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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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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0 년 9 월 [통권 제89호]  /     /  작성일20-09-21 13:56  /   조회6,99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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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명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일체 만법이 본래 불생불멸이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고 감去來이 없고, 생명도 또한 거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엄에서도 “일체법불생一切法不生이요, 일체법불멸一切法不滅이라.”고 하였고 법화에서도 “제법諸法이 종본래從本來로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라.” 하였는데, 이 적멸상寂滅相은 생멸이 끊어진 불변상不變相을 말합니다. 이 불생불멸을 진여, 법계, 연기, 실상, 법성, 유식, 유심 등 천명만호千名萬號로 이름하나 그 내용은 다 동일합니다. 이는 우주의 근본원리이며 불타의 대각大覺 자체여서 일체 불법이 불생불멸의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불생불멸의 원리는 심심난해하여 불타의 혜안慧眼이 아니면 이 원리를 볼 수 없어 불교 이외의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치 못하였으며, 이 불생불멸은 자고로 불교의 전용어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고도로 발달되어 현대과학에서도 원자물리학으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여 불교의 이론에 접근하여 구체적 사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원영 스님, 성철 스님, 법정 스님, 원택 스님 

 

불타는 3천 년 전에 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하였고, 과학은 3천 년 후에 불생불멸을 실증하여 시간차는 있으나 그 내용은 상통相通합니다. 진리는 하나이므로 바로 보면 그 견해가 다를 수 없습니다. 다만 불타의 혜안이 탁월함에 감탄할 뿐입니다. 불교가 과학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 접근한 과학이론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불생불멸의 상주법계常住法界에는 증감과 거래가 영절永絶한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제법의 실상입니다. 이 무진연기상의 일체 생명은 성상일여性相一如이며 물심불이物心不二여서 유정무정有情無情의 구별이 없고, 생명은 유정무정의 총칭입니다. 그러므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을 수 있어야만 생명의 참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니 개개생명 전체가 절대여서 생멸거래가 없습니다. 무정 생명론은 너무 비약적인 것 같으나 유정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요, 무정도 항상 활동하고 있으니, 예를 들면, 무정물을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소립자素粒子들은 스핀Spin을 가져 항상 자동적으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바위들도 간단없이 운동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백억의 살아 있는 석가가

취하여 춘풍 끝에 춤추는도다.

百億活釋迦  醉舞春風端

 

2. 불교의 이상은 인간의 범주에 머물러야 합니까, 아니면 초월해야 합니까?

 

불교에서 볼 때에는 생멸 즉 진여이며, 따라서 현실이 절대이므로 번뇌 즉 보리이며, 중생 즉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 일체를 초월하여 일체를 구족한 절대적 존재이니 다시 초월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타가 출현한 것은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전하는 것뿐이요, 중생을 제불로 변성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진금眞金을 어떤 사람이 착각하여 황토로 오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금을 아무리 오인하여 황토라 호칭하여 사용하여도 진금은 변함없이 진금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진금을 다시 구할 것이 아니요, 오인된 착각 즉 망견만 시정하면 진금 그대로입니다.

 

이와 같이 일시적 착각으로 본래진불本來眞佛을 중생으로 가칭하여 중생으로 행동하여도 진불은 변함없으므로 ‘불용구진不用求眞이요, 유수식견唯須息見하라’. 즉 ‘진’을 구하지 말고 오직 망견만 제거하면 됩니다. 중생이 바로 진불이며, 사바가 즉 정토이며, 현실이 즉 절대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편협한 망견을 고집하여 겨울의 얼음을 모르는 여름의 하루살이가 되지 말고 본래시불本來是佛의 진소식을 개오開悟하여야 합니다.

 

비로자나불의 이마 위 사람이

십자가두에 섰도다.

毘盧頂上人,  十字街頭立.

