한 일을 방지하고[防惡事] 착한 일은 잘 닦도록 하는 것[修善事]”이 핵심적 역할이다. 착한 심소들을 관찰하고 있다가 그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여 선법은 잘 닦게 하고, 악법은 잘 막게 하는 것이 불방일의 역할임을 알 수 있다.

 

무상살귀에 맞서는 불방일

 

불방일이 게으르지 않음과 성실을 내용으로 한다면 11가지 선심소 중에 ‘근勤’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성철스님은 “근勤도 불방일과 내용은 같지만 근은 적극적인 면에서 하는 말이고, 불방일은 소극적인 면에서 하는 말”이라고 둘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했다. 근이 보다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태도라면 불방일은 다른 선심소가 잘 작동하도록 관찰하고 독려하는 소극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방일은 마음의 집중과 긴장감을 놓고 감각적 요구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바른 방향에 대한 의지를 놓아버리면 자연히 놀고 싶고, 쉬고 싶고, 감각적 욕망과 같은 부정적 에너지에 끌려가게 된다. 반면 불방일은 마치 목동이 송아지를 돌보듯 항상 자신에 대한 고삐를 잡고 있는 것과 같다. 목동이 고삐를 놓치는 순간 송아지는 남의 밭에 들어가고, 남의 작물을 망치게 된다. 상황의 주도권을 내가 쥐려면 고삐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고삐를 잡고 있는 한 상황에 대한 주도권은 내가 쥐게 된다.

 

마찬가지로 불방일은 자신에 대한 고삐를 놓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성찰하고 좋은 심소들이 상황 관리를 잘 하게 하면 자기 삶의 방향과 내용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방일하면 감각적 쾌락과 나태와 같은 부정적 에너지가 나의 삶과 방향을 결정한다. 이렇게 보면 불방일은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잃지 않고 자기 삶을 주도하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태도임을 알 수 있다.

 

쉬고 싶을 때마다 쉬고, 놀고 싶을 때마다 놀고, 감각적 욕구만 쫓아간다면 삶에서 성취란 있을 수 없다. ‘인생은 빛을 찾는 여행’이라고 했다. 삶은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걸어갈 때 본능의 이끌림을 물리치고 자신의 삶을 성취하게 된다. 부처님도 원력願力이라는 힘으로 사바세계로 오셨다. 우리들에게 원력은 삶에 대한 꿈이자 비전이다. 그런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업력에 의해 태어나 본능에 이끌려 살다가 소멸하고 만다. 본능에 이끌려 사는 것을 지양하고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살아갈 때 의미 있는 삶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자신에 대한 고삐를 놓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이 곧 불방일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諸行無常, 不放逸精進]!” 이 말씀은 부처님께서 마지막 안거를 나시며 제자들에게 남긴 최후의 유훈이다. 보통 ‘게으르지 말라’는 의미로 번역되지만 부처님께서 남긴 최후의 설법에 담긴 메시지가 바로 ‘불방일’이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변화한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유한하고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 삶은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나는 영화처럼 시간예술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삶은 무상에 잠식당하고 만다. 무상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죽음으로 인도하기에 무상살귀無常殺鬼라고 한다. 제아무리 아름답고 고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백년을 넘기지 못한다. 무상이라는 도도한 흐름에 맞서 자신의 삶을 그려가는 것은 성실한 노력에서 나온다. 워라벨의 시대에도 여전히 불방일과 근면이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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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 탄문(900-975)부도. 보물 제105호. 높이 4.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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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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