 

3. 진정한 의미의 인간 회복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본래 일체를 초월하고 일체를 구족한 절대적 존재이니 이것을 ‘본래시불’이라 합니다. 이 본래시불을 중생으로 착각하여 중생이라 가칭하며 중생으로 행동하고 있으니, 이 망견을 버리고 본래불인 인간면목을 확인하는 것이 인간회복입니다. ‘진금’을 ‘황토’로 착각하였으나 활연히 각성하여 진금임을 확인하면 다시는 더 구할 것이 없음과 같습니다.

 

또한 면경面鏡과도 같습니다. 본래 청정한 면경이 일시적으로 때가 끼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나 그 때만 닦아 버리면 청정한 그 면경이 그대로 드러나서 일체를 비출 것이니 다른 면경을 구할 것이 없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래면목, 즉 심경心鏡을 덮은 때와 먼지를 상세하게 규명하여 그 진애塵埃가 티끌만치도 없도록 철저히 제거함을 인간회복의 본령本領으로 삼고 있습니다. 심경을 덮고 있는 이 진애인 망견을 추중麤重과 미세微細로 양분하여 추중은 제6식, 즉 현재의식이며, 미세는 제8식, 즉 무의식無意識입니다. 이것만 완전히 제거하면 자연 통명洞明하여 진불인 본래면목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면경을 부수고 오너라.

푸른 하늘도 또한 몽둥이 맞아야 하는도다.

打破鏡來  靑天也須喫棒

 

4. 종교 안에서 인간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종교를 일반적으로 유한有限에서 무한無限으로, 상대相對에서 절대絶對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불교에서는 유한이 즉 무한이며 상대가 절대임을 주장합니다. 반면 일반 종교는 현실 외에 절대를 따로 세워서 자기가 생존하는 현실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무한의 세계에 들어감을 목표로 삼습니다.

 

불교에서는 현실이 즉 절대여서 인간이 절대무한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 절대세계를 다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대’를 ‘상대’로 착각하는 망견만 버리면 삼라만상 전체가 절대이며 일체가 본래 스스로 해탈하니 불교의 진리는 인간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가령, 태양이 하늘 높이 밝게 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눈을 감고서는 “어둡다, 어둡다”고 소리치면 눈뜬 사람이 볼 때에는 참으로 우스울 것입니다. 그러나 어둡다 한탄하지 말고 눈만 뜨면 자기가 본래 대광명大光明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이와 같으니 다만 눈을 가린 망견만 버리면 자연히 눈을 뜨고 광명이 본래 충만해 있었음을 볼 것이니, 눈만 뜨면 인간이 본래 절대 광명 속의 대해탈인大解脫人임을 알 것입니다.

 

부처도 또한 찾아볼 수 없거늘

어떤 것을 중생이라 부르는가.

佛也見不得  云何名衆生

 

5. 불확실성의 이 시대에 사는 현대인의 방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겠습니까?

 

‘광명光明이 적조寂照하여 하사세계河沙世界에 편만遍滿하니’ 일체가 각각 자기 위치에서 태평太平을 구가하거늘, 무엇이 ‘불확실’하며 어떻게 ‘방황’하는지 ‘불확실’, ‘방황’ 등의 언구言句는 진정한 불교사전에는 없습니다.

 

다만 눈을 바로 뜨고 좌우를 두루 보십시오. 광활한 대로는 우주보다 더 넓고, 혁혁한 광명은 수천 개 태양이 병조並照하는 것과 같아서 설사 천지가 붕괴하더라도 당황할 게 없습니다. 

 

생사다 해탈이다 함은 백일하白日下의 잠꼬대요, 불타니 보살이니 부름은 명경상의 먼지이니, 우리는 본래의 광명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수양버들은 가지마다 푸르고

복숭아꽃은 송이마다 붉도다.

楊柳系系綠,  桃花片片紅.

 

6. 욕망과 물질은 인간에게 무엇입니까?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욕망과 물질은 무가無價의 진보珍寶입니다. 자기 개인의 사리사욕을 떠나 국가 민족만을 위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인류라는 협소한 한계를 넘어서서 일체 생명을 위한 욕망과 물질이야말로 참다운 보배입니다.

 

자기 개인을 위한 사리사욕은 물론 해독害毒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자아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일체를 위해서만 사는 삶은 제불諸佛의 본원本願이며 보살의 대도大道입니다.

 

만 섬 쌀을 배에 가득 싣고 풀어놓았으나

쌀 한 톨 때문에 뱀이 항아리에 갇혔도다.

萬斛盈舟信手拏  劫因一粒甕呑蛇

 

7. 불교의 사회 구제는 가능합니까?

 

‘구제’라는 어구는 불교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이 절대적 존재로서 일체의 생명이 불타 아님이 없으므로, 불교에 입문하는 첫 조건이 일체중생을 부모와 같이 존경하고 사장師長과 같이 섬기며 부처님과 같이 시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가 있을 뿐 구제와 구원은 없습니다.

 

남을 돕는 것이 불공佛供임을 항상 역설하지만, 이 ‘남’이라 하는 것은 절대자를 지칭함이며 절대자는 불佛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즉 불공입니다.

보통 남을 돕는다면 부자가 가난한 이를 돕는 태도인데, 이것은 참으로 남을 도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참다운 도움은 병든 부모를 자식이 모시듯, 배고픈 스승께 음식을 드리듯, 떨어진 옷을 입으신 부처님께 옷을 지어 올리듯 하여 모든 ‘남’을 항상 받들어 모시는 태도만이 진정으로 남을 돕는 것입니다.

 

구제라 함은 이와 반대로 약하고 가난한 상대를 불쌍한 생각으로 돕게 되는 바, 이는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이니 불교에서는 구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디를 가나 배고픈 부처님, 옷 없는 부처님, 병든 부처님 등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 무수한 부처님들을 효자가 부모 모시듯이, 신도가 부처님 받드는 성심으로 섬기며 돕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니 ‘봉사’가 있을 뿐 구제는 없습니다.

 

사자는 여우소리를 내지 않도다.

獅子不作野干鳴

 

8. 한국 불교는 1980년대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불교에는 만고에 일관된 진리가 있을 뿐, 시대적이거나 지역적인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시하처何時何處를 막론하고 불교의 근본정신에 입각하여 만사를 행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일체 생명 즉 중생이 ‘본래시불’의 기치를 높이 들고 생명의 절대를 널리 전하며, 모든 사심을 떠나 아무것도 구하는 것 없이 일체중생불에게 신명을 다해 봉사하는 것뿐입니다.

 

천 겁을 지나도 과거 아니요

만세에 걸쳐 항상 지금이로다.

歷千劫而不古  亙萬世而長今

 

9. 수행하는 승려들에게 주고 싶은 스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지구가 광대하지만 무변한 허공의 먼 곳에서 바라보면 찾아볼 수도 없는 아주 작은 물체입니다.

허공이 그렇게도 광활하지만 진여법계에 비하면 대해大海의 일적一滴에 불과하므로 ‘공생대각중空生大覺中은 여해일구발如海一漚發’, 즉 허공이 대각大覺 속에서 생기生起함은 대해의 물거품이 하나 일어남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일체 생명의 본체인 진여법성眞如法性의 공용功用은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이어서 미진제불微塵諸佛이 일시에 출현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언설하여도 법성공용의 일호一毫도 설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불가사의한 무가진보無價珍寶를 일체 생명이 구유具有하고 있으니, 허망한 몽환 속의 구구한 명예와 이양利養은 일체 버리고 이 무진장의 보고를 활짝 열어서 일체를 이익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탐타일립미貪他一粒米하여 실각만겁량失却萬劫糧’이라, 즉 한 톨의 쌀알을 탐하여 만겁의 양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순치황제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창건한 영웅입니다만 발심출가할 때에, 자기는 본시 서방의 걸식하며 수도하는 일개 납자였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로 타락하였는고,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천자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보위를 헌신짝같이 차버리는 용단이야말로 수도인修道人의 참다운 심정입니다. 그러하니 우리 수행자들은 오직 대각大覺을 성취하기 위하여 일체를 희생합시다.

 

달 밝은 깊은 산에 소쩍새 울음 운다.  │1982년 음 6월30일, 방장 대중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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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